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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전태일 이후로도 계속...

2003.10.24.금요일
딴지 사회부


지난 17일 한진중공업의 김주익 씨가 회사측의 부당한 처사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데 이어 23일 이해남씨가 분신을 기도해 현재 중태에 빠져있으며 26일에도 이용석씨가 분신을 응급치료를 받고 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씨의 죽음이후 정권이 다섯 번 바뀌었고 세월이 30년이 흘렀어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처럼 계속 되고 있다... 씨바...

 

 

 
 

 
  박정희 정권 하

 

  전태일(1970년 11월 13일) :
청계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분노한 당시 22세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씨는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작업을 벌이던 중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고 절규하며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 자결.

 

  김진수(1971년 5월) :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시정을 요구하는 (주)한영섬유 노동조합원들에게 사측은 구사대를 결성, 1971년 3월 18일 술에 취한 구사대가 근무중이던 노동자들을 폭행. 그리고 그 해 5월 구사대는 김진수씨(22세)를 옥상으로 불러 드라이버로 머리를 찔러 살해.

 

  김경숙(1979년 8월 11일) :
당시 한국 최대의 가발업체인 YH무역에 근무하던 김경숙씨(21세)는,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수십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감행하려는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항의농성을 벌이던 중 박정희 군사독재의 공권력과 싸우다가 투신. 후에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음.

 


  전두환 정권 하

 

  김종태(1980년 6월 9일) :
YH사건 이후, 그렇게 고대하던 민주주의가 광주학살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분노를 금치 못한 당시 22세의 김종태씨는 신촌 이대 앞 사거리에서 노동3권 보장을 외치고 광주학살 관련전단을 배포하며 분신 자결.

 

  박종만(1984년 11월 30일) :
민경교통 노조간부 박종만씨(36세)는 동료가 노조 일로 근무에 태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사 측이 무단 결근 등을 이유로 해고시키자 이에 단식농성에 돌입하였고 해고 철회를 위해 회사간부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해고하겠다는 위협을 당함. 그 즉시 박종만 씨는 "노동조합 탄압 말라, 사무장을 복귀시켜라,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라"고 외치며 분신 자결.

 

  박영진(1986년 3월 17일) :
신흥정밀의 노동자 박영진씨(26세)는 회사의 부당행위 및 임금착취에 항의하며 해고 철퇴투쟁을 벌이던 중 공권력이 투입되자 경찰과 회사측의 폭압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 3권을 보장하라!"며 분신 자결.

 

  변형진(1986년 5월 1일) :
연장수당 한푼 없고 세차비까지 기사에게 부담시키는 열악한 근무조건의 삼환택시에서 기사로 일하던 당시 38세의 변형진 씨는 좁은 회사 골목을 나오다 사장 자가용과 마주쳤으나 비키지 않고 그냥 간 것이 빌미가 되어 사장에게 해고 당함. 다음날부터 복직 투쟁을 벌이며 복직을 시키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사장은 도리여 "뒈질 테면 뒈져"라고 빈정대자, 분신 자결.

 

  황보영국(1987년 5월 25일) :
울산 현대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등에서 연강판 전기용접, 중장비 운전 등의 기술을 익히며 생활하던 황보영국씨(26세)는 1987년 5월 17일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100m를 달리다 쓰러짐. 그 후 백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일주일만에 숨을 거둠.

 

  이석규(1987년 8월 22일) :
대우조선에서 일하던 이석규씨(21세)는 회사측과의 협상이 결렬된 후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전경들이 쏜 직격탄을 가슴에 맞고 병원으로 향하던 중 사망. 그 후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사측에 의해 장지가 변경되는 일이 발생하였고 노동자들은 이에 분노하여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은 노동자들을 연행하며 폭력을 휘두르고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라고 비난. 그리고 결국 이석규 씨의 사체는 탈취당하여 망월동에 묻히지 못하게 됨.

