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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21. 목요일

sydney






-그들과 우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얻은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정리한 글입니다.






마이클 무어가 미국인의 무식을 폭로하는 책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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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아프리카'가 나라 이름으로 알고 있는 미국인들이 많을 정도로 무식이 무인지경이란다. 그런데 이에 질세라 10년 전에 호주의 신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렸다. 


 호주 뉴 사우스 웨일스 주 중부 해안(센트럴 코스트)의 매너링 파크에 사는 한 쌍의 남녀가 지난 4월 어느 날 쇼핑에 나서 싸구려 제품을 파는 모리셋 메가마트에 들렀다가 보지 못하던 깃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대런 맥케이(30)라는 남자와 그의 약혼녀 제니 던콤(27)은 깃발의 알록달록한 색상을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자기 집 앞에 있는 게양대에 달기로 마음먹고 10불(8천원)을 주고 샀다.

 

새로 구입한 깃발을 달아놓고 흡족해 하던 두 사람은 이웃 주민 한 사람이 와서 항의하며 깃발을 내리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등 협박조의 언사를 쓰자 더욱 분기탱천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깃발을 내리지 않겠노라며, 자기가 원하는 깃발을 내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이들이 집 앞에 높이 게양한 문제의 깃발은 히틀러의 나치스 깃발이었으나 그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

 

결국 이 사건이 호주의 한 신문에 기사화되어 세상에 알려지자 지역주민은 물론 재향군인회, 유태인 단체 및 연방 정치인들까지 아우성을 쳤지만 대런과 제니 커플은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결국 기자가 그 깃발이 나치를 상징하며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대전이 발발하고 4만 명의 호주인을 포함해 3천 5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주자 대런은 "나는 역사과목을 7~8학년(중1~2년) 때 밖에 못 배웠으며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호주엔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줄 알았다"고 말했고 약혼녀 제니 역시 그 때까지 나치 독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러한 깃발을 게양하는 것이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인 줄 알았다면 게양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자기가 모르고 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 약혼녀와 아들을 위협했다며 그런 왕따는 참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역사나 정치에 이 정도로 무관심하면서도 민주주의랍시고 제 권리에 대한 주장만은 철저하다. 이런 국민이 많다보니 호주가 투표를 강제로 하는 이유를 알만도 할 것 같다.

 

사실 돈이 아까우면 투표를 해야 하는 이 나라-호주는 투표 안하면 벌금을 물어야하는 비민주국가(?)이다-에서 이민자들은 선거 때마다 호주 정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후보자를 골라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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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투표는 한국처럼 정치에 대하여 전혀 몰라도 대강 인상착의를 보아서 한 사람만 쿡 찍고 나오면 되는 간단한 방식이 아니다. 사진은 없고 웬 인간들이 이름만 떼거지로 나열되어 있으니 누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판이다. 더욱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정 모르는 이민자들로서는 과연 누굴 찍어야 할까 하는 것이 투표장에서 연필 든 순간까지도 '내 마음 나도 몰라'인 판인 것이다. 그래서 순위도 무시하고 대강 찍어 놓고는 내가 찍은 사람이 됐는지 안됐는지도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다보니 이민자들이 찍은 표 중 무효표가 많이 발생할 것은 물어보나마나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호주 선거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생겼다.

 

몇 해 전에 멜번에 사는 큰 아들이 왔는데 시내에 투표를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뜬금없이 무슨 선거냐?" 물었더니 빅토리아 주 의회(시드니는 뉴 사우스 웨일 주이다) 선거가 있는데 부재자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를 하고 돌아 온 아들에게 어느 당을 찍었느냐고 물었더니 보수적인 자유당을 찍었단다. 이민자들은 보통 노동당을 지지하는 법인데 조금 의외라서 왜 자유당을 찍었느냐고 하니까 이유가 복잡했다. 그 전에는 깊은 생각 없이 자신이 이민자로서 사회적 소수라고 생각되어 노동당을 지지 했는데 자신의 입장에서 보다 깊이 생각해보니 자유당을 지지해야겠다는 것이다.

