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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명승부] 전설의 4인 첫빠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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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두란

2003.6.27 금요일
딴지일보 복싱부


◀이전장으로



 
레너드 1차전- 두란 생애 베스트 트랙


경기 전 두 선수는 서로의 승리를 자신하며 불꽃 튀는 입씨름을 벌였다. 레너드의 트레이너인 안젤로 던디는 스피드, 신체 사이즈, 스타일 등 세가지 측면에서 모두 레너드가 우세에 있으며 레너드야말로 두란을 잡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복서라며 강한 자신감을 피력하였다. 레너드 역시 "두란이 팔로미노를 꺾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팔로미노가 아니다. 두란이 나를 존경하도록 만들겠다"며 역시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두란vs레너드 1차전을 표지사진으로 올린 복싱매거진(일본) 80년 8월호


이에 맞서 두란의 트레이너인 레이 아셀은 "레너드는 영리한 복서다. 그러나 두란의 경험은 레너드를 압도할 것이다. 레너드는 진정한 의미에서 테스트를 받은 적이 없다"며 큰 소리를 쳤고 두란 역시 "레너드는 너무 말이 많다. KO로 밟아버리겠다"며 호기를 불태웠다.


4인방끼리의 첫 대결이 되는 두란과 레너드의 1차전은 80년 6월 20일 캐나다의 몬트리얼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46,317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펼쳐졌다. 두란의 파이트머니는 150만 달러, 레너드의 파이트머니는 무려 500만 달러로 두 선수의 파이트머니는 당시 헤비급 타이틀전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케이블채널을 통한 PPV가 활성화된 상황이었다면 흥행규모와 파이트머니는 두 배 이상 상승했을 것이다.


경기 전 전문가들의 예상은 레너드의 우세였다. 두란의 기량과 노련미는 인정하나 라이트급 출신이고 웰터 월장 이후 8연승을 거두었다고는 하나 KO승은 4회에 불과하고 팔로미노 같은 강자를 KO로 시원스럽게 제압하지 못했던 전력은 당대 최고의 복싱천재 레너드를 잡기엔 역부족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뒤엎고 두란은 경기 내내 레너드의 스피드를 무력화시키며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2체급 제패에 성공한다. 레너드 생애 최초의 패배였다. 2라운드에선 좌우훅으로 레너드를 비틀거리게까지 만들었고 여러 차례 보디블로우와 좌우훅으로 레너드를 곤경에 빠뜨리면서 전반적으로 경기를 주도해 나갔다. 경기 막판 레너드의 뒷심이 빛을 발했으나 채점은 145 : 144, 146 : 144, 148 : 147로 모두 두란의 것이었다(시합 필름을 보면 147 : 147 채점이 섞인 두란의 2 : 0 판정승으로 발표되는 데 여러 외신과 복싱레코드 사이트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심판전원일치 판정이 맞는 듯 하다). 판정결과가 1~2점 안팎의 매우 근소한 차이가 났는데 레너드의 인기 탓인지 두란에게 조금 박한 채점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매기기로는 시각적으로나 실속면에서나 3~4점 정도 두란이 앞선 시합이었다.









두란 vs 레너드 1차전- 두란의 보디블로우가 터지고 있다


레너드의 패인은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혔듯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한 데 있었다. 두란은 좌우훅과 보디블로우로 레너드의 움직임을 묶고 적절한 클린치웍과 접근전을 통해 레너드에게 타격거리를 주지않는 영악한 복싱을 선보이며 생애 최고의 업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두란의 승리가 확정되자 파나마는 이 날을 임시공휴일로 정하고 축제분위기에 휩싸였고 두란은 파나마 대통령의 전용기를 타고 귀국하는 영광을 맛본다(작년 우리나라의 월드컵 4강의 흥분과 맞먹을 정도의 국가적 경사였다. 한국 축구 만세!!!!)








두란 vs 레너드 1차전 주요장면 동영상(1~ 5R)


두란 vs 레너드 1차전 주요장면 동영상(6~10R)


두란 vs 레너드 1차전 주요장면 동영상(11~15R)



두란의 전성기는 이때까지였다. 후에 4체급을 제패하는 데 성공하며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펼치긴 하지만 기량면에서 진정한 전성기는 이 무렵이 마지막이었다. 첫번째 충돌이 있은 지 5개월이 지난 80년 11월 25일 두 영웅은 또다시 글러브를 섞게 된다. 결과적으로 레너드의 복수전이 되는 이 시합은 뉴올리안즈에서 벌어졌으며 흥행수입을 제외한 두 선수의 파이트머니만 두란이 1000만 달러, 레너드가 700만 달러로 당시까지 복싱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한 말그대로 꿈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시합의 무게감과는 달리 시합 내용은 밋밋하고 허무한 것이었다. 1차전과 달리 완벽하게 아웃박스하면서 히트앤드런을 펼친 레너드의 영악한 전술 앞에 짜증이 난 두란은 8라운드 들어 별다른 히트를 허용하지도 않았는데 돌연 고개를 돌리며 "No Mas"(영어로 번역하면 No more)를 선언하며 시합을 포기해버린다. 레너드의 8회 TKO승.


