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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피튀기는 중세 유럽 전쟁사 - 문제제기와 의문점

2003.10.1.수요일
딴지 흥신소

자, 이번 글이 이번 장의 마지막입니다. 이전 3회분에서는 1066년에 헤이스팅스 전투가 일어난 배경과 등장인물들, 전투에 사용되어진 물품들, 해롤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전투를 보내드렸습니다. 휴, 여기까지 읽어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여주신 여러 가지 반응에 감사합니다. 이 아래부터는 여러분이 제기하신 문제와, 이야기(1066 상, )에서 가질 수 있는 의문점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글을 읽고 짚어주신 점부터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외국어 발음이 엉망이다. 좀 제대로 적어라.

 

제가 영어말고 다른 유럽관련 언어는 못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친구에게 이것저것 먹여가며 받아 적었는데, 그 친구 발음이 표준도 아니고 제 귀도 표준이 아니어서 많은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에게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합니다. 어느 분 말마따나 여러분들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별거 아닌 거에 괜히 기분상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외국어 이름 지명 한글 표기를 자신있게 도와주겠다 하시는 분은 이 글 제일 밑에 나와있는 제 메일주소로 연락 주십시오.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 서반아어, 아무거나 다 접수합니다. 제가 아무생각없이 지우지 않도록 제목 잘 붙여서 보내주십시오. 

 

 용어가 틀렸다. 전신철판갑옷은 full plate mail 이 아니라 full plate armour 또는 그냥 armour 이다.

 

그거말고도 몇 가지가 잘못되었습니다. mail 이란 단어자체가 그물이라는 뜻의 불어에서 유래된, 사슬갑옷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흔히 쓰이고 있는 chain mail 과 ring mail 이란 말도 우리말로 치면 처갓집이나 역전앞 같이 필요없는 말이 더 붙어있는 격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해하기는 쉽죠. 미늘갑옷도 scale armour가 되어야 합니다.

 

니 넘이 장궁에 관해 거짓부렁을 하고 있어. 장궁은 갑옷을 뽕뽕 뚫으면서 프랑스 기사들을 마구 학살했던 엄청난 위력의 무기란 말야. 어디서 사기치고 있냐?

 

먼저,이 장궁에 관한 얘기가 여기서부터 상당히 길어지니깐, 장궁이 갑옷을 뚫던 말던 관심이 없는 분들은 그냥 이 문단을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장궁(Longbow)이란 무엇인가?

 

장궁은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잉글랜드 군에 도입되었습니다. 에드워드는 1257년에 벌어진 웨일즈와의 전쟁, 1263~7년에 벌어진 내전에서 활용된 남부 웨일즈 출신 궁수들의 활약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나중에 왕위에 오른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 특히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활약에 의해 장궁은 그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장궁의 재료는 주목(朱木)이라는 나무로, 주로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따뜻한 나라로부터 수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브리튼 섬에도 이 나무가 자라고, 그것으로도 활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자란 나무가 탄력이 더욱 좋다면서 수입품으로 만든 것을 상급품으로 쳤습니다. 참고로, 주목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물푸레나무, 느릅나무, 개암나무 등으로도 활을 만들었습니다. 수입품 - 국산 주목 - 느릅나무를 비롯한 다른 나무 순으로 등급을 매겼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초기의 장궁은 웨일즈나 잉글랜드의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재료가 수입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조사가 더 필요합니다만, 대략 에드워드 3세 때부터 수입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고로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공하기 전에, 수석 장인을 시켜 나라 전체를 돌며 좋은 주목을 고르게 했습니다.(이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장궁은 한 조각의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170~190cm, 가장 굵은 손잡이 부분의 지름은 약 3cm 정도입니다. 재료의 상태나 장인과 장궁수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길이와 굵기의 장궁이 존재하며, 2m 길이에 4.2cm의 굵기를 가진 것도 있습니다. 장궁을 당기는 데는 약 40~60kg 정도에 달하는 힘이 필요하고, 역시 약 80kg 이 필요한 것도 존재합니다.