 

  이석구(1987년 9월 19일) :
조흥택시 노동자 이석구씨는 1985년 회사측의 방해로 인한 조합 결성 실패 후, 1987년 35명의 기사들과 함께 민주노조 결성에 성공, 조합장으로 선출된 후 노조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회사측이 구사대를 고용하여 노조를 탄압하고 사장과의 면담마저 묵살되자 택시 위에 올라가 "노조탄압 중지하라!"고 외친 후 분신. 3도의 중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5살과 10개월 된 딸을 두고 운명을 달리함.

 

  김수배(1987년 10월 16일) :
고려화학 노동조합 사무장 김수배씨(28세) 씨는 조합원들에게 조합비를 징수하던 중 일일이 서명을 받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일괄해서 대리 서명하는 것을 노조원이 경찰에 고발. 그 후 회사측의 배후를 숨긴 치밀한 탄압과 회유를 견디지 못한 그는 자재창고에 불을 붙인 후 그 앞으로 달려나가 분신 자결.

 

  김성애(1987년 11월 3일) :
진흥요업에서 작업을 하던 중 화공약품에 의식을 잃고 기절, 뇌진탕으로 반신불구가 된 김성애 씨(18세). 그러나 회사는 보상은커녕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가족을 협박하여 산재처리를 해줄 테니 추후 어떤 법적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후 가족에게 도장을 찍게 함. 결국 김성애 씨는 회사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입원 중이던 산업재활원 7층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노태우 정권 하

 

  이대건(1988년 1월 6일) :
우성택시에 근무하던 이대건씨(32세)는 임금인상과 관련한 조합원들의 요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양보만을 요구하는 회사측의 태도에 분신함으로써 조속한 요구이행을 촉구. 그 후 병원으로 찾아온 회장에게 "배가 고파서 죽도록 만들고 뭐 하려 왔느냐. 당장 나가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기 전까지 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음.

 

  김장수(1988년 3월 9일) :
인천 경기 교통 노조위원장 김장수씨는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회사 측으로부터 해고예고 조치를 받았고 이에 부당하다며 항의하던 중 분신, 3월 9일 숨짐. 그 후 그의 동료들과 유가족의 힘으로 회사측으로부터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킴.

 

  오범근(1988년 3월 10일) :
오범근씨는 야간 경비근무 중 옥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떨어져 노동력을 상실하였으나 산재노동자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음. 그 후 동료들이 파업농성을 벌이던 중 구사대의 폭력으로 해산되자 회사로 출근 폭력의 부당함에 대해 얘기하다가 회사의 호출로 그들을 만나러간 이후 이유를 알 수 없이 음독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둠.

 

  최윤범(1988년 4월 30일) :
고려피혁의 지부장 선거과정에서 회사와 어용노조 측에 의해 민주노조 측이 패배하자 회사는 부서이동과 해고로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고 이에 민주노조 측은 회사밖에서 천막농성에 들어 감. 그리고 3일 후 노동부의 중재하에 두 측간의 협상에 들어갔으나 그 사이 회사측에서 물품을 빼돌리려 했고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노조위원장 최윤범씨(28세)는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 목숨을 잃음.

 

  장용훈(1988년 5월 24일)
순천 현대교통 택시기사로 근무하던 장용훈(29세)씨는 자전거와 경미한 접촉사고를 일으킨 후 자비로 합의.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회사의 과장은 그에게 불리한 경위서를 요구했고 장씨가 이에 불복하자 승무를 일방적으로 정지시키고 집단 폭행까지 가함. 이에 장씨는 검찰과 노동부에 고소와 탄원을 통해 부당함을 알렸으나 이들이 무성의로 일관, 결국 그는 "이렇게 무시당하고 가정은 파괴당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놈의 세상 비통해서 살 수 없다"고 외친 후 회사 사무실에서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 자결.