경기 내용이 이러하다 보니 두란의 시합 포기에 대해 마피아 개입설 등 각종 루머가 돌았으나 정확한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두란이 레너드와의 3차전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3차전에서 승리하면 2차전의 경기 포기에 관한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으나 판정패하는 바람에 기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3체급을 석권하다









두란의 3체급 석권을 특집으로 다룬 복싱뉴스지 기사


레너드와의 재대결에서 패한 두란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다시 체급을 올린다. 루이지 민칠로를 10회 판정으로 잡고 윌프레도 베니테스가 가지고 있던 WBC 수퍼웰터급 타이틀에 도전하나 베니테스의 고감도 디펜스를 뚫지 못하고 15회 판정패, 분루를 삼키고 만다. 이어진 재기전에서 무명의 로컬 복서 커클랜드 레잉에게마저 판정패해(이 경기는 82년 링지 선정 올해의 이변이었다) 체력이나 연령,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맛이 갔다는 평가까지 받게 된다.


프로모터 돈 킹도 그를 버렸고 전문가들 역시 두란의 돌주먹은 더 이상 날카롭지 않고 과거의 맹렬한 야성과 투쟁본능도 사라져 더 이상 과거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힘들 것이라는 혹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집념의 노웅은 결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절치부심 전열을 재정비한 두란은 70년대 웰터급의 명챔피언 턱분쇄기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를 4회 TKO로 꺾고 데이비 무어가 가지고 있던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한다.


지면 은퇴라는 비장한 각오로 시합에 임한 두란은 일본의 미하라 다다시를 꺾고 타이틀을 획득, 12연승(9KO) 무패가도를 달리며 내일의 수퍼스타로 기대받던 무어를 경기 내내 흠씬 두들겨 8회 2분 2초만에 TKO승을 거두고 자신의 32번째 생일날 복싱역사상 일곱번째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다.









두란 vs 무어- 두란의 라이트훅을 맞고 주저앉은 무어








      두란 vs 무어 주요장면 동영상 보기



무어의 패배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기량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무어는 1차 계체량을 통과하지 못했고 1라운드에선 두란의 엄지손가락에 오른쪽 눈이 찔려 경기 내내 시야를 확보하지 못했다. 두란은 경기 직후 자신의 복싱인생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두란 vs 해글러- 해글러에게 석패하다


두란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당대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던 해글러와 싸워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어전 이후 두란은 단 한차례의 방어전도 치르지 않은 채 다시 체급을 올려 해글러의 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한다. 당시 해글러는 7연속 KO방어에 성공하며 확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던 시기였다.


두란은 해글러를 맞아 상당한 선전을 펼쳤으나 해글러의 막판 공세에 밀려 안타깝게 15회 판정패로 물러나 4체급 도전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란은 13회까지 세 부심 중 두 명의 부심에게 앞선 채점을 받고 있어 14, 15회 해글러의 공세를 조금만 더 차단했었더라면 복싱 역사상 최초의 4체급 제패도 가능했을 것이다. 해글러는 두란전을 통해 자신의 방어전 중 유일한 판정승을 기록하게 된다.


다시 주니어미들로 내려온 두란은 마이크 맥컬럼의 도전을 거부해 WBA타이틀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84년 6월 디트로이트의 저격수 토머스 헌스와 WBC 수퍼웰터급 타이틀을 놓고 정면 충돌을 감행한다.



 생애 최초의 KO패


전문가들의 예상은 백중세였다. 해글러의 공세를 무력화시킬 정도로 뛰어난 디펜스를 지닌 두란이라면 헌스의 초반 공세를 봉쇄하고 후반에 승부를 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란 vs 헌스- 헌스의 파상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두란


그러나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뚜껑을 열어본 결과 두란은 5분 동안 헌스의 충실한 샌드백이 되어주며 참혹할 정도로 얻어맞고 2회 KO패하고 만다. 1라운드 시작 직후 히트맨의 죽창 같은 스트레이트에 턱이 난자당하며 두 번의 다운을 빼앗긴 두란은 2라운드 들어 맹렬히 저항했으나 히트맨의 십자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캔버스 깊숙이 침몰하고 만다. 생애 최초의 KO패였다.



 4체급 신화를 쓰다


헌스전 이후 은퇴의 기로에서 방황하던 두란은 1년이 넘는 공백을 깨고 다시 링으로 돌아온다. 해글러의 이복동생 로비 심즈(따위)에게도 패하며 완전히 끝났다는 평가도 들었지만 89년 2월 토머스 헌스를 충격적인 일발 녹아웃으로 잠재우고 WBC 미들급 왕좌에 오른 아이란 바클리에게 도전, 나이 서른여덟에 12회 판정승을 거두고 복싱 역사상 세 번째 4체급 제패에 성공한다.


