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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S. Bay 추천0 비추천0






1999.5.31.월

논설우원 Don S. Bay



90년의 일이다. 당시 한국봉제업계는 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부터 마치 파국의 길을 걷는 듯 와해되기 시작했고 수 많은 회사와 공장들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 와중에서도 남의 등을 쳐 단물을 빼먹으려는 사기꾼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나도 생산공장을 많이 옮겨야만 했다. 몇 년동안의 노력으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봉제우의 수출공장으로 부상하던 오창의 거래공장은 스스로 회장이라고 칭하던 서울 사무실의 사장이 한번 마음을 잘못 먹는 바람에 단번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기업인들 사이에 신앙처럼 받들어지던 大馬不死의 신화를 믿으며 충청도 농공단지 부지를 대대적으로 사들이고 다시 그것을 담보로 부동산을 늘려가던 조사장의 회사는 가방용 PVC 코팅지 공장이 더 채산성이 높으리라는 생각에 잘 돌아가고 있던 봉제우의 공장을 하루 아침에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 일을 두고 앞날을 내다본 탁월한 선견지명이라고 침을 튀겨가며 그의 엉덩이를 핥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오창공장은 그 후 불과 몇 년도 버티지 못하고 은행빚에 짓눌려 도산하고 말았다.


조사장이 大馬하고 생각한 그의 회사들과 농공단지의 부동산들은 사실 은행들이나 대기업 입장에서는 바둑판 위에 놓여진 작은 바둑알 하나의 위상조차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사범으로 잠시 옥살이까지 했던 그는 이제 베트남에서 다시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오창 봉제공장의 문을 닫을 당시 많은 실업자들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다. 가장 억울한 사람은 우리가 늘 윤사장이라고 부르던 오창공장의 공장장이었다. 나중에 인도네시아 생산과장으로 추천해 이제 인도네시아 생활 9년차에 돌입한 사람이지만 당시 지분을 떼어 주겠다던 조사장의 구두 약속만을 믿고 열과 성을 다해 충성을 다하다가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아루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버린 사람이다.

윤사장에서 윤과장, 윤대리, 윤공장장 등 호칭이 그 후 수도 없이 변한 그는 여담이지만 두주불사의 주객으로 술로 인해 빚어진 몇가지 일화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오토바이를 즐겨 타던 그가 그날도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충주호 지류의 제방길을 달리다가 오토바이로 전신주를 들이받은 일이다. 오토바이와 함께 제방 밑으로 굴러 떨어진 그는 부상도 좀 입었지만 워낙 몸이 튼튼했고 술기운도 아직 남아 있었던지라 오토바이를 다시 길 위로 끌고 올라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서 몇 시간을 달렸지만 먼동이 뿌옇게 터오도록 그는 지척인 집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꾸 제방에 처박히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새벽이 되고 술이 어느 정도 깨자 그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아까 처박은 전신주에서 다음 전신주까지도 가지 못하고 대가리가 30도 정도 휘어진 오토바이를 타고 그 두개의 전신주 사이를 밤새 맴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과 오토바이와 풍류를 즐기던 그는 그렇게 갑자기 회사에서도 쫓겨나면서 부인에게 이혼까지 당하고 말았다.


그 무렵 난 오창공장을 대신할 공장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충주에서 우리 일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섰다. 황 모라는 사람은 봉제업계에 전혀 경험이 없었지만 재산도 꽤 있고 대기업에서 오더만 보장해 준다면 이익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적극성과 열심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의 첫인상은 좀 생경했다. 바짝 마르고 움푹 들어간 눈두덩 안에 어딘가 광기가 흐르는 듯한 눈빛. 그는 하체마비로 휠췌어에 앉아 있었다. 12.12사태 때 수경사에서 근무했다는 그는 합수부측 병력으로 참모총장공관 공격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척추에 총상을 입었다.