 

또, 장궁은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안과 밖이 색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배라고 불리는 안쪽은 나무의 심인 적목질(赤木質, 그림의 a)로 되어 있고, 등이라고 불리는 바깥쪽은 연한 백목질(白木質, 그림의 b, c는 껍질)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장궁의 길이를 잴 때는 이 등을 이용합니다. 한쪽 끝에서 등을 통한 다른 쪽 끝까지가 장궁의 길이입니다.

 

장궁의 양쪽 끝에는 오른쪽에 보이는 것과 같은 활고자를 붙여 시위를 달기도 했고, 그냥 활에다가 홈을 내어 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살이 활의 중간에 오게 하기 위해 약간 아래쪽을 손잡이로 삼았습니다.

 

시위는 삼(대마 아시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연 풀을 이용한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시위에는 한쪽 고리 , 양쪽 고리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래 그림의 1번과 2번이 시위를 엮을 때부터 만드는 고리입니다. 한쪽 고리 시위의 다른 한편 끝은 3번에 보이는 것과 같은 매듭을 지었습니다. 이 한쪽 고리 시위는 활의 길이에 영향을 받지 않아서, 대량 생산품들은 예외없이 이 방법을 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4번은 시위 한가운데에 감은 줄로, 5번의 방법으로 감았습니다. 이것의 용도는 화살을 메우기 쉽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a를 이용하면 화살이 놓일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중세 장궁수는 중지까지만 사용해서 활을 당겼고(위의 사진에는 약지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통이 허리 부근에 달았습니다(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등에 매는 전통은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양 궁술과는 다르게 화살촉이 왼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숙련된 궁수는 1분에 10~15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의 궁수는 시위를 귀까지 당기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시위 끝과 활과의 거리는 약 76cm 정도입니다. 이보다 조금 덜 당겨 약 71cm 정도의 거리를 만드는 방법도 사용되었으며, 메리 로즈 호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에 대응하는 두 가지 길이의 화살대가 나왔습니다. 긴 것이 약 3배정도 많았습니다.

 

 장궁에 관한 자료의 한계

 

 

위의 그림은 1356년에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의 기록화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보시면 와, 1356년에 장궁으로 철판갑옷을 뚫었구나. 하시겠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병사들은 16세기에 사용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16세기 프랑스에서 그려진 것으로, 작가는 그냥 그 당시의 장비를 14세기에 관한 그림에다가 그려 넣고 있습니다.

 

장궁에 관련된 유물은 아주 드뭅니다. 그 이유로는 세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째, 활과 화살(활촉은 그래도 꽤 나옵니다.)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썩어 없어지기 쉽다. 둘째, 귀족들은 장궁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사냥용 석궁 유물은 굉장히 많습니다.) 장식품이나 부장품에 포함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수천 번 사용해서 위력이 약해지거나 부러진 활은 그냥 장작으로 썼다.

 

1549년 로저 아쉬암(Roger Ascham)이라는 잉글랜드 학자는 장궁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1590년 존 스미스(John Smythe)라는 군인은 잉글랜드 군의 장궁 존폐논쟁에 관련된 토론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내용에는 장궁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여러 가지 그림도 첨부되어 있다고 합니다.

 

1545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중에 침몰했던 메리 로즈(Mary Rose)호가 1980년을 전후해서 인양되었습니다. 이 배에서 장궁 약 100여개와 화살 수천개가 나왔습니다. 이 활들의 상태는 아주 좋아서, 수분을 빼고 약품처리를 하고 나니 실제로 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맨위 사진에서 쓰인 것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밑에 보이는 녹슬지 않은 화살촉은 현대 복원품입니다.

