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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자신을 속이지 않은 자의 죄


2009.6.1.월요일



불어권의 숱한 작가들 중, 까뮈처럼 단단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를 또 볼 수 있을까. 저널리스트로 고국인 알제리의 독립을 도모하는 신문 꽁바에서 활동한 그는 군더더기 없는 기사문에 가까운 문체로 첫 소설인 <이방인>을 써냈다. 프랑스 대학에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프루스트처럼 끝없이 이어가며 생각하되 답안 작성은 까뮈처럼 하라고 말한다. 이해가기 쉬운 간결한 문장을 쓰는 것을 권유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견고하고 선명한 문장은 힘이 세다.


5월 23일, 소르본의 대형강의실에서 렉쳐수업을 듣는 토요일이었다. 파업으로 두 주 넘게 늦춰진 학기말 시험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답안지를 제출하는 나에게 노교수는 한국의 대통령이 등산 중에 죽었다, 라고 했다. 4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답안을 작성한 뒤였다. 며칠째 제대로 잘 여유가 없어서 귀가 멍멍했다. 펜을 쥐는 오른 손 검지손가락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북한과 남한을 종종 헷갈려 하는 교수였으므로 어느 쪽인지 다시 물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전 대통령, 이라는 답이 들려왔다. 밤새 들이킨 에스프레소의 카페인이 뒤늦게 작용하는지,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집에 들어서자 마자 텔레비전을 틀었다. 평양에 방문한 2007년의 영상들이 쏟아졌다. 한때 서울에서 흔하게 보며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들이었다. 빠른 불어 발음으로 앵커는 남북관계의 긴장완화에 기여한, 판문점을 처음으로 통과한 대통령인 그의 행적을 훑었다. 판문점을 지나치며 환하게 웃던 2007년의 그는 낯설었다. 이어서 취임이후의 영상들이 쏟아졌다. 희미한 기시감이 어린 뉴스 장면에 자살이라는 자막이 겹쳐 기묘한 괴리를 이루었다. 다다이즘부터 누보로망(소설)과 누보 떼아트르(연극)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면서도 한번도 느끼지 못한 초현실적인 이질감이었다.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포털의 메인화면에는 담배 있느냐, 라는 마지막 대화가 헤드라인으로 올라와 있었다.


5월 25일을 기점으로 빠리 15구 재불 한인회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29일까지 250여명이 다녀갔다. 분향을 하기 위해 수업이 끝나고 한번도 찾지 않던 건물을 찾아 바쁘게 걸었다. 문밖까지 이어져 길로 나온 줄 속에서, 방명록의 페이지에서 드문드문 프랑스인들과 불어를 발견하기도 했다. 성심껏 자발적으로 분향소의 일을 돕는 분들은 그곳에도 있었다. 인적사항을 자세히 적어야 하는 방명록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대사관에 설치된 분향소에 분향한 인원을 합친다면 250명이라는 숫자는 배가 될 것이다. 수북히 쌓인 국화더미에 한 송이의 흰 국화를 올렸다. 향을 사르고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했다. 좋은 곳으로 가시라. 코끝에 향 연기가 와닿았고 콧등이 아려왔다. 빠리는 단순히 환율만으로도 그의 시절이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몰렸을 것이라는 평가가 대체적이었다.


기만과 반항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죽인 뫼르소는 과연 유죄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한 학기를 온전히 할애했었다. 매주 발표와 토론을 하며 학기가 끝날 때쯤 나는 뫼르소의 편이 되어 있었다. 까뮈는 그가 살고 있는 삶과 그의 존재가 분리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신을 속이면서 우리의 존재는 삶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속이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저지르는 일입니다. 삶이 간단해 지니까 모두가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속이면서 여러 얼굴을 가집니다. 그러나 뫼르소는 모두가 다 하고 있는 이 기만을 거부하고 가면을 쓰려고 들지 않아요. 그래서 그는 이방인입니다. 고립되고 말지요. 그는 온몸으로 부조리와 맞섭니다. 이런 그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조리함, 인간의 삶과 이성의 분리는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실존의 조건이며 한계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몸으로 반항했으며 결국 주어진 죽음을 오롯이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예수의 이미지를 찾을 수도 있겠지요. (중략) 작가로서 나에게 그는 가엾고도 딱한, 그저 햇빛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뫼르소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는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처럼, 장황한 연설을 펼쳤다. 어머니가 죽은 날에 충분히 울지 않은 뫼르소는 이미 그들에게 괴물이고 짐승이었다. 칼을 늘 들고 다녔던 아랍인은 선량한 한 가정의 아버지로 둔갑해있었다. 뫼르소의 행적을 되짚으며 그의 비인간성을 비난하는 변호사는 고대 그리스연극에서처럼, 이미 타인에게까지 마스크를 씌워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다. 그 누가 가면을 쓰지 않으며 살아왔는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살아온 자만이 뫼르소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늘 무릎 꿇어온 우리 중 과연 누가 떳떳한가. 가면을 쓰지 않은 떳떳한 자여, 당신은 뫼르소를 비난할 수 있다. 그가 유죄라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 죄인이다. 라고 에세이를 끝냈다.

더러운 손과 순수

사르트르의 희곡 <더러운 손>의 에드레르의 말대로, 순수함은 수도사와 승려에게나 주어지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순수에 집착하는, 팔짱을 끼고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장갑을 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텔리와 부르주아, 아나키스트들을 이상에 사로잡힌 무력한 존재들로 규정했다. 팔꿈치까지 오물 속에 집어넣고 더러운 손을 했다고, 결백하고 투명한 정치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효과만 좋다면 뭐 어떻느냐고 덧붙이면서.

우리 곁에서 이제는 사라진 그가 투명함과 순수함을 추구했던 것은, -팔꿈치까지 오물 속에 집어 넣고 더러운 손을 한 채로도- 무엇이었나. 그저 불가능을 바란 어리석음이었을까?


비비씨와 르몽드에 올라온 사진들을 훑어본다. 닿지 않는 대륙의 끝에서 지나간 순간들이 펼쳐진다. 눈물과 통곡과 노란빛깔들. 잠깐의 야유와 방패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가 담긴 사진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촛불을 들고 고개를 수그린 마지막 사진,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평화롭게 추모했다 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단단하고 간결한 것은 힘이 세다. 출간 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불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 외국인 학생에게도 <이방인>의 문장들은 여전히 유효하듯이. 나에게 그는 가엾고도 딱한, 그저 약한 자들을 사랑한 사람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평생을 살아온 자의 죄라면 더러운 손을 하고도 순수하고 투명하기를 바랬던 그의 바람일 것이다. 제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손을 뻗치기는 커녕 팔짱을 끼고 무관심이라는 장갑을 끼고 있던 우리는 모두 유죄다.


 


나나 mllenahu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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