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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1.2.월

딴지 정치교육부



우리가 외환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던 작년 10월, 프랑스에서는 <모리스 파퐁>이란 사람이 <비시정권>하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이 재판은 프랑스 사회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왜...
<비시정권>은 뭐고...
<모리스 파퐁>이란 자는 왜 재판을 받았고...
프랑스는 왜 그 재판으로 술렁였는가...





1940년, 히틀러의 군대는 난공불락으로 믿었던 마지노를 무너뜨리며, 단 6주만에 프랑스의 심장, 파리를 점령해 버렸다.


혼비백산 도망간 당시 프랑스 내각은 외국으로  정부를 옮겨 계속 싸우자는 <레이노> 수상 중심의 주전파와 이미 전세는 기울었으니 패배를 인정하고 휴전을 해야한다는 <페당> 부수상 중심의 휴전파가 맞섰다.


이 대립에서 결국 휴전파가 이기면서 페당이 수상에 취임한다. 


페당은 취임 즉시 휴전을 선포하였고, 점령군 나치와 타협하여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 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한 곳이 바로 남부 프랑스의 도시, <비시>였다. 2차대전이 끝날때까지 향후 4년간 프랑스에서 지속된 <비시정권>은 그렇게 탄생했다.


4년후 프랑스인에 의해 전면 부정되었던 이 비시정권은 기실 합법적인 것이었다. 점령군이 강제로 수상을 임명한 것도 아니고, 파리가 함락되자 프랑스인들이 스스로 새로운 수상을 세우고 헌법을 준수하며 탄생한 정권이었으며, 또 그 권위아래 휴전협정까지 맺었다.







진격하는 독일군을 바라보는  파리지앵...


또한 페당이 주장한대로 어차피 져버린 전쟁, 끝까지 싸워서 국가를 완전 피폐하게 만드는 것보다 휴전협정을 맺는 것이 물적, 인적 피해는 훨씬 적었던 것도 그것만 떼놓고 본다면 분명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 프랑스 상황과 페당쪽의 주장을 가만 보다보면, 몇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될 당시의 상황과 또 그때 이완용이 펼친 논리와 기본적으로 그 맥이 통한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드골에 의해 민족의 배신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던 페당은 이런 나름대로 어쩔수 없었다는 <상황론>에 기대어 이렇게 자신을 변호했다한다.



" 나는 프랑스를 최악으로부터 보호했다... 만약 내가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방패라도 되려고 했다... "


즉, 프랑스 바깥에서 드골이 프랑스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며 프랑스의 <칼>이 되었다면, 자기는 프랑스 내부에서 점령군의 요구에 대항하며, 점령군과 프랑스 국민 사이에서 일반국민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다는 논리였다.


그러니까 독일의 유태인 학살에 동조하고 독일이 각종 프랑스 물자나 프랑스인을 징용, 징발하도록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또 레지스탕스를 탄압했던 것도 전부 보다 많은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으며 불가피한 <협력>이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협력의 대열에는 유명한 문인작가들, 정치인들, 언론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점령군 독일보다 더 강한 어조로 독일과의 <협력>을 촉구했다.


전혀 낯설지 않은 논리이며 풍경이다.


그러나...







파리를 되찾은 날 샹젤리제를 행진하는 드골과 시민들...


제법 그럴듯한 이 <상황론>은, 비시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영국에서 <자유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던 드골과 조용히 숨 죽이고 있던 프랑스국민에 의해 독일 패전과 동시에 박살난다.


가장 먼저 프랑스의 모든 경찰서장이 해임되었고, 그 중 5명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또한 비시정권에 협조했던 수백명의 판사가 처벌되었으며,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경제인들은 그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 외에도 군인, 외교관, 언론인, 문인, 그리고 교육자... 등 어떤 형태로든 <협력>했던 모든 계층은 집요하게 색출당해 처벌되었다.





그럼 왜 <모리스 파퐁>이 1940년대가 아니고 1990년대에 재판정에 섰느냐...


이 재판은, 그가 비시정권하에서 비인도적 행위를 했던 것이 발각되면서 비롯되었다. 파리경찰청장 등 공직을 거쳤던 <모리스 파퐁>은 점령 독일군에 협조하여 프랑스내의 유태인 추방에 관한 서류에 서명을 했고, 그 서류가 30여년이 지난 다음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버린 프랑스는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를 가차없이 재판정에 세웠다.


이 재판은 유태인 대량학살에 당시 프랑스는 도움을 준 적이 없고, 모든 잘못은 독일에게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던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뭉게며 프랑스를 온통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는 자존심 강한 그들이 불과 몇 십년전 그들 선배가 나치에 협력하면서 인권을 유린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을게다.


그들은 " 우리는 아직도 과거를 정면으로 응시해 심판받을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 않은 것인가.. " 라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이 법정에는 고등학생들이 방청객으로 나와 있었다 한다. 역사수업의 현장으로..





지난 14일 이화여대에서는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내년부터 여성의 지위향상에 공헌한 사람에게 상과 상금(내국인:5천만원 /외국인 5만달러)을 수여하는 <우월 김활란상>을 제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상과 함께 그를 기리는 전시회와 세미나, 음악회 등을 열고 기금도 조성할 방침이라고 한다.


훌륭한 일을 한 사람에게 상과 상금을 준단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김활란 박사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이화여대에서는 그 이름을 딴 상까지 제정한다는 것인가.







최초의 단발머리..


