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석진욱 추천0 비추천0






1998.8.3.월

딴지일보 논설 고문 석진욱



일본에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관심을 집중시키던 일본 대장 대신에 전 수상이었던 미야자와씨가 내정 되었지요. 일본경제가 어둡다 보니 지금으로부터 66년전의 일을 떠올리게 할 모양입니다.

전 수상이었다가 대장성 장관이 된 경우는 전후, 즉 2차대전 후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戰前 2차대전 전에는 있었습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라는 사람이지요..일본 경제에 있어서는 신화적인 인물입니다. 그 최후도 비극적이었기 때문이죠..

1931년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는 마침내 일본을 강타 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대 농업공황은 몰락 농민들은 도시로 도시로 내몰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1930년대에 일본농업 붕괴로 일본정부는 한국에서 대량의 쌀을 공출해 갔습니다..)

만주와 내몽고 침략이 "국민"의 이름으로 주장되었고 만주-내몽고 침략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자" 혹은 반역자로 몰리던 1931년 9월 결국 만주사변이 터졌습니다.

유명하지만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결의는 "일본의 국가발전"을 저해하려는 서구열강의 음모로 규정한 일본정부와 우익 그리고 군부에 의해 짓밟혀졌고 다음해 1932년 5월 15일에는 5.15 사건이 발생, 수상이던 이누카이씨가 살해됩니다. (그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에 대해 반감이 많았음)

그러나 점령한 만주의 광물과 새로운 농업 개척지를 이용하여 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던 우익 군부세력의 복안은 완전 실패로 돌아갔고 이때 대장성 장관인지 재무장관인지 헷갈리는데 어쨌든 "다카하시 고레키요"장관은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경제정책을 내놓습니다.

그것은 "일본은행이 인수하는 국채를 발행하여 적극재정을 펼친다..."는 것이었지요...

다시말해 일본은행이 국채를 인수하려면 엔화를 찍어내 인수해야 되는데 일본정부는 그 돈으로 중공업을 일으키고(당연하겠지만 주로 군수산업) 농촌에 공공 토목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흡수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되면 민간 생산설비가 다시 가동되므로 조세수입이 늘어나게 되고 다시 그 돈으로 적극재정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으므로 경제는 살아나게 됩니다.

예상대로 1933년 1934년을 거쳐 1935년이 되자 경기는 완전히 회복되어 일본경제는 대공황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 해군력 강화에 역점을 두어 와싱턴 군축조약을 탈퇴하기도 하였지요..)

1935년 일본국회에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장관은 다음과 같이 발언합니다.

"경기가 회복되어 인플레 기미가 보이므로 국채는 줄이고 군사비도 삭감한다.."

그러나 1935년은 일본 군부로서도 전환점에 해당하던 시기였습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 관동군은 1933년 열하성일대에서 공작을 감행 한때 관내(산해관이남 장성내)에까지 침공하여 이른바 탕쿠정전협정을 체결합니다.

1935년에는 하북성에서 국민당 정부기관을 철수시키고 이어 차하르성에서도 국민당 정부기관을 접수해버립니다. 결국 1935년에 화북성동부에 친일 괴뢰정부가 들어설 정도로 일본의 침략야욕을 그칠 줄 몰랐는데요...하필 그 때 도쿄의 국회에서 고레키요 장관이 군사비를 삭감한다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진행되던 중국침략이 꺽이게 될 위기에 빠진 일본군부는 황도파 청년장교단을 사주, 소위 2.26 사건이 터집니다. (황도파 장교단은 재벌타도 천황친정을 주장하는 과격파 우익 군부단체 - 이를 견제 하는 세력은 통제파 - 관료,재벌,정치인과 연결)

1936년 2월 26일 황도파 청년장교단은 새벽을 기해 도쿄 중심부에서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이들 쿠데타군은 당시 내각요인들을 암살하고 수상까지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수상은 달아나는데 성공, 대신 그와 닮은 사람이 대신 칼에 찔려 죽고 일본경제를 대공황에 서 구출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 장관역시 그날 일본 군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천황은 이들 쿠데타군에게 다시 병영으로 돌아가라는 친서를 내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지만...이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가속이 붙어 결국 옛날 메이지 유신때의 잔재인 이른바 "현역 무관제"가 부활하면서 도조 히데키 수상의 탄생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지요..

어쨌든 다카하시 고레키요 장관의 일본은행 인수 국채발행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시 일본공황은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공황이었다는 점
2. 파운드와는 달리 프랑과 달러는 금 본위제를 유지하여 기축통화의 붕괴로까지 가지 않은 점 (프랑은 1936년 금 태환정지)
3. 군국주의적 경향으로 각종 군축조약에서 탈퇴하여 군수산업에의 수요가 매우 많았다는 점

따라서, 인플레이션 정책이 정확하게 일본경제에 먹혀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나치독일이 모든 민간자본을 SOC사업과 군수산업에 돌려 경제를 부흥시킨 정책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점입니다. (나치독일의 경제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인플레이션 정책 - 단, 미 대통력 후버의 모라토리움 정책으로 독일 금융이 오스트리아 금융공황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어 건전성이 어느정도 유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성공의 요점)

일본 정부는 60여년전의 그 신화를 다시 창조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간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아직 알 수 없지요...

 

* 60여년전의 국채는 첨단의 금융상품이었습니다. 미래의 가치를 이전하여 현재에 투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지요...그것은 금 본위제 주축통화 경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 금 본위제 주축통화 체제가 아니면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지요.. 마찬가지의 개념으로 "신용"을 이전하고, "신뢰"를 이전하고 "위험"을 회피하려면? 그렇다면 방법은 ?

Derivative....





- 딴지일보 논설 고문 석진욱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