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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7.30.일요일
딴지역사고증팀


 




본지 그동안 일제가 유포한 식민사관과 체계적인지 못한 비과학적 고증으로 뒤틀렸던 각종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올곧게 하고 겨레의 자긍심을 복원케 하는 과업을 수행해 왔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본지가 그동안 규명해낸 역사의 실체들은 앞으로 영원히 인류의 문화적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간 본지의 압도적인 연구활동을 망연자실 지켜보며, 그 탁월한 고증능력에는 도저히 범접조차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엄청난 자괴감에 괴로워 했을 국내 사학계에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바이다. 본지가 워낙 군계일학의 발군이라서 그런 거지 사학계 너거뜰이 못 나서 그런 것은 아니니 힘들 내시기 바란다. 그러고 보니, 본지는 참 못하는 것도 없다. 

 


최근 본지는 세계 역사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메가톤급 발굴을 또 한 건 올려 이에 독자제위께 포고하는 바이다. 

 







 


1492년, 한 이태리 태생 모험가의 미대륙 발견은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서반구와 동반구가 최초로 조우함으로써 미대륙이 세계사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수 백년을 이어가는 유럽 세계팽창의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모험가는 바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 

 


그는 당대 일반인식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면 반드시 인도에 닿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결국,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출발, 70여 일의 항해 끝에 마침내 지금의 카리브 연안에 도착하게 된다. 그 후 총 4차례 미대륙을 왕래했으나,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도착한 곳이 새로운 대륙이 아니라 아시아의 어디쯤이라고 믿었다 한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까지 그곳이 아시아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지리정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미대륙에서 만났던 어떤 한 사람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에 의해 이미 미대륙은 발견되었고, 콜롬부스라는 이름 역시 사실은 그 사람이 지어준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본지 역사고증팀이 스페인 왕립도서관에서 발굴한 한 고문서로 인해 밝혀졌다. 

콜롬부스 초상화에도 등장하는 이 고문서는 바로...

 

" 박규 표류기 "
( 朴規 漂流記  )


 


박규라는 한 조선인이 미대륙까지의 표류상황과 그 후 정황을 담담하면서도 유려한 필체의 서사시로 기술한 이 문서는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모험심과 웅대한 기개를 확인케 하고 있다. 

 

본지 자료실에 보관 중인, 조선 9대왕 성종(1469-1494)때 집현전에서 발간한, 당시의 사건기록을 담은 희귀도서인 "사건 과실화(事件過悉禍)" 맨 마지막 장에 있는 "행불자 명단"에서도 박규는 실존 인물로 확인 되고 있다.


" 함경지방의 수군에서 큰 활약을 하던 박 규 라는 장군이 있었으니, 평소 더 먼 바다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하던 차에, 성종 14년(1482)에 혼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나아갔으나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더라. "


이 표류기에 따르면, 태평양에서 표류하며 물고기와 빗물로 연명하던 박규 장군은 80일이 되던 어느날 새벽 드디어 뭍에 닿게 된다. 홀홀단신으로 미지의 대륙에 도착해 황망한 중에도 박규 장군은 한 편의 시조로 그 감흥을 읊어내는 풍류정신을 잃지 않았다. <박규 표류기>에는 이 도착의 감동과 출정의 각오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매리가로 我昧離歌路
양기고흠 洋氣高欽 
고리아타운은 孤離我舵運銀
로수안절래수 怒水按折來搜 


나는 새벽에 길을 떠나며 이 노래를 읊네
큰 바다에 서려있는 기운을 높이 흠모하던 차에
외롭게  떠나온 길, 나 홀로 은빛 키를 잡으며
성난 물을 누르고 끊으며... 찾아왔네


 


 


 


이후 박규 장군의 영도력에 복속하게 되는 원주민들은 이 시를 기리기 위해, 그  땅을 < 아매리가 >라 칭하고, 박규 장군이 최초 도착했던 지역을 <로수안절래수>라 불렀다 한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는 <아메리카로 떠나라!>는 뜻의 <Yankee go home>의 어원 역시 이 시조 되겠다.

 


무장으로서 훤칠한 키에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이렇듯 안빈낙도의 여유와 풍류마저 갖춘 박규 장군을 현지 원주민 처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모했다 한다. 그 역시 외로움을 오로지 달달리만으로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현지 원주민 처녀들과의 애틋한 사랑을 다소 애로틱한 한 편의 시로 기록해 놓기도 했다.