 

  문송면(1988년 7월 2일) :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서울로 상경한 문송면씨(15세)는 영등포 소재 협성계곡에서 일하던 중 불과 2개월만에 수은중독 증상을 보였으나 적적할 치료를 받지 못해 6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 그가 사망하기 전 가족들은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냈으나 회사의 방해로 10일만에 이 서류가 반려되는 일도 있었으나 이 일이 신문에 알려지고 난 뒤 요양승인을 받았으나 결국 숨을 거둠.

 

  성완희(1988년 7월 8일) :
강원 태백탄광의 노동자 성완희씨(29세)는 그의 동료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 해고당하자 그를 위해 복직투쟁을 전개,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로부터 복직판정을 받게 됨. 그러나 강원탄광 측은 이를 거부하였고 성완희 씨는 다시 복직투쟁에 돌입. 그러나 그는 동료의 단식투쟁을 지켜볼 수 없다며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역시 단식투쟁에 돌입하려 하였으나 구사대원들이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사무실에 난입하자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을 그어 분신, 10일만에 운명을 달리함.

 

  이문철(1988년 11월 6일) :
대원여객의 노동자들이 연장근로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하자, 회사측은 이를 이유로 이문철씨(34세)를 부당 해고. 이와같은 부당한 처사에 격분한 그는 신나를 온몸에 붓고 분신을 감행, "노동자를 하인이나 종 취급하는 사용자들의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

 

  배중손(1988년 11월 14일) :
회사측의 휴업조치 이후 어용노조의 민주화와 임금인상 파업농성과정에 앞장서 싸웠던 배중손씨는 구미의 원평성당에 있는 국민운동본부와 가톨릭근로자센타에 상담을 하러 갔다는 이유로 강제출장을 당한 것은 물론 출장을 명목으로 납치를 당함. 그 후 정신병원에도 입원했던 그는 복직이 되어 자채창고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으나 사건 당일 공장내의 세탁기 안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됨.

 

  김윤기(1989년 2월 16일) :
덕진양행 노조위원장 김윤기씨(25세)는 열악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사측과 교섭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의 야비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협상은 계속 결렬. 게다가 공장이전이라는 신종 노조탄압으로 민주노조의 생명을 끊으려 함. 이에 김윤기 씨를 비롯 덕진양행 노조원들은 회사의 탄압에 맞섰으나 계속되는 결렬에 결국, 그는 몸에 신나를 붓고 항의 분신,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

 

  최완용(1989년 4월 9일) :
최완용씨(25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저임금과 12시간의 장시간 노동 속에서 일을 함. 그러던 1989년 3월 1일 휴일임에도 인천흥업사에 나와 근무를 하던 중 안전장치가 없는 프레스에 오른손이 짤림. 그는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재활 기술을 배우기를 희망하였으나 회사와 병원의 거부로 인해 결국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분신, 25세의 나이로 사망.

 

  이상남(1989년 3월) :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던 이상남씨(30세)는 노조사무실에 불법으로 난입한 정체불명의 30여명의 괴한들로부터 폭행당하고 봉고차에 납치 당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이를 저지하다가 봉고차에 머리와 대퇴부가 끼어 5m를 끌려가다 중상을 입어 1년 8개월간의 투병 끝에 결국 숨을 거둠.

 

  박진석, 이상모(1989년 6월) :
적자기업 임금동결정책이라는 논리를 내세운 정부는 그 선례를 대우조선에서부터 만들려 노사간의 임금교섭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노동자들간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상록화라는 구사대를 조직. 이에 대우조선 노동자 박진석씨(20세)는 상록회 가입신청서를 찢어 버리고 "더 이상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 "임금동결을 하면 어떤가를 보여주겠다"며 분신 89년 6월 운명. 한편 이런 박진석 씨의 죽음 소식을 접한 동료 이상목 씨도 같은 날 기숙사 옥상에서 투신자살.