 

아들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인간답게 자기는 호주가 한국처럼 교수들의 월급이 똑같은데 미국처럼 전공별로 교수 월급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당을 찍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당이 교수월급을 전공별로 차등화 시키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적이 있 없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런 공약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자유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들로서는 노동당과 자유당의 정책적 기초로 볼 때 그렇게 바뀔 가능성이 없는 노동당보다도 바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유당을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유권자로서 결국 희미하게나마 무엇이 나의 유익과 관련이 있나 하는 것으로 정당의 지지를 결정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다. 골수 노동당을 지지자인 나로서는 한 지붕 밑에 배신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뜨악했지만 역시 투표는 예민하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해야 한다는 분명한 원칙은 새겨볼만했다. 동시에 내게 이익인지 손해 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될 수 있으면 자기들에게 손해가 가는 쪽으로 투표를 해대는 고국에 계신 동포들이 매우 염려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 믿다가 지옥의 문 앞에까지 간 이유가 무엇이겠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제대로 안 읽은 탓에 그의 똘끼를 몰랐기 때문일 거다.)


호주에는 해 마다 5만 명 이상의 한국 젊은이들이 워킹홀러데이 비자로 온다. 2014년도 상반기 입국자가 3만 명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살지 않아도 젊은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15년 동안 시드니에서 택시 운전을 했지만 시드니의 택시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 이유는 그저 하루하루 나가서 일하고 운전대를 놓으면 그것으로 끝일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재벌 기업에서 운영하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단순 조립을 하는 생산직 직원이 재벌 기업의 속사정에 대하여 모를 수 있듯이 나도 그렇다. 내 관심은 어떻게 하면 손님을 잘 태워서 그 날의 수입을 조금이라도 더 올릴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기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진짜로 불행한 일이다.

 

아들 녀석은 호주의 선거 시스템에 따라 자신에게 이익을 줄 정당이 어딘지를 고민하게 된 케이스지만 다른 호주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택시에서 정치 이야기 하는 사람을 보지를 못했다. 국내 정세는커녕 세계정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점잖은 부부가 타서 정치 이야기를 하기에 수상하다 싶었는데 내릴 때 보니까 한 때 야당 당수이었고 곧 수상이 될 것이 틀림이 없는 '말콤 턴블'이었다. 이 나라는 정말 정치인이 아니면 정치 이야기를 안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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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의원 내각제가 정착되어 있는 호주 정치는 중산층 이상이 사는 지역은 만년 자유당이, 서민층이 사는 지역은 만년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변수가 일어날 수 있는 몇몇 지역에서 항상 판세가 결정된다. 그러다 보니 대강 예상 하는 대로 되기 때문에 출마한 당사자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한국정치에 비해서 보는 사람으로서는 재미가 훨씬 덜한 편이다.

 

2002년 12월 19일 밤 10시 쯤 BBC 방송의 뉴스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는 뉴스가 간단하게 흘러 나왔다. 나는 순간 '욱'하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더니 다음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이 어른거려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차를 세웠다. 안경을 낀 상태이기 때문에 달리면서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년 남자 손님이 매우 놀라서 근심스럽게 "너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서 기뻐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친구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미친놈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할까 보아서 나는 신통치 못한 영어로 주섬주섬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외국인들에게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내 개인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해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 정치를 했었는데 한국에서 청춘을 바쳐 온갖 고생을 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이민을 왔다고 설명하면서 내가 못 얻은 것을 노무현이 모두 이룬 것 같다고 했다.

