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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아버지의 눈물

200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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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아버지의 눈물

2001.2.7.수요일
딴지생활부

아버지 다섯살에 홀로 되신 할머니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 올해로 벌써 열 두해 째가 되나 봅니다.

 

처음엔 할머니가 그냥 잠시 착각을 하신 것이겠지 했는데, 일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 "오빠, 오빠" 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냉장고 문을 하루에도 수십차례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누구 방이냐고 묻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국의 전직 대통령도 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할머니는 퇴행성 정신 질환,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치매 환자입니다.

 

할머니의 급작스런 변화에 가족들이 적응하려고 애쓰던 그 이듬해에 백내장 수술까지 받으신 후로는 상태가 더 나빠지셔서, 집안에 옷이란 옷은 다 빨려고 하시고, 차려놓은 저녁상도 먹을 사람 없다며 죄다 버리기를 여러 차례, 얼마 전에는 비가 올 거니까 멍석을 걷어야 한다며 방의 장판과 도배지를 모조리 뜯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증세는 집안 친척들의 염려와 관심에도 별다른 진전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께 미안하다시며 겉으로는 말씀은 안 하셔도 아버지는 퍽 속이 상하신 모양입니다. 소주 반 잔에 취해버리는 아버지가, 제가 출장 길에 사다둔 독한 중국 술을 거푸 드시기도 하고, 공연히 늦은 시간에 들어오셔서 잠든 할머니를 확인하시고 나서야 깊은 한숨과 함께 어려운 잠을 청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쩌다 TV에서 치매노인을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면 슬며시 다른 채널을 돌리시기도 하고, 치매 클리닉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차곡차곡 스크랩도 하십니다.

 

오늘은 할머니의 여든 세번째 생신입니다. 같이 아침상이라도 했으면 했지만, 경기 불황을 이유로 바짝 당겨진 출근 시간에 맞추느라 아침도 먹는 듯 마는 듯 하고 출근을 서두르던 현관에서 우연히 저는 바로 옆 욕실에 계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엊저녁에 뭘 많이 드셨네요? 허허허."
"아저씨는 누군교?"
"눈 감으세요. 비눗물 들어갑니다. 옷은 이리 주시고."

 

할머니가 또 옷에 실수를 해서 아버지가 씻기고 계신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아침 준비를 하고 계시고 거실 옆 베란다에 이불이 널려있는 게 보입니다.

 

잠시 아무 말도 없길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그 때 욕실 안에서 들리던 아버지 목소리가 갑자기 변한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몰라봐도 좋고 온 방에 똥칠을 해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오래오래..."

 

아버지는 울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한참 철없던 때에는 이유없이 대들기도 했고, 제 나름대로의 방황 끝에 자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나이를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 밥 거르기를 먹기보다 더 하셨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지금도 위가 약해서 매운 음식을 드시지 못하십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가족들을 편하게 못해줘 늘 미안하다는 마음을 가슴에 안고 사시는 분이기에 오늘 아침의 모습도 평소에 보아오던 아버지의 모습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십 이년을 하루 같이 할머니를 모시면서 겉으로 한마디 불평도 않으시던 아버지가 오늘 아침 보인 눈물은, 아버지도 한 사람의 평범한 아들일 뿐이며, 동시에 제가 저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출근길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시간이 흘러 행여 지금의 할머니의 모습이 되어 버린다면, 그 때 과연 저도 웃으면서 아버지를 씻길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일신이 편하려고, 모두가 좋은 게 좋다는 핑계로 그저 시설 괜찮은 양로원을 찾으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신문 지상이나 뉴스 한 코너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듯이 제주도 공항에 아버지를 버리는 그런 나쁜 자식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여러분들이 읽으셔봤자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을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이 말씀드리는 것은, 그 때 상황이 어떻게 되던간에 저도 제 아버지가 훗날 혹시나 그런 모습이 되었을 때 지금 제 아버지가 노망든 할머니에게 하시는 것처럼 저 역시 아버지를 정성으로 모시겠다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제 이야기를 읽으신 여러분이 꾸짖어달라고 여러분 앞에서 감히 약속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달을 보고 소원을 하나씩 빌면 이뤄진다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둥근 보름달이 뜬답니다.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이야 한마음이겠지만 다들 소중한 소원을 비시고 혹시 기억이 나시면 저희 아버지, 언제까지나 건강하시라고 같이 기원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도 여러분을 위해 소원을 빌겠습니다.

 

딴지일보 독자 여러분, 항상 행복하십시오.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딴지 생활부 빨간고추
(
redpepper@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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