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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니그로 리그 이야기

2003.9.22.월요일

딴지 야구부
 

메이저리그 30개 전구단에 걸쳐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번호가 있다. 1947년 다저스 소속으로 데뷔하며 메이저리그의 인종장벽을 허문 주인공,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 달았던 42번이 바로 그것이다(결번지정 당시 마침 42번을 달고 있던 모 본, 마리아노 리베라 등의 선수들은 예외로 인정받았지만, 그들이 은퇴하고 나면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42번으로 기억될 선수는 재키 로빈슨 단 한명뿐일 것이다). 또한 로빈슨은 사상 최고의 2루수 가운데 한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큼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처럼 위대한 로빈슨도 빅리그에 올라오기 전에 활약하던 리그에서는 2류선수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 그 리그는 다름아닌 니그로 리그(Negro League)... 당시 메이저리그를 넘볼 수 없었던 흑인들이 독자적으로 차린 리그였다. 1920년 창설된 이래 로빈슨의 빅리그 진출을 계기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까지 약 30여년간, 니그로 리그는 흑인선수들을 위한 최고의 무대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로빈슨처럼 이곳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들 대부분이 훌륭한 활약상을 보였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흑인 명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대활약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니그로 리그의 수준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흥행을 위해 기획된 빅리그팀과의 수차례에 걸친 시범경기에서, 이들은 빅리그팀과 거의 대등한 기량을 과시했다고 전해진다(뿐인가, 1932년에는 로열 자이언트라는 흑인야구단-아마도 Brooklyn Royal Giants를 지칭하는 듯하다-이 내한경기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쿠퍼스타운 명예의 전당에서도 니그로 리그 올타임 베스트9에 해당하는 9명의 선수들(그 선정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을 70년대에 받아들인 이래, 1995년에서 2001년까지 매년 한명꼴의 니그로리거들을 헌액시킨 바 있다. 단지 피부색 때문에 빗장을 꽁꽁 걸어잠글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니그로 리그도 미국 야구역사의 일부라는 명분하에 명예의 전당에 그들의 이름을 모시고 앉았는 꼴이 치사빤스스럽긴 하지만, 늦게나마 그들의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는 움직임은 충분히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팬들의 기억속에서 니그로 리그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듯하다. 그 옛날 새첼 페이지(Satchel Paige), 조시 깁슨(Josh Gibson) 등의 수퍼스타들이 활동할 무대를 제공해 주었고, 이후 로빈슨, 윌리 메이스(Willie Mays), 행크 아론(Hank Aaron) 등의 대선수들을 배출해내는 토양이 되었던 니그로 리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전설로 남겨져가고 있다. 오늘날의 MLB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전설의 리그이지만,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리그 본지는 그런 니그로 리그의 역사와, 그곳에서 배출된 최고의 수퍼스타들에 대해 극히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니그로 리그 각팀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미국에선 이런 것도 아직 만들어서 파는 모양이다.


 


- 미국내 흑인야구/니그로 리그의 약사(略史)









비운의 주인공 플리트 워커


흔히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는 재키 로빈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884년 플리트 워커(Moses Fleetwood Walker)라는 흑인포수가 Toledo Blue Stockings라는 팀 소속으로 42게임에 출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로 로빈슨은 어디까지나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인 셈이다.


워커의 선수생활이 길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야구계 최고의 스타이자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캡 앤슨(Cap Anson)이 "검둥이가 소속된 팀과는 같이 경기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뒤 앤슨은 아예 "어떤 메이저리그 팀도 흑인과 계약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며 흑인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시바스러운 메이저리그 인종차별의 첫걸음이자, 미국내에서 흑인야구가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인 1885년에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하니, 흑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프로야구 클럽인 큐반 자이언츠(Cuban Ginats)가 창단된 것이다. 큐반 자이언츠는 1887년과 1888년 유색인종 챔피언(colored champion)에 올랐으며, 1887년에는 신시내티와 인디애나폴리스 등의 빅리그 팀들과 시범경기를 벌여 승리를 거두는 등 강한 전력을 과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많은 흑인 야구클럽들이 미국내 곳곳에서 속속 생겨났으나, 대부분 독립적으로 투어를 돌거나 해당지역의 리그에 참가하는 등의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최초의 흑인 프로야구팀 큐반 자이언츠(1887년)