 

 

장궁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은 대부분 16세기이후에 작성되거나 만들어진 것입니다. 16세기 이전의 장궁이 어느 정도 크고(대부분의 기록은 사람 키 만하다 정도로 끝납니다.), 얼마나 두껍고, 어느 만큼의 파괴력을 보였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아진꿔에서 사용된 활이 메리 로즈 호에서 나온 것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궁은 250여년 동안 최전선에 서 있었고, 그 사이에 새로운 재료(수입 목재)가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담금질이라는 금속 단련 기법이 널리 보급되어 갑옷의 강도가 상승하기도 하고, 금속을 이용한 석궁이 장궁의 사정거리를 훨씬 넘겨 버리는 일도 발생했고, 개인화기가 점차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대포도 사용되었습니다. 장궁이 이 오랜 기간 동안 전혀 개량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백년전쟁 시기의 장궁의 위력이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추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정이라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관계로 한번 알아봅시다.

 

 백년전쟁 때 사용되었던 장궁의 위력 추정

 

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소품들에 관해 알아봅시다.

 

 

위의 화살촉들은 중세에 사용되었던 것들로, 1번과 2번 사이에 있는 하얀 막대가 2cm 입니다. 넓이나 길이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3,4번이 사냥용으로 쓰이던 넓은 화살촉, 2번이 전장에서 가장 흔히 쓰이던 일반용. 5~9번이 갑옷 관통용이라고 불리는 송곳형(이름은 송곳형이지만 단면을 보면 대부분 사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술상의 문제로 원뿔형태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여기 있는 것뿐만 아니라, 대단히 가벼운 장거리용 화살촉도 존재했고, 위에서 말한 용도라도 아주 다양한 모양이 존재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위의 사진의 2번,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형태의 전쟁용 화살입니다. 대규모 회전이 있었던 전쟁터를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뒤져보면 거의 이 형태의 화살촉이 발견됩니다. 메리 로즈 호에서 발견된 것들의 평균 중량은 7g 입니다.

 

5~10번은 송곳형 화살촉입니다. 무겁게 만들어서 충격량이 크고, 날을 없애서 뚫고 들어가는데 받는 저항을 줄인 형태입니다. 메리 로즈 호에서 나온 것들의 평균 중량은 13g 입니다. 9번의 경우에는 특이하게 긴 형태입니다. 7번이나 8번이 가장 흔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메리 로즈 호에서 나온 긴 화살대의 평균 무게는 60g, 짧은 것은 35g 입니다. 화살대의 경우에도, 멀리 날아가게 만든 장거리용, 일반용, 무겁게 해서 파괴력을 올린 근거리용등 여러 형태가 존재했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24개의 화살이 들어가는 전통에, 일반용과 여러 목적용 화살이 얼마의 비율로 들어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일반용이 그저 흔히,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만 알뿐, 나머지는 어땠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존 스미스의 기록에 24개중 8개는 장거리용으로 채워야 한다.라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 이것이 지켜졌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합니다.

 

13세기 중반부터 사슬갑옷에는 작은 철판이 하나씩 붙기 시작합니다. 무릎부터 시작한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팔다리를 다 덮어 나갑니다. 그리고 두껍고 기다란 전복(戰服) 아래에 밑에 보이는 것과 같은 철편조끼(Coat of plate)를 입기 시작합니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전복은 점점 짧아지고 결국에는 없어집니다.

 

 

14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슴철판이 보편화됩니다. 그리고 1400년을 전후로 담금질이 널리 퍼지면서 강철의 강도가 상승합니다. 15세기 중반에는 철판 갑옷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고, 이제 이 후에는 멋들어진 철판갑옷의 전성시대가 옵니다.

 

자, 이제 소품들이 모두 등장했으니 장궁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아래의 내용은 이 정도면 그러는 것이 가능했다.이지 항상, 보편적으로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①. 약 270m 거리에서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②. 약 100m 거리에서 송곳형 화살을 이용하여 사슬갑옷을 뚫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위의 전복이나 그 아래 누비옷을 생각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

 

③. 근접거리(화살 한 두대 쏘고 육박전으로 돌입해야 할 거리)에서 바늘형 화살을 이용하여 철편조끼를 뚫을 수 있다. 역시 그 아래 사슬갑옷과 누비옷을 생각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

 

④. 어떠한 거리에서도 일반용 화살로는 가슴철판을 뚫을 수 없다.