 

아마 그래도 그 사람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할 수가 없어서 "운전 중에 울어서 미안하다. 그만 하자"고 했다. 아마 그날 그는 집에 돌아가서 "오늘 정말 미친 놈 보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우는 놈을 보았다"고 할 것이다. 비록 몇 년 후 다시 노무현 때문에 눈물을,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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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 필자의 요청으로 올림

5년 전 시드니 故노무현 추도식 추모사를 낭독하는 필자



모든 것이 너무 심각한 한국에 비해서 호주는 배를 타고 들어오는 난민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무기를 들고 쳐들어오는 군대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스리랑카, 이라크 등지에서 빈손으로 쳐들어오는 난민이 안보 문제이다. 즉 비행기 피플은 문제가 안 되지만 보트 피플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먹을 것도 없는 북한이 쳐들어올까봐 떠는 것이 한국의 안보라면 호주의 안보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찾아오는 것이다. 끊임없이 배를 타고 호주로 몰려오는 밀입국자들 때문에 호주 정권이 흔들흔들하고 있다.

 

최근에 호주가 10년 전에 인도네시아 영토인 휴양지 발리에 대량의 마약을 가지고 와서 팔려고 하다 체포된 마약 사범 2 명에 대하여 사형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호주는 사형제도가 없다.) 호소, 읍소, 간섭, 공갈, 협박 등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에 압력을 벌여서 양국이 전면적으로 신경전을 펼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열을 받은 인도네사아가 현지의 난민신청자 1만 명을 풀어 '인간 쓰나미'를 일으키겠다고 경고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호주 정부 탓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집권여당은 야당으로부터 난민정책을 잘못해서 난민이 몰려온다고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호주 정부는 인터넷 유튜브에 '호주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오려는 모양인데 호주에 와보았자 당신들에게는 국물도 없다'는 동영상을 올려서 밀입국 희망자를 단념시키는 선전전을 펼치기까지 하는 형편이다. 이런 싱거운 나라 백성이 자기가 바라던 이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감격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백인들이 인류역사 속에서 저지른 범죄들, 특히 흑인들에게 지은 죄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정말 정의롭다면 (사실 나는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고 인간을 정의롭게 살게 하실 뿐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백인들은 천벌을 받고 그것도 충분하지 않아 받은 벌의 반쯤을 덤으로 받아야 될 것 같다.

 

물론, 내가 어찌 생각하든 백인들은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반면 항상 흑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한 번 잘 살아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영영 실현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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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토록 무지한 백인들이 어째서 대세가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백인들 보다는 한국 사람들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 집 사람은 나보고 한국 사람에 대한 객관적이지 못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준엄하게 비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백인들에게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내가 미터기를 누리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고 하자.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실수한 것을 알게 되고 대강 얼마 나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할 때 손님들의 반응은 나라 별로 다르다. 한국 같으면 운전사가 제시하는 금액이나 손님이 예상하는 금액이 비슷하면 그냥 낼 것이고 다르면 협상을 할 것이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대부분이 '네 실수니까 내가 알 바가 아니다'고 하고 제멋대로 깎아서 돈을 내고 만다. 상대가 백인 중에서도 여자라면 99% 그런 식일 거다. 물론 회사 돈으로 낼 때는 좀 다르겠지만.

 

자 이런 되먹지 못한 백인들이 오늘날 이렇게 잘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백인들은 오늘과 같이 살기 좋고 우리 동양인들이 부러워하는 사회를 건설 할 수 있었을까?

 

현대 서구 백인 사회가 이루어지게 된 구조적 바탕을 따져보자면 당연히 그리스 문명으로부터 따져보아야겠지만 거기까지는 거리가 너무 머니까, 최소한 중세기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중층한 중세기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 시대 사람들에 비해서 지식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매우 제한된 삶을 살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의 궁극적 근거는 오로지 천국과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지몽매 했던 사람들이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서 기독교와 왕정 및 귀족주의를 극복하면서 시민사회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역사적 배경이야 각기 다르지만 지금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많은 나라들이 스타트 라인에서 뒤늦게 출발했지만 열심히 헐레벌떡 따라가려고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코스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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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놈을 잡자!