 

  최성조(1989년 5월 2일) :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회사측에서 동원한 구사대에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 남성 흥진의 조합원들은 총파업을 감행하였으나 회사측은 다시 구사대를 구성하여 조합사무실을 난입, 폭력으로 점거하는 소동이 발생. 이 때 최성조씨는 구사대에게 건물 전등을 켜라고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각목과 쇠파이프로 폭행, 최씨는 2차례의 뇌수술 끝에 사망.

 

  강현중, 김종하(1989년 9월 4일) :
경동산업의 조합원들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노조의 민주화를 위해 구성된 친목단체 디딤돌이 일일 찻집을 개최한 것과 관련, 이를 꼬투리 잡아 징계에 회부한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농성투쟁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이 고용한 구사대에 집단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 이에 회사 측과 최종협상을 벌였으나 노무이사는 "징계를 받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고 노동자들을 협박, 1989년 9월 4일 경동산업의 노동자 강현중씨(26세)와 김종하씨(28세) 집단 분신 할복.

 

  이영일(1990년 5월 3일) :
통일중공업 노동자 이영일씨(28세)는 90년 2월 노조 대의원이 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회사측과 경찰에 의해 끊임없이 탄압을 받음. 급기야 이들은 이씨의 노모에게까지 아들이 노동운동을 그만하게 하라고 협박, 이에 분노한 이씨는 악락한 노조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 자살하였다.

 

  김봉환(1991년 1월 5일) :
김봉환씨(53세)는 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일을 하던 도중 두통과 소화불량, 손발이 저리는 등의 증상으로 83년 회사에서 퇴사. 그후 경비원 생활을 꾸려나가는 중 89년 쓰러져 말을 더듬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원진레이온 근무시절 생긴 병이 아닐까 진료를 받아본 결과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혈압이라는 판정을 받음. 이에 김씨는 원진레이온 측에 산재용양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역시 노동부에서도 회사를 두둔하며 진단서가 있음에도 산재용양신청허가조차 거부. 계속적인 싸움을 벌여오던 김봉환씨는 마침내 요양신청서를 접수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그 날 운명함.

 

  박창수(1991년 5월 6일) :
박창수씨(33세)는 대우조선의 파업 관계로 긴급 소집된 대기업 노조연대회의에 참석했다가 제3자 개입금지와 집시법 위반으로 91년 2월 구속, 서울 구치소에 수감됨. 그 안에서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전노협 탈퇴를 종용받던 그는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5월 6일 옥상에서 뛰어내린 변사체로 발견. 정부는 비관자살이라고 발표하였으나 병원전체의 창문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창살과 열쇠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살에 의문이 있음. 그 후 정부는 박창수씨의 시신을 강제로 탈취해 강제부검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지도 않음.

 

  이진희(1991년 6월 15일) :
(주) 삼미기공의 노동조합 간부였던 홍보부장 이진희씨(27세)는 노동조합 위원장이 임금교섭 과정에서 회사측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분노, 임금인상 보고 대회 중에 분신하여 8일 후 운명. 그 후 회사 측은 회사에서는 분신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며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가족에게 조용히 수습할 것을 권유.

 

  권미경(1991년 12월) :
신발업체인 대봉이 어용 노조의 협조하에 30분 일 더하기 운동, 구사운동과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노동통제 강화에 맞서 권미경씨(22세)는 공장 고상에서 투신, 죽음으로 항거. 다음은 그녀가 팔뚝에 쓴 유서 전문임.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않고 그대들 가슴 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김영삼 정권 하

 

  조경천(1993년 5월) :
1988년 한양합판 노동조합 결성의 주역인 조경천씨(48새)는 회계감사로 전체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한 노조 활동에 전력을 기울임. 그러나 회사측은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전체 조합원에게 회계보고를 한 것을 핑계로 해고. 조씨는 회사를 고소하여 승소판결을 받았으나 회사는 복직을 거부, 오히려 임금도 주지 않고 사표 강요. 후에 심근 경색 판정을 받은 조경천 씨는 밀린 임금을 받아 수술을 하겠다고 투쟁에 열의를 보인 그는 회사 측의 거부로 결국 심장마비로 운명.