 

 프랑스 귀족들은 장궁에 의해 학살당했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아진꿔 전투의 결과입니다. 전투가 끝난 후, 만명이 넘는 프랑스 병사들이 상처하나 입지 않고 도망 갔습니다. 많은 수의 포로를 보고, 받아낼 몸값을 계산하느라 입이 찢어졌어야 할 헨리 5세였지만, 그의 밑에는 겨우 5~6천명의 병사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재편성에 성공한 적이 다시 공격해 온다면? 헨리 5세는 천여명의 주요 인물들만 남긴 후, 나머지는 모두 처형하란 지시를 내립니다. 몸값을 생각한 병사들이 그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자, 그는 친위대 격인 장궁수들을 시켜 그 의지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우리 위대한 로마인 동지께서 실패작을 사용했을 리가 없어,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용도폐기 했을꺼야. 어디서 추정기사를 쓰고 있냐?

 

먼저, 로리카 세그멘타타의 용도폐기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게 없습니다. 단지 이 갑옷이 3세기를 전후해서 급격한 속도로 사라져 버리고, 예전부터 사용했던 사슬, 미늘갑옷등으로 돌아간 현상과 그 이유에 대한 추론, 추정만 몇 개 있습니다. 저도 이 현상까지만 얘기하고 끝을 맺었던지, 아니면 실패작이 아닐까? 라고 하는게 좋을 뻔했습니다.
 

 
 


이제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참회왕 에드워드는 왜 공식적인 계승자를 지목하지 않았나?

 

가까운 친족이 모두 죽고 난 후, 그는 왕위를 넘겨줄 사람이 해롤드 형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바이킹은 예전에 시달린 적이 있어서 내키지 않고, 예전에 위급상황에서는 손을 내밀었던 윌리엄이지만, 그는 같은 앵글로 색슨이 왕이 되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은 사람은 해롤드밖에 없지만, 그의 오랜 정적의 아들이 왕이 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냥 꽁해서 죽었다고 추정된다. 

 

 해롤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노르망디에 갔을까?

 

인질을 구하기 위해서 갔다고 적었지만, 이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게 지어낸 일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이 사건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깐 그 유명한 해롤드가 깨 버린 맹약를 만들어내기 위한 조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단 진짜로 인질을 구해내기 위해서 갔다고 치자. 그럼 해롤드는 도대체 무슨 카드를 들고 인질을 빼내오려 했을까? 윌리엄이 소중한 인질을 넙쭉 내주진 않을 것 아닌가? 바유 타피스트리에서는 윌리엄의 왕위를 책임지겠다는 맹세를 하고 인질 하나를 데리고 돌아온다. 그런데 꼴랑 이런 맹약만으로...사료부족으로 미궁에 빠진다..ㅡ,ㅡ

 

 해롤드는 왜 멍청하게 일찍 군대를 소집했다가 중요한 때에 해산시켜 버렸나?

 

먼저, 해롤드는 윌리엄이 여름에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추수기에 전후해서 해산할 수 있도록(의무 소집기간이 60일이었다.) 군대를 소집했다. 만약 이때 맞춰 온다면 대기하고 있다가 박살 내면 되는 것이고. 만약 그 이후에 온다면? 하드라다가 쳐들어 왔을 때 순식간에 충분한 병력을 모은 것을 보면 이 준비도 다 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해롤드의 병력해산을 기다린 것일까, 출항할 날씨가 안되었던 것일까?

 

해롤드와 윌리엄의 또 다른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보급이었다. 해롤드의 군대는 전통적인 소집병으로 병사들이 식량과 장비를 지참했지만, 윌리엄은 군역에 포함되지 않는 해외원정인 만큼, 자기가 돈을 다 댔다.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닌데 특별히 세금을 거뒀다거나 돈을 빌렸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 몇 년 동안 찬찬히 준비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전한 상륙을 위해 기다렸다고 본다.

 

 하드라다는 어쩌다 그리 허무하게 죽어버렸나?