1887년 최초의 미국내 유색인종 리그였던 National Colored Baseball League가 8개팀으로 조직되었지만, 관중이 워낙 없어 겨우 2주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1896년에 치러진 큐반 자이언츠와 페이지 펜스 자이언츠(Page Fence Giants)간의 라이벌전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총 15차전으로 치러진 이 시리즈에서는 페이지 펜스 자이언츠가 10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1920년, 역시 흑인팀인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Chicago American Giants)의 감독 겸 구단주였던 루브 포스터(Andrew Rube Foster)가 8개의 흑인클럽을 규합해 니그로 내셔널리그(Negro National League; NNL)를 만들기에 이른다. 이는 명백히 1887년의 실패한 리그에서 착안해 만든 것이었지만, 초창기 NNL의 흥행은 흑인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 1923년 또다른 흑인리그인 Eastern Colored League(ECL)가 창설되고, 1924년에는 이 두 리그의 우승팀끼리 최초의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열며 발전의 정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첫 니그로 월드시리즈의 우승팀은 NNL의 캔자스시티 모낙스(Kansas City Mornachs)였다.












1924년 역사적인 첫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치른 두 팀,
Kansas City Mornachs(위)와 Hilldale Dasies


그러나 1928년 시즌 도중 ECL이 돌연 해산하며 양대리그 체제는 파탄이 났다. 게다가 1929년 대공황과 1930년 루브 포스터 사망 등의 악재가 겹치자 NNL도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해야 했다. 결국 1931 시즌을 끝으로 NNL이 파산하고, 1932년 한해동안은 마이너급 리그였던 Negro Southern League(NSL)가 졸지에 유일한 니그로 리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수난기를 맞게 된다. 앞서 언급한 흑인 야구단의 내한경기가 열렸던 것도 바로 이즈음 되겠다.


다행히도 1933년 새로운 NNL이 출범하고, 니그로 리그 최초의 올스타전도 열리며 부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37년 니그로 아메리칸리그(Negro American League; NAL)가 창설되며 니그로 리그는 다시금 안정된 양대리그 체제에 접어들게 된다(이 체제는 1949년 NNL이 NAL로 흡수되기까지 지속되었다). 30년대는 니그로 리그의 황금기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30년대 초반을 풍미한 피츠버그 크로포즈(Pittsburgh Crawfords)와 1937~1945년 NNL 9연패의 금자탑을 쌓은 홈스테드 그레이스(Homestead Grays)는 단연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였으며, 그외 다른 팀들에서도 수퍼스타들이 속속 출현하며 리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피츠버그 크로포즈(위)와 홈스테드 그레이스


니그로 리그는 나날이 융성해 갔지만, 정작 선수들의 전반적인 수준은 그다지 고르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누구누구의 시즌타율이 4할, 심지어는 5할을 넘었다는 등의 호랑이 담배먹는 이야기들이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니그로 리그에는 이렇다할 기록관리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관리상태가 매우 허술하다. 많은 니그로 리그 스타들의 기록이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탓이 크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흑인들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던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여건은 니그로 리그의 숨통을 지속적으로 조이고 있었다.








 


최초의 흑인 아메리칸리거
래리 도비


1946년, 모낙스 소속이던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고 이듬해 메이저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며 인종의 벽을 허물자 니그로 리그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래리 도비(Larry Dorby)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하며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흑인선수로 기록되고, 그외 수많은 스타들이 속속 빅리그에 진출하자 아이러니컬하게도 니그로 리그의 기반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인선수들은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빅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고, 흑인야구팬들도 더이상 니그로 리그만 바라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존재가치가 극도로 드높아진 바로 그 순간부터 니그로 리그의 종말은 필연이 된 셈이다.


니그로 월드시리즈는 1948년을 끝으로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50년대에도 니그로 리그는 근근히 지속되었지만, 팬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진 채 문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고 있었다. 1956년 이후 불과 4개팀으로 운영되어야 했던 니그로 리그는, 마침내 1961년 시즌을 끝으로 완전히 문을 닫고 말았다. 너무도 많은 추억을 그라운드에 부려 놓은 채.









로빈슨을 메이저리그 무대로 픽업한 당시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오른쪽). 왼쪽은 당연히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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