70년대 계몽사에서 나온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집"에는 김활란 박사가 일제에 항거하고 또 고문까지 당한 독립투사로 묘사되어 있다. 몇 년 전에는 그의 생을 만화로 기록한 <김활란 선생님 그림전기>라는 책(임수 글,그림/루디아선교회)도 나왔다.


그는 위인 급에 해당하는 사람인 것이다.


왜?


그는 우리나라 여성박사 1호이자, 이화여대 총장이었으며, YWCA 뿐 아니라 각종 여성단체의 창립자이고, 유엔총회와 유네스코의 한국대표였으며, 한국일보가 인수해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창간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단발머리를 했던 신여성이었다.


그의 후배이자,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제1회 졸업생이며 한국최초의 여성주필로 한국일보의 이사이기도한 장명수 주필은 " 여자여, 배우자, 세계로 가자 ... "라는 글에서 김활란 박사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 여자를 차별하는 뿌리 깊은 인습, 폐교를 위협하는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며 그는 여성의 인간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찬 비바람도 그가 높이 든 두 개의 깃발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여성 교육을 함께 전도했다... "


분명 위인 급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지도자로 결코 손색이 없다.


 


그런데, 김활란 박사에게는 이런 알려진 업적 이외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업적도 있다. 바로 친일매국행각이다.


친일... 사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참 식상한 것이다. 끊임없이 거론되지만 한번도 우리사회에서 제대로 심판받은 적이 없기에 또 그 이야기냐... 라는 심정에서 그러하기도 하거니와, 그 당시에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불가피했다는 <상황론>이 알게 모르게 우리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다.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비시정권하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단죄하는 과정에서 7천명이 넘는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4만명이 넘는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40년간이나 일제하에서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들이 무수했지만, 그 <협력>으로 사형선고는 커녕 단 한명도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다시 친일행각이니 친일파니 해봐야 먹고 살기도 바쁜 요즘 사람들의 피부에 깊숙히 와 닿지 않는 건 물론이요, 어째 어색하기까지 한 것 같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여, 당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것을 백프로 인정한다하더라도, 적어도 김활란 박사가 했던 행위는 그 <어느 정도>를 넘어섰으며, 더구나 이런 과거의 부끄러운 행적을 덮어버리고 오히려 그를 기리는 상까지 제정한다는데 이르러서는...


드디어 본지 빡돌아 버리는 것이다. 여태 앉아서 차분한 목소리로 지껄이다가,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벌떡 일어나 게거품 물고 하늘을 향해 졸라 짖어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왜... 


그가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고, 또 그 단체를 통해 혹은 방송, 강연등을 통해 일제침략을 미화하며 내선일체에 적극동참했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고스란히 선전한 매국행위들을 끊임없이 했던 것은, 당시 여성계몽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방패>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했던 <협력> - 사실 그의 <협력>은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협력>수준이 아니라 일제에 <충성>이라고 불러야 마땅했지만 - 이라고 졸라 억지로 이해해보기로 하자.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한 다음해인 1942년 일본의 전면적인 조선인징병을 독려하고 남편과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여성들을 설득하는 연설과 글을 남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매국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른다.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죽으러 끌려가는 젊은이들 등을 떠밀며



"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른 감격이 왔다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세대. 1942년 12월호) "


라고 씨불였다. 이뿐 아니다. 기가 탁 막히게 하는 연설과 글이 많다. 독자여러분들이 직접, 반드시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 참고 : 반민특위 사이트 )


이쯤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가 아무리 많은 업적을 세웠어도 민족과 맞바꿀 수는 없다. 그의 업적을 깍아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과오를 덮어버리려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모리스 파퐁>은 독일군에 협력하여 이민족인 유태인을 수용소로 보내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고 수십년이 지난 후 비인도적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김활란박사는 <서명> 정도라 아니라 같은 민족인 우리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일장연설과 감격어린 문장들을 스스로 그렇게 많이 토해내고도 재판은 커녕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지도자로 최고의 명예를 누리다 갔다. 그렇게 자기 민족을 배신했던 자가 계속해서 사회지도층으로 행세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쪽 팔린다. 그런데 프랑스처럼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그 죄과가 밝혀지면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예 그를 기리기 위해 상을 제정한다고 한다.


이게 정상인 나라인가.


이런 것이 바로 제대로 역사를 청산해내지 못한 민족이 짊어져야 하는 조가튼 현실이다. 사실 우리는 일본이 교과서를 통해 역사왜곡한다고 열내고 지랄할 자격도 없다. 우리 꼬라지가 이런 데 누굴보다 탓을 하겠는가.


이런 지적에 이화여대는 물론 꿈쩍도 안한다. 좃선일보 같은 데서는 이런 기사 안 다룬다. 왜? 지들도 그에 못지 않은 과거가 있으니까.





지난 프랑스 월드컵 때, 경찰이 사망하는 등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훌리건 난동. 이들 영국의 훌리건은 자신들을 진압하려는 프랑스 경찰들과 대치하며 프랑스 경찰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들은 지난 2차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비시정권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먹이며 프랑스 경찰들을 조롱했다. 40년이나 지난 후, 이웃나라 난동꾼들이 말이다.


이화여대여..


이 나라 여성 교육의 산실이라고 자부하는 이화여대여. 지나간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같은 실수를 다시 해선 안되지 않겠는가. 김활란 상 제정을 반대하는 것이 그대들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그런 역사인식으로 이 나라 교육을 말하는가.


그대들은 들리지 않는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퍼붓는 역사의 야유가..


 


씨바 제발 귀꾸녕을 열어라.



 


- 딴지 정치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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