바클리의 힘과 거친 공세에 다소 고전하던 두란은 11라운드 들어 왼손훅에 이은 그림 같은 트리플 콤비네이션을 터뜨려 다운을 탈취하며 승부의 무게중심을 기울게 만든다. 시종일관 박진감 넘치는 양상으로 전개된 이 시합은 국내에도 생중계되었으며 채점은 119 : 112, 116 : 112(두란 우세), 116 : 113(바클리 우세)의 Split Decision이었다.


두란은 경기 후 "나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 레너드와 헌스와의 재대결을 원한다"며 기염을 토했고 시합을 주최했던 프로모터 봅 애럼은 레너드가 헌스와의 리매치를 승리로 이끌면 두란과의 3차전을 추진하겠다고 밝힌다.


그러나 레너드가 헌스와의 재대결에서 석연찮은 무승부 판정이 나자 레너드와 헌스의 3차전을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빗발쳤고 애럼은 애초에 계획했던 레너드와 두란의 3차전을 추진하는데 애를 먹게 된다. 하지만 애럼은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레너드와 두란의 3차전을 감행한다. 38살의 두란으로선 더 이상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레너드vs두란 3차전 포스터


두 선수의 3차전의 캐치프레이즈는 Uno Mas(영어로 One More)였다. 두란이 2차전에서 시합을 포기할 때 던졌던 멘트인 No Mas를 패러디한 슬로건이었다. 시합 개최권을 두고 트럼프플라자, 시저스팰리스, 미라지 등 라스베가스의 3개 특급 호텔이 경합을 벌였는데 최종 낙점은 새로 개장하는 미라지 호텔에 돌아갔으며 대전료는 레너드 1,300만 달러, 두란이 800만 달러였다.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레너드는 "두란은 나를 이긴 유일한 남자다. 시원하게 그 빚을 갚고 싶다. 두란은 이제 역사 속의 인물이 될 일만 남았다"고 밝혔고 두란은 "지금까지 오직 레너드와 싸울 날만을 기다려왔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베스트가 누구인지를 증명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했던가. 경기 내용은 2차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두란은 레너드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시종 범전을 벌인 끝에 12회 심판전원일치 판정패로 물러나고 만다. 레너드 역시 과욕을 부리다 11회 두란의 라이트훅을 맞고 왼쪽눈이 크게 타격을 입는 등 양쪽 눈 도합 60바늘을 꿰매는 큰 부상을 입어 상처뿐인 영광에 그치고 말았다.



 험난했던 말년


사실상 이 경기를 끝으로 두란의 복싱생명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2001년까지 링에 올랐지만 레너드전 이후 그의 시합을 보는 것은 강렬했던 그의 라이트급 시절의 추억을 훼손시켜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괴로운 일이 되고 말았다.


비니 파시엔자에게 두 번의 패배, 헥토르 카마초와 노인정 매치를 벌여 판정패(레너드 역시 나이 마흔이 넘어 뜬금없이 링에 올라 카마초와 노인정 시합을 벌여 진 적이 있는데 카마초는 노인 킬러인가??), 아르헨티나의 힘꾼 호르헤 카스트로와 1승 1패 등 반타작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다. 98년에는 윌리엄 조피의 WBA 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3회 TKO패로 무참히 물러났는데 경기 후 조피는 "두란은 어린 시절 나의 영웅이었다. 그를 쓰러뜨리는 것은 곤욕이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조피전 이후 두란은 몇 차례의 시합을 더 치렀고 2001년 7월 카마초와 재대결을 벌여 판정패한 이후 큰 교통사고를 당해 링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Natural Born Fighter


슬럼가의 악동에서 파나마의 영웅으로 성장한 로베르토 두란. 역대 라이트급 올타임 랭킹을 논할 때 언제나 No.1의 자리에 놓이는 이 사나이(아직도 링지의 몇몇 보수적인 미국 평론가들은 베니 레너드를 1위라고 박박 우기고 있지만) 매력은 야성과 지능의 완벽한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전성시절의 두란은 펀치력, 맷집, 지능, 스태미너, 테크닉, 스피드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체급을 올리면서 라이트급 시절의 끊어치는 맛이 떨어지면서 주먹의 독성이 감소되었고, 가드가 낮아 헌스전처럼 일단 데미지를 입으면 집중타를 허용하는 위험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고, 레너드 2차전이나 베니테스전처럼 철저한 카운터 전법으로 임하는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런 한계와 말년의 갈짓자 행보를 근거로 젊은 복싱팬들에게 두란의 업적과 기량이 폄하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레너드와 두란은 세 번 싸웠다. 세번째는 아니 싸웠어야 좋았을 것이다. 수염을 텁수룩히 기르고 레너드와 1차전을 벌이던 두란의 모습은 마치 사냥에 나선 용맹한 원시전사 같았다. 경기 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레너드를 향해 포효하던 모습은 언제봐도 호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라이트급에 또 다시 두란과 같은 파이터가 등장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듯 하다. 아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여..
다음 회는 카마초님의 국내 복싱 명승부전이 나가고 해글러편은 그 다음 업데이트 때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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