 

  고정자(1993년 5월) :
고정자씨는 78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일하던 중 팔다리가 마비되고 우울증, 성격변화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는 의학적으로 직업병이었으나 법률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정상판정을 받아 병을 방치하던 중 증세가 악화되어 정신분열로 자살.

 

  김성윤(1994년 1월) :
14년간이나 상호운수에 근무하면서 단 한 번의 무단결근도 하지 않은 성실한 택시노동자였던 김성윤씨(62세). 말뿐이지 변하지 않는 정부의 택시정책에 분노하여 "잘못된 택시제도의 개선"을 외치며 자결.

 

  최성묵(1994년 3월 11일) :
최성묵씨(49세)는 서울여객, 성호여객 등에서 노조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동료기사들의 억울한 상황과 회사측의 부당행위를 시정하려고 노력. 그러던 1994년 성호여객 노조위원장 선거 중 회사가 선거당시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던 11명을 면직하거나 사표를 강요하는 사건이 발생. 이에 항의하러 간 최씨는 회사전무와 동반분신, 운명.

 

  양봉수(1995년 6월 13일) :
회사측의 노사합의 파기부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다 해고당한 현대자동차 노동자 양봉수씨(28세)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무효확인 소송 제기. 이 기간동안 회사측은 양씨를 조합원이라고 볼 수 없다며 대의원 자격으로 노사협상장에 나와있던 그를 정문 밖으로 내던지는 폭력 행사. 이처럼 계소되는 회사측의 부당한 행위에 항거하기 위해 온몬에 신나를 붓고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경비들이 이를 저지하자 분신, 31일간의 사투 끝에 사망.

 

  박삼훈(1995년 6월 21일) :
대우조선의 노동자 박삼훈씨는 현장의 노동통제를 통해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개인의 사생활까지 감시하는 회사측의 살벌한 노무관리하에서 호봉 하나, 잔업 특근 하나 동료와 경쟁하고 눈치보며 서로 감시자가 되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해 결국 회사측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 자결.

 

  서전근(1995년 9월) :
1995년 9월 4일, 철도청에서는 철도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서전근씨를 오지로 전출 보내려 함. 이에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인 철도노동자 민주화운동에서 자신이 굴복하면 안된다고 판단, 대전 철도 공작창에서 분신 자결함.

 

  김시자(1996년 1월 12일) :
한일병원 노조위원장 김시자씨(35세)는 어용노조 집행부로부터 규약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사유로 징계위원회의 출석을 통보 받음. 그리고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김씨는 "징계가 부당하다", "이런 상태를 그냥 있으면 노조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말을 남긴 채 분신한 후, 한국전력노조 54차 중앙위원회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와 운명.

 

  홍장길(1997년 5월) :
(주)국민캡 택시노동자 홍장길씨(58세)는 회사를 분할매각하고 기사를 택시의 부품처럼 끼워 팔아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회사측에 분노하여 분할매각 완전철회를 외치며 자결.

 

 
  김대중 정권 하

 

  최대림(1998년 2월 13일) :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법 저지에 힘써왔던 대우조선 노동자 최대림씨(42세)는 지게차 운전 도중 안전사고를 냈다는 이유로 보직을 박탈당하였으며 타부서로 보내는 등의 조치를 당함.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98년 2월 13일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의 입법화가 합의되어 국회통과를 앞두고 대우조선에서 건조 중이던 유조선 갑판위 25M 위에서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

 

  신길수(1998년 5월 27일) :
동아엔지니어링에서 근무하던 신길수씨(42세)는 IMF가 본격화 된 이후 상여금 삭감과 임금체불상여금 삭감, 임금체불 등으로 고생하던 중 급기야 회사가 부도가 나고 퇴직금 조차 받기 어려운 상태가 되자 계속되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고용불안을 견디지 못해 집근처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 그는 "퇴직금과 고용보존은 남은 생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주주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남는 나의 식구 그리고 회사동료들의 생존문제는 너무 가벼이 다루지 말아주십시오. 전임위원장으로써 목숨을 던져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려 합니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김.

