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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순무 빵이었고, 점심에는 순무 채소였고, 저녁에는 순무 커틀릿에다 순무 샐러드였어.”

 

카친스키는 고참병처럼 휘파람을 불며 말한다.

 

“순무 빵이라고? 그렇다면 너희들은 운이 좋았고, 여기선 톱밥으로도 빵을 만든단 말이야. 그럼 흰 콩은 어떻게 생각하니, 배 터지게 먹고 싶지 않아?”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中 발췌 

 

전쟁 소설을 보면 카친스키와 같은 캐릭터가 꼭 한 명 나온다. 국적과 시대를 초월해 넉살 좋고, 동료들을 잘 챙기며, 특히나 ‘먹을 것’을 찾는 데에 있어선 귀신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전쟁 영화, 소설의 클리셰라고 해야 할까? 

 

카친스키의 능력은 모든 전쟁 관련 이야기의 기본 모태가 된다.

 

“정말 이거 진짜 빵이네. 아직 따끈따끈한데.”

 

카친스키는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실 빵이 있는 게 중요하지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사막 한가운데 갖다 놓아도 그는 한 시간 만에 대추야자 열매와 구운 고기, 와인으로 저녁상을 차릴 녀석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中 발췌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등장하는 음식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두 가지가 빵과 순무이다.

 

순무는 전쟁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영국의 해상봉쇄로 물자수입이 어려워진 언제부터인가 순무를 식단의 메인 재료로 내놓기 시작했다. 소설에도 나와 있듯이 순무 빵, 순무 커틀릿, 순무 샐러드 등등... 물자 궁핍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순무를 먹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인기 없는 음식이었지만, 이때는 정말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식량부족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순무로 식탁을 도배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1916년부터 1917년까지를 ‘순무의 겨울’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건 비단 독일만의 문제가 아닌데, 전쟁 때문에 비인기 식품을 억지로 먹거나, 평소 거들떠보지 않았던 식품을 먹게 되는 경우는 왕왕 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국민들이 ‘당근’에 눈을 뜨게 된 계기도 마찬가지다. 식량 소비량의 70%를 해외에서 들여오던 영국은 독일의 U보트의 상선파괴 작전 때문에 수입량이 줄어들자 도시에 텃밭을 만들고 당근과 시금치 재배에 들어갔다. 오늘날 카레에 당근을 넣고 먹는 건 여기서 시작된 거다.

 

서양인의 빵은 한국인의 ‘밥’과 같은 개념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신선한 빵, 제대로 된 빵을 구하는 게 어렵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게 생산, 유통, 분배 과정에서 ‘전쟁’이란 비상상황이 겹치면 당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1차 대전 당시 독일군 1명의 하루 식자재 양은 이랬다.

 

1파운드의 고기(약 450g), 1과 1/4파운드의 빵(약 560g), 8온스의 채소(약 220g), 3온스의 치즈 통조림(약 85g), 3온스의 설탕과 차(약 85g), 1/2온스의 소금(약 14g), 4온스의 잼(113g)

 

이건 어디까지나 ‘최상’의 상황이었을 때이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고기의 비계가 늘어났고, 나중에는 통조림으로 대체됐으며 그 양도 줄었다. 채소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건조 채소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럼 빵은 어떻게 됐을까? 역사 이래로 전쟁터에서의 ‘빵 보급’은 승리와 직결됐다. 신선한 빵을 먹는 군대가 이길 확률이 높았다(그만큼 보급이 안정적이라는 증거다). 

 

1차 대전 독일군은 기본적으로 야전 제빵소에서 빵을 만들어 신선한 빵을 보급하는 게 규정이었으나, 병사들은 보통 만든 지 1주일 넘은 빵들을 받았다. 문제는 점점 전쟁이 길어지면서부터다. 영국해군이 해상봉쇄를 하면서 물자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빵 보급이 어려워졌고, 빵 대신 건빵과 같은 하드택(hardtack)이 보급되기도 했고(부숴 먹다가 손을 다치기도 했다), 나중에는 빵에다가 ‘이물질’을 넣기 시작했다. 

 

톱밥이나 지푸라기 등을 섞어서 중량을 늘렸던 거다. 군용 빵답게 맛은 없었다고 한다. 맛 보다는 영양, 영양보다는 장기보관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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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하얀 밀가루로 빵을 만들지 않았다. 군용이기에 장기보존과 생산성에 집착했던 거다. 그 결과 말린 감자 전분, 호밀, 톱밥 등을 넣어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빵 자체가 거칠고 맛이 없었다. 단,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할 수 있었고, 장기보관에도 유리했다. 

 

문제는 사람이 가축도 아니고, 톱밥과 지푸라기를 언제까지 먹을 수 있냐는 거였다. 전쟁 상황이 변함에 따라 빵에 들어가는 톱밥과 지푸라기 양이 점점 늘어났고, 1차 대전이 끝날 무렵엔 이게 톱밥을 구워낸 빵인지 지푸라기를 구워서 내놓은 빵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톱밥과 지푸라기의 양이 늘어났다.

 

독일군은 1차 대전 때 겪었던 일을 2차 대전 때도 똑같이 겪었다. 전쟁 초기에는 맛이 없지만, 그래도 먹을 순 있다 정도였는데 전쟁이 길어지고 연합군들의 포위로 물자 부족이 심해지자 결국 군용 빵에 들어가는 톱밥과 지푸라기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는 거다. 독일군에게 있어 빵에 들어가는 톱밥과 지푸라기의 양은 전쟁의 상황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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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식량의 맛은 2차 대전 당시의 미군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군이 2차 대전 당시 군용 초콜릿을 만들 때 조건은 녹지 않는 것과 맛이 없도록 하는 거였다. m&m 초콜릿을 보면 코팅이 되어 있는데, 이 아이디어는 전쟁을 통해서 얻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병사들이 딱딱한 설탕으로 껍질을 씌운 초콜릿을 먹는 걸 보면서 코팅을 생각한 거다. 덕분에 2차대전 태평양 전선의 병사들에게 녹지 않는 초콜릿을 보급할 수 있었다.

 

군납 초콜릿의 대명사라 불린 허쉬의 경우는 아예 직접적으로 ‘맛없음’을 요구받았다. 2차 대전 직전 미 군수사령부가 허쉬사에 요구한 군납 초콜릿 요구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무게는 4온스(약 113g)

2. 상온에서 녹지 말 것

3. 맛은 삶은 감자보다 달 것

4. 고열량일 것

 

전투식량이기에 비상시에 확실한 열량을 제공해야 했다. 113g을 가지고 1,800칼로리의 열량을 보장해야 했다. 또한 군대가 어디로 배치될지 모르는 일이라 녹지 않아야 했다. 허쉬는 49도에서도 녹지 않는 초콜릿을 만들었다. 남은 건 맛이었다. 맛없는 초콜릿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명료했다. 

 

“병사들이 비상시가 아닌데 초콜릿을 까먹을 수 있기 때문에”

 

군대 음식은 ‘맛’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맛없어도 문제고, 너무 맛있어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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