 

쉽게 말해, 일찌기 무지를 깨달았기에 서구 사회 발전 과정에 필수적이었던 법과 규율, 그리고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이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할 수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구 사회의 발전을 위한 매우 유용한 도구들이였지만 또 한 편으로 잘못되면 대책이 없어지는 문제들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던 윤리적 틀이 '와장창'하고 무너지자 결국 신이 내린 법의 의미는 사라졌다. 대신 세속의 강제적 Rule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즉, 모든 것이 신의 섭리로 설명되던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고의 변화는 결국 개인과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현상을 사회학자들은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전에는 신이 무서워서 알아서 기던 사람들이 하늘에서 모든 걸 지켜보는 신이 사라진 만큼 제 11계명만 잘 지키면 '근무 중 이상무'가 된 것이다. 즉, 10계명을 몽땅 다 어겨도 "들키지 말라!"라는 11계명만 잘 지키면-걸리지만-않는다면 만수무강에 전혀 지장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남의 눈이 없을 때, 종교를 가지지 않은 개인에게 있어서 행동의 기준은 오직 자기 자신의 양심뿐이기 때문이다.

 

가끔 운전을 하다가 손님들(99%가 백인)과 싸울 일이 생긴다. 내가 잘못해서 싸움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고 대개가 짐승스런 백인들에 의해서 시비가 걸린다. 한국에서는 가끔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양쪽 편이 서로 양심적이라고 박박 우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싸움을 할 때 "당신 양심 있어?"라고 대들면 대게는 좀 찔끔하게 되어 있다. 물론 양심상 떳떳하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기는 있지만. 그런 경우는 다시 상대방이 '양심을 똑바로 가지라'는 식으로 공격을 할 것이다.

 

나도 부당하게 나에게 시비를 거는 손'놈'들에게 '너 양심 있느냐'라고 해주고 싶지만 내 영어 실력으로는 상대방이 찔끔 하도록 만드는 그런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대한 경멸스럽게 째려보는 인상만 쓴다.

 

물론,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양심이 없이 태어난 장애인이나, 양심에 구멍이 난 사람, 털이 난 사람, 양심제거수술을 받은 사람 등등이 있지만 대충 '양심?'하면 통하는 게 있다. 그러나 서양인에게 '양심' 운운하면 "그게 뭔데? 먹은 거임? " 할 것이다. 이 말은 서양인들이 양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처럼 두루뭉실 통할 수 있는 '양심'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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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칸트는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도덕률이 있다.'라고 엄격하게 규정했지만 그것은 교과서에 있는 이야기이고 아마도 서구 사회에서 쓰이는 말 가운데 가장 비슷한 말을 고른다면 '명예심'이라는 말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때 '명예심'은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선전 효과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이는 자존심 같은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살고 죽는 '체면'이라는 것과 명예심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 개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체면이 '남에 의해 규정되는 자기 자신'이고 명예심은 '내 스스로의 양심에 의해 규정되는 나 자신'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런 명예심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즉, 명예심은 그 사람이 그에 합당한 명예를 가지고 있을 때만 유효한 것이다.

 

대부분의 건전한 백인들은 이성과 명예심, 합리성 및 감정조절의 능력을 어느 정도 체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더구나 책에서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과 사회에서 천천히 체득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백인들이 내세우는 일반 윤리는 제대로 된 가정환경이나 올바른 학교교육 등 각종 조건이 충족된 경우에만 유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위에 열거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한 경우에는 체면을 중히 여기는 동양인보다 훨씬 쉽게 혼란에 빠져 수습 불가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지도 영어를 쓰는 사회에서 홈리스 피플이 많은 이유라고 보아도 괜찮겠다. 더욱이 나쁜 현상은 극도로 발단한 개인주의 덕분에 그 사람의 삶을 외부에서 태클을 거는 것조차가 불가능으로 여겨지는 일이다.

 

아주 옛날 호랑이가 양담배 피울 시절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창녀가 강간당했다고 고소하자 "법은 보호할 의무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기막힌 판결을 내린 판사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구 백인 사회에서는 '명예는 지킬만한 명예가 있는 자에게만 해당 한다'는 원칙이 관습헌법처럼 존재한다.

 

다시 말해 백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인 '명예심'은 지킬 만한 명예가 없는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백인사회는 동양인들에 비해서 '짐승 수준만 되어도 좋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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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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