 


기수마이애수 (氣壽馬怡愛水)
애수홀애수홀 (愛水惚愛水惚)
말과 같이 생명의 기운이 솟구치니 기쁜 사랑의 물이 나는구나
황홀한 사랑의 물이여, 활홀한 사랑의 물이여..


 


박규 장군은 비록 그들이 사대부집안의 규수들이 아니라 족보도 없는 원주민 처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자식들에게 모두 호부호형을 허하였으니, 그 계급타파의지와 사해동포정신은 칭송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이 자식들은 박규 장군의 함경도 사투리를 따라 박규 장군을 <아바쥐>로 호하였으니, 미대륙 역사상 가장 용맹한 부족이었던 <apache>는 바로 그렇게 태동하게 된다.

 


이 시조를 사랑의 주문으로 이해한 인디언들 사이에서, 이 시조는 상대를 유혹할 때 무릎을 꿇고 <기수마이애수>라고 읊조리는 구애의 상용구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때 여자는 새침떼게 등을 돌리고 있다가 애수홀, 애수홀 하고 화답하는 것으로 사랑을 허락했다. 

 


훗날 이렇게 남자가 무릎 꿇고 여자가 등을 돌리고 있는 인디언들의 구애행위를 멀리서 목격한 무식하고 미개한 양넘들은 남자가 엉덩이에 키스했더니 여자가 거기가 아니구 정확하게 똥구녕에 해줘.. 하고 화답한 것으로 오인해 만들어 진 말이 바로 < kiss my ass >와 < ass hole > 되겠다. 

 


원주민 인디언들은 이렇듯 당당하고 올곧은 기개를 가진 박규 장군을 너나 할 것 없이 추종하게 되었고, 박규 장군은 오래지 않아 수만 필 이상의 말과 수 천의 처자를 거느리며 미대륙을 호령하게 되니, 이들 원주민 인디언들은 수만 필의 말을 소유한 박규 장군을 숭상하여 그를 " 말을 많이 소유한 박씨 성을 가진 위인" 이라 하여 마다박가(馬多朴家)라 불렀다. 훗날 서구 이주민들은 박규 장군의 영도력을 시샘하며 혼자 모든 재물을 차지하려는 위인이란 뜻으로 폄하하여 마다박가(馬多朴家)를 썼으니 < mother fucker >의 어원 되겠다.

 


박 규 장군은 온화하고 기품 있었으나 장군 출신으로 기강을 위해 상벌체계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터, <박규표류기>에 따르면 그는 죄를 지은 자를 조선시대의 형법에 따라서 처벌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정해진 형벌을 내리고도 그 죄값을 치루기에 부족할 때 집행관의 판단에 따라 내려지는 가중처벌이 있었으니 죄인을 묶어놓고 후장을 발로 걷어차는 형벌이었다. 

"발을 더하라!" 구령에 따라 행해졌기에 이를 "족가"(足加)라 불렀다.







죄인에게 "족가지마"형벌을 내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위엄있게 치켜들고
있는 박규 장군 늠름한 모습
 


 


국왕능멸이나 모반을 꾀한 자들에게는 위의 "족가형"보다 더한 형벌을 내렸으니, 이 형벌은 다섯 손가락 중에 으뜸으로 긴 가운데 손가락을 죄인의 후장에 대고 다른 이가 이를 발로 차서 어퍼컷을 먹이는 끔직한 형벌이었다 한다. 

"손가락에 발을 더하여 마비까지 이르게 되다"라 하여 이를 "족가지마(足加指痲)"라고 불렀다 한다.

이 형벌을 당한 자는 똥꼬확장증에 시달리며 장기간 사회부적응 상태가 되어 사회복귀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기에 그 참상이 끔직하다 하여 15대 광해군때 이르러 전면폐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끊임없이 전래되어 현재의 국민스포츠인 똥침으로 정착되었다. 

 


그 이후 "족가" 와 "족가지마" 는 큰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표현으로 정착되었고, 이것이 양넘들에게 전파되어 상대를 위협하고자 할 때, 박규 장군이 두렵지도 않냐는 뜻으로 박규 장군의 이름을 높이 외치며 가운데 손가락을 휘두르는 < fuck you >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박규 장군의 영도아래 평화롭기만 하던, 어느 날... 