 

하드라다의 패배는 곧 해롤드의 능력의 승리다. 해롤드는 왕이 되자마자 북부 영주 형제와 손을 잡아 북부 방어를 그들에게 맞기고, 자신은 남쪽만 신경을 쓴다. 그리고 승리 후 마음 놓고 있던 하드라다를 강행군에 이은 기습으로 격파했다. 이는 곧 해롤드의 전략적 사고의 유효함과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해롤드가 잘났다는 건 알겠는데, 하드라다는 왜 그 대병이 접근하는 걸 몰랐을까?

 

토스티그가 같이 있었으므로 정보 수집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전령이 말을 타고 달린다면 보병을 거느린 해롤드보다 느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정보수집을 게을리 해서 자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시 승리 후의 자만심은 파멸의 지름길이란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윌리엄의 상륙 목표지점은 피븐지였을까?

 

먼저 윌리엄의 오랜 원정 준비는 그가 잉글랜드 남부 지형을 연구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의 목표지점은 헤이스팅스였다. 서풍을 의식해서 약간 서쪽으로 진로를 잡았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약해서 피븐지에 떨어진 것이다. 바로 다음 날 벌어진 헤이스팅스로의 이동과 밑에 나올 싸움터에 관한 설명이 이를 증명한다.

 

 

 싸움터는 누가 골랐나?

 

해롤드가 유리한 언덕에 진을 쳤다고 해서 그가 골랐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윌리엄이다. 헤이스팅스를 둘러싼 지형을 잘 보자. 일종의 반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싸움터의 왼쪽은 소택지라서 대규모 전투나 이동이 힘들고, 오른쪽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흐른다. 헤이스팅스로 들어오거나 나가기 위해서는 오직 저 싸움터를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윌리엄은? 둘째 날에 이곳에 들어와서 해롤드가 올 때까지 가만히 박혀있었다. 저 근처에서 보초만 서고 있으면 기습받을 일은 없다.

 

 그럼 윌리엄은 왜 불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벌였나?

 

윌리엄이 의도했던 것은 단 하나. 해롤드의 죽음이다. 윌리엄은 이것만이 그의 잉글랜드 정복을 달성하게 해준다고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 필요한 것은? 해롤드를 전장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분의 물자를 가지고 왔으면서도 바로 약탈을 시작했다. 병사들에게 유희를 제공하는 목적(전쟁이란 이런 것이다.)도 있지만, 해롤드를 끌어내는 심리전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사냥터로 나온 사냥감이 겁먹고 도망가지 않게 유리한 위치를 준 것이다. 결국, 윌리엄은 싸움만 붙으면 이긴다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일반 소집병이 주축이 아니라 각국에서 모인 전문 전투 집단인 기사가 주축이 된, 그래서 상대적으로 훈련과 장비가 훨씬 잘 되어 있었다는 것이 이 자신감을 뒷받침한다.

 

 해롤드는 꼭 자기가 가야만 했나?

 

그는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그는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닌 실력으로 왕위에 오른 자이다. 그는 나는 이러한 실력으로 이 자리에 오른 몸이니 삽질들 하지 마라. 라는 것을 대외에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하드라다를 매장시키고 이것을 벌써 달성했지만, 윌리엄은 또 무게가 다르다. 윌리엄은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의 공격을 다 물리친, 북부 프랑스의 제일인자이다. 하드라다가 서서히 지고 있는 해라면 윌리엄은 지금 남쪽 하늘에 짱짱하게 빛나고 있는 태양이다. 그리고 윌리엄은 고드윈 가문의 발상지인 서섹스를 약탈하고 있는 중이다. 이 지역의 수장인 해롤드가 이걸 처리해줘야 체면이 선다. 마지막으로, 동생들을 보냈는데 이겼다고 치자. 그럼 그 군사적 명성을 얻은 동생은 어떨까? 누가 생각나지 않는가? 토스티그. 그렇다. 실력으로 선 사람은 실력을 제일 무서워한다. 해롤드는 혹시 모를 동생들의 대두를 두려워한 것이다.