수술도 받고 통합병원에서 오랫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척추에 박힌 총알은 제거할 수 없었고 그의 하반신은 그 후 자기 의지로는 단 1밀리도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합수부 측 부상자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는 훈장도 받았고 맘 내킬 때마다 보훈병원에 한달이고 두달이고 입원해 모르핀투약을 즐기며 점차 모르핀 중독이 되어갔다.


그러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보훈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그로서는 병원 밖에서도 모르핀을 구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12.12사태 이후 1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그의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모르핀을 단호히 끊은 이후 충주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동안에도 나는 사장실에서 들려오는 그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충주에 있던 한 공장을 인수해서 우리 오더를 하겠다던 그가 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피력한 뜻은 그의 초췌한 용모나 광기가 번득이는 안광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쓰레기 같았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죽기 전에 뭔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모르핀을 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섬뜩한 인상에 처음에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공장이 가동되면서부터 그가 어린 애처럼 들떠 즐거워하는 모습에 내 마음도 흐뭇해지곤 했다.


공장에 근무하는 40-50명쯤 되는 직원들에게 매달 월급을 주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보람차다는 것이었다.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찬 한 시대를 스스로 마감하고 이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선 그는 남을 돕는 일,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반신불수의 몸이 된 후 그가 얼마나 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받아 왔는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와 거래를 하는 동안 우리 서울 본사에는 단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장애인이 그 건물에 들어서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듯, 높은 문턱과 계단들이 그를 가로 막았고 당혹과 연민, 동정, 경멸 같은 것들이 뒤섞인 사람들의 시선들이 몹씨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공장 사장이라는 직함과 그의 돈 외에는 공장 운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가 매일 제일 먼저 출근하여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으며 바빠하고 가끔은 큰 소리로 웃기도 하는 모습은 아무튼 보기 좋았다. 그는 오랜 칩거생활 끝에 다시금 사회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의 광기도 눈에 띄게 엷어지고 살도 좀 오르는 듯 했다. 그리고 윤사장을 비롯한 예전 오창공장 직원들이 충주공장에 모여들면서 공장은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4호 사무실에 관짝이 들어온다면의 홍사장의 공장으로 옮기기 아직 한참 전의 일이었고 당시에는 오더도 풍부한 편이었다. 하야시라는 일본 거래선 부장은 충주 공장에 올 때마다 날로 향상되는 품질과 생산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황사장은 충주시내에서도 꽤 유지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저녁식사에 초대되는 일도 생겼다. 사실 내가 한 것이라곤 열심히 오더를 받아다 주고 일주일에 두 세번 공장에 찾아가 제품검사를 하는 것 뿐이었지만 황사장은 늘 내게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과분한 감사에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핼쓱한 얼굴과 휠췌어 발판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아진 그의 두 발을 보며 가졌던 거부감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인가 보다. 황사장은 처음 접하게 된 충주의 소위 상류사회에 나무 빠르게 빠져드는 듯 했다. 주거래은행에서는 그가 갈 때마다 지사장실로 모시기 시작했고 그가 부유하다는 소문에 은행이나 친지들을 통해 새로 알게 되는 얼굴들이 많아졌다. 그 중에는 물론 별로 좋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충주공장이 가동된지 불과 8개월도 안 되었을 때였다. 어느날 오후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당황한 나와 팀장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벌써 저녁 9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사장실에 앉아있던 황사장은 그동안 끊었던 모르핀을 한 대 맞은 듯 몽롱한 눈빛이었고 옆에 있던, 이제는 윤과장으로 호칭이 바뀐 오창시절 윤사장이 설명해 준 상황은 대충 이랬다.







최근 은행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 중 황사장에게 간이라도 빼내 줄듯 알랑거리던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황사장이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에 이바지하여 불굴의 의지를 선보인 충주의 자랑거리라고 추켜세우면서 몇 번 사냥터까지도 그의 휠췌어를 힘겹게 밀고 다니며 오랜만에 산천의 내음을 만끽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황사장에게 높은 이자를 제시하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단다. 돈놀이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20만원, 50만원, 그 다음에는 100만원... 이런 식으로 빌려간 돈은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50% 가까이 되는 이자가 붙어 황사장의 손에 되돌아 왔다.