 

  이상관(1999년 6월 22일) :
이상관씨(27세)는 1994년 창원 대우중공업 국민차 사업부네 입사하여 일을 하던 중 1999년 2월 20일 산재 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음.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동지를 근로복지 공단은 통원조치시키는가 하면 강제퇴원조치를 함. 이에 힘겹게 통원 치료를 받던 중 1999년 6월 22일 육체적 고통과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유서로 전하며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

 

  윤창녕(1999년 7월 10일) :
1급 장애인 노점상인 윤창녕씨는 1999년 7월 7일 노점상 단속요원들이 무차별적 단속을 자행하자 구청으로 찾아가 직원들과 실갱이를 벌이던 중 비인간적인 발언을 듣고 분노해 구청 복도에서 분신. 구청의 안일한 태도로 만 하루만에 중환자실에 입원해 결국 7월 10일 운명.

 

  박봉규(2002년 8월 23일) :
서울 노점상 연합 회원으로 활동 중이던 박봉규씨는 2002년 8월 23일 중구청에 뺴앗긴 노점물품을 되찾으러 갔다가 노점탄압에 항의하며 구청장실에서 분신, 운명함.

 

  천덕명(2002년 11월 22일) :
천덕명씨(39세)는 1993년 경인운수에 입사 후 대의원활동 등 노동조합 활동 중 총파업의 성과인 월급제를 파탄내기 위해 급여를 삭감한 사측에 맞서 2002년 11월 22일 본인의 배차차량 안에서 분신, 운명함.

 

  배달호(2003년 1월 9일) :
두산중공업 노동조합 대의원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노조활동을 벌이던 배달호씨(50세)는 2003년 1월 9일 두산중공업 사내 노동자광장에서 손배 가압류 등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분신.

 

 
  노무현 정권 하

 

  박상준(2003년 4월 28일) :
2002년 11월 화물연대에 가입하였으며 동우화물 근무 중이던 박상준씨(39세)는 8천만원의 부채에 시다리다 2003년 4월 27일 밤 늘어나는 빚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 화물연대 투쟁을 반드시 승리해 달라는 전화통화를 마지막으로 음독, 4월 28일 화물연대 투쟁 조끼를 입은 채 죽음을 맞이함.

 

  김주익(2003년 10월 17일) :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인 김주익씨는 회사측의 불성실한 임단협 협상태도와 잇단 손해배상 소송 및 가압류 조처에 분노, 45m 높이의 대형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이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음. 그는 "입사한지 21년이 지났는데도 기본금이 100여만원에 불과하다... 잘못은 회사가 저질러 놓고 노조에게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해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만들려 하고 있다는 유언을 남김.

 

  이해남(2003년 10월 23일) :
세원테크 노조위원장 이해남씨(41세)는 동료 노조 간부의 죽음에 대한 회사측의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이던 중 혼자 공장으로 들어가 분신. 현재 위독한 상태.

 

  이용석(2003년 10월 26일) :
서울 종묘에서 열린 비정규직 차별철폐·정규직화·권리보장 전국 비정규 노동자 대회에서 근로복지공단 목포지부 이용석씨가 분신 시도.

 

 

 
 

 
위에 열거한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군바리 정권이 물러가고, 직선제를 거쳐, 민주정권이 들어서고,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를 지나, 노통이 들어선 지금 2003년까지....

 

열심히 일하고도 생계와 고용을 보장받지 못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전태일 이후로도 계속....

 

 

덧붙여,
위 자료들은 민주노총에서 출판한 <1997~2000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및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에서 발행한 열사화보에서 인용한 것이다.

 

 
딴지 사회부
나뭉이(namung@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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