 

 해롤드는 왜 궁수들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했나?

 

도대체 색슨 궁수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아예 없었을까? 애초에 궁수가 있었으면 스탬포드 브릿지 근처의 다리에서 바이킹 거인을 활로 쏘아 잡지 않았을까? 그 얘기가 바이킹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색슨도 활을 즐겨 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사냥꾼들은 특히 활을 잘 쏘았을 것이다. 궁수의 전술적 가치를 간과했던 것일까? 아무튼 이 부분은 의문에 쌓여있다.

 

 얘들은 대체 뭐 먹고 싸웠을까?

 

 

윌리엄의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한 후, 만찬을 준비하고 있다. 이 뒤에 윌리엄을 비롯한 오도주교등 고위급 인물들의 만찬장면이 보인다. 왼쪽에는 솥에다 뭘 끓이고 있고, 그 옆에는 고기를 굽는 것 같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는 이것뿐입니다. 다음 장부터는 이런 자료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기병이 먼저 돌격하지 않나? 윌리엄은 왜 보병을 먼저 전진시켰나?

 

색슨의 원거리 무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이 싸움터에서 기병돌격으로 적의 진형에 구멍을 내긴 힘들고, 그렇다고 측면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기병의 이점이란 상대보다 위에서 공격(적이 방패로 늘어선 방어 진형이니 이것은 상당한 도움이 된다.)할 수 있다는 것밖에 없다. 이 이점에 특별히 도약에 의한 추진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괜히 먼저 전진했다가 비싼 말들이 화살이나 기타 원거리 무기에 맞아 죽으면 아깝기나 하고 해서 보병으로 그것 다 받아낸 후 기병을 전진시킨 것이다.

 

 윌리엄은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면서도 고전했다.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해롤드의 군대가 엄청 잘 싸웠다고 밖에...ㅡ,ㅡ 병사들이 윌리엄이 죽었다는 말을 믿을 정도라면 보통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니었을텐데, 해롤드의 지휘력이 빛나는 장면이다. 그는 윌리엄이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지휘관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윌리엄은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그리고 패주할 뻔한 병사들을 수습해서 다시 공격한다. 여기에서 윌리엄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윌리엄이 이긴 것은 결국 운이었나? 능력이었나?

 

전투는 질질 늘어졌다. 중세 유럽에서 이렇게 오래 싸운 전투도 드물다. 아무튼 두 장수 모두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뽐냈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먼저 쓰러진 것은 해롤드였다. 윌리엄도 자신의 말을 3 마리나 잃을 정도였으니 격전의 한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운명의 여신은 윌리엄의 손을 들어줬다고 말할 수밖에....

 

 해롤드는 정말 눈에 화살을 맞고 죽었나?

 

많은 사료들이 그렇게 전하지만 지어낸 이야기다. 기독교 문화에서 눈이 머는 것은 천벌을 상징한다. 맹약를 깨고 왕이 된 해롤드에게 내린 천벌이라는 의미다. 해롤드는 그냥 칼에 맞던지, 창에 맞던지, 아님 진짜 활에 맞던지 했겠지만, 눈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 이 글로 이번 장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거라 여기저기 문제도 많았습니다. 아무튼 제 글을 읽고 재미가 있었다면 저도 참 기쁘겠습니다. 그리고 기사게시판에서 열정적으로 제 실수를 꼬집어 주신 분들, 특히 저에게 힘을 실어 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음 장은 13세기의 잉글랜드, 롱다리 에드워드 1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전쟁터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구국의 영웅이라는 윌리엄 월레스도 한번 만나보셔야지요.

 

여기서 안타까운 말을 드리자면, 저는 한 개 장을 모두 다 쓰고 기사를 올리는 지라, 여러분께서는 약 한 달 정도, 길면 두 달까지 기다려주셔야겠습니다. 지금 한창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이만.

 

 

 
딴지 군사/역사/국제부
런던고양이밥(drom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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