그들은 그런 급전을 돌리는 건수가 많이 있다며 매번 은행에서 돈을 찾아 빌려주는 게 앞으로 번거로울 테니 은행에 당좌구좌를 트고 수표를 발행하는 게 편리하다고 황사장을 꼬드겼다. 황사장은 그들의 제안대로 당좌구좌를 트고 끊어준 천만원짜리 당좌수표가 며칠 후 천 오백만원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그가 그런 짭짤한 돈놀이에 재미를 붙일 무렵 언제부턴가 결재일은 2-3일에서 일주일 정도로 늦어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들은 황사장 눈 앞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당시 이미 수십장의 당좌수표가 발행되어 있는 상태였고 그 중 십여장은 액면가가 2-3천만원이 되는 큰 금액이었다. 그 총액은 황사장의 전 재산과 맞먹었다.


나이를 먹고 공장 사장이 되어 보람을 느끼면서도 아직 20대 시절의 순박함을 지니고 있던 황사장은 탁월한 팀웍을 연출한 수표사기단에게 그렇게 한 방을 얻어 맞고 바닥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단 황사장의 돈 뿐만이 아니라 그가 느끼던 보람과 유일한 삶의 희망마저 사기쳐 해먹고 사라진 것이다. 그날 밤 그는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다.


부도난 것이 알려져 다른 채권자들이 달려 오기 전에 밤새 공장에서 우리 기계들을 챙겨야 했던 우리들을 뒤로 하며 공장을 떠나던 황사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항상 그의 척추를 찍어 누르듯 엄습하던 고통 위에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짓밟히고 만 고통에 그는 자신이 일군 공장이나 가까웠던 사람들, 심지어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이미 아무런 미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참담한 심경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부도를 막지 못해 공장을 떠난 황사장이 도피한 곳은 서울의 보훈병원이었다. 그날 밤부터 그는 다시 모르핀에 찌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사기단을 소개해 주었던 주거래은행의 담당차장이 공장을 인수하고 공장 직원들에게 은행직원들이나 만들 수 있을 법한 복잡한 경리자료의 작성을 요구하면서 마치 부업을 하듯 운영하던 충주공장은 그 후 당연히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들은 그 만큼 절박하지도 않고 이니셔티브도 없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대개 친구들과 사냥을 다니고 갓잡은 멧돼지 목줄에 빨대를 끼우고 얼굴에 개기름을 번쩍이며 피를 빨곤 하던 그는 마치 밑천 안들인 도박판에서 쉽게 손털고 일어나는 것처럼 너무 쉽게 공장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보통 봉제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이라면 피눈물을 흘려야 할 공장폐쇄를 그는 너무나 캐주얼하게 결정하고 그렇게 통보해 오는 모습에서 황사장의 부동산 담보를 가지고 있던 은행의 담당차장이 공장을 그렇게 인수하던 그때부터 모종의 야료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공장의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윤과장도 다시 실업자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중에 거래공장을 인천 간석동으로 옮기고 나서 한번 찾아가 보았던 보훈병원에서 황사장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광기 가득한 눈을 번득이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빠르게 지껄일 뿐이었다. 그는 충주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여위었고 앙상한 팔목에는 파란 정맥이 튀어나올 듯 드러나 보였다. 얼마 길지도 않았던 그 대면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제 다시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가 아직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선의의 시도였을 충주공장이 그렇게 막을 내린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람들 심장에 직접 비수를 꽂는 것 보다 더 처참하게 사람을 말려 죽이곤 하는 사기꾼들은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을 증오로 들끓게 한다.


그 사기꾼들의 달콤한 말 뒤에 숨어 있었을 시퍼런 칼날들은 총장공관에서 그의 척추에 박혀버린 총탄처럼 살아 있는 날 내내 그의 심장을 매일 후벼냈을 것이다.


사기꾼들의 법정형량이 왜 살인범보다 적은지 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논설우원 Don S. Bay ( donsbay@thrunet.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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