동부 해안의 인디언들에게서 봉화신호가 날아온다. 동부 해안에 상륙하는 희멀건하게 생긴 바짝 마른 놈 하나를 포박해 두었으니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지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박규 장군은 친히 심문하러 달려가, 굶고 지쳐 피골이 상접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못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짝달만한 그 사람을 보고 나직하게 이렇게 읊조렸다 한다. 

 


거리수토부 골음부수 ( 距離數吐芙 骨陰夫帥 )
조온마난색기(朝溫麻煖色氣)


먼 길 오며 수차 토하여 연꽃처럼 약하고 피골이 음하게 된 남자로구나
아침마다 온수로 목욕시키고 삼으로 따뜻한 옷을 지어주어 얼굴색이 기운을 차리게 하라..


 


박규 장군의 하해와 같은 은총에 감복한 이 희멀건 남자는 엎드려 눈물로 감사드리니, 이를 지켜본 인디언들은 그 남자를 <거리수토부 골음부수>라 불렀고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취했으며, 인디언들은 <골음부수>처럼 키가 작고 상황파악 못하는 사람을 보면 <조온마난색기>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토록 큰 은혜를 입고 건강을 회복한 <골엄부수>는 고국에 대한 향수와 공명심에 그만 눈이 어두워져 자신의 은인 박규 장군을 배반하기에 이른다. 이 신비의 미대륙을 자신이 발견한 것인양 하여 영웅이 되고 싶은 욕심에 대서사시 <박규 표류기>를 훔쳐 야심한 밤에 도주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보고 받은 박규 장군은 가고 싶다면 언제든 보내 줄 것이라 약속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야반도주한 <골음부수>를 한탄하며, 자연과 벗하며 결코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어부나 되어 살지 않고선... 이라며 자신의 무위자연사상을 담아 이렇게 안타깝게 일갈한다. 

 


애이시불노무색기(哀離時不怒無索期)
선어부비취 ( 先漁夫非取 )

아 슬프도다. 떠날 때가 되면 화내지않고 찾지도 않을거라 기약했건만
먼저 어부가 되어 아무 것도 취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그 후 인디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배신을 때리는 인간을 지칭할 때, <선어부비취>라 불렀으며, 이것이 양념들에게 전파되어 < son of bitch >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박규 장군 행적은 <박규표류기>가 도난 당해 더 이상 기록이 없다. 그러나, 세계사에 따르면 <골음부수>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영웅이 되었지만, 박규 장군의 웅대한 기개와 아량을 잊지 못하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배반한 죄책감으로 인해 심히 괴로워 하다가,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다시 돌아오길 3차례나 더하였으나 끝내 원래 그 곳을 찾지 못한 체 어떤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우리 선조 박규 장군이 터를 닦고 기반을 마련해놓은 속국에 더불살이로 살기 시작했고,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일상어조차 박규 장군의 유려한 시어들에서 빌어 온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미국 노무 쉐이들이 최근 들어 그 역사를 망각하고 감히 어른의 나라에서 폭탄을 아무데나 떨어뜨리지를 않나 물에 독극물을 뿌려대지 않나, 겨우 한국의 속국이었던 미국이 이 지랄을 하는 데도 모가지 힘도 한 번 제대로 못 주고 질질 끌려 다니는 정부는 하늘에 계신 박규 장군께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넘들도 애시당초 지들이 얻을 것이 있어 이 땅에 있는 바, 우리가 얻을 것이 있으면 당당히 얻고, 주장할 것이 있으면 당당히 주장하여야 하는 법이거늘, 언론이라고 하는 것들도 제대로 항의와 주장 한 번 해보기도 전에 미리부터 이 사태가 반미감정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느니 지레 꼬리를 말아버리는 빙신 같은 작태를 목도한 본 역사고증팀은 미국넘들이 대구리 숙이고 정식으로 사죄할 때까지 박규 장군의 이름을 높히 외치며 족가지마의 형벌을 연속 콤비블로우로 미국넘들에게 내릴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박규! 박규!
양기고흠! 양기고흠!



 


 

- 오랜만에 역사고증 한 판 땡긴
딴지총수 (
chongsu@ddanz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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