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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고향 대구

2009-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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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고향 대구

 

2009.8.11.화요일

 

프롤로그

 

"야, 우리 집 이민 갈찌도 모린다"

 

"와"

 

"김대중이 대통령 되믄, 아부지가 이민 간다 카드라"

 

제 15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평소처럼 쌀쌀했던 새벽녘의 등교길. 내 친구가 나에게 던진 화두였다. (참고로 와란 표준어로 왜라는 의미이다)

 

 

나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대륙간컵 0-5의 감동, 밀려오네 불패신화가 유일하게 무너진 약속의 땅, 초등학교 시절 여름날 일시적으로 기온이 39.6도 까지 올라갔던 살기 좋은 내 고장, 대구.

 

대구에서 자라서 대학 문턱까지 밟아본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피곤한 일이었다. 뭐, 우리사는 시절이 다 그렇지만.

 

여담이지만, 저때 이민 간다고 하던 내 친구는 아직 대구에서 잘 살고 있다. 이민은 무슨...

 

 사투리와 외국어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 부터 영어를, 고등학교 1학년때 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이정도면 내 또래 치고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첫 외국어는, 초등학교 3학년때 국어 시간에 접한 그 언어였다. 바로

 

<표준어>

 

"선생님이 지금부터 표준어로 이야기를 하겠어요"

 

라고 운을 뗀 담임 선생님의, 그 차마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아침에 서울우유 20통을 들이마신 것 같은 느끼한 억양과 단어들... 나와 내 짝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참으며 속닥일 수 밖에 없었다.

 

"야, (선생님을 턱짓하며) 뭐라카노?(뭐라는 거야?)"

 

"몰겠다. 머라 카는거 같네(뭐라고 하는거 같네)"

 

뒤를 이은 선생님의 커밍아웃을 통해, 나는 우리들이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인 대구 사투리와, 교양있는 현대 서울인들이 사용하시는 고상한 표준어가 다른 언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애써 에두른 표현으로 조금 많이 다르죠?라는 식의 물타기를 시도했으나, 나와 내 학우들에게 그것은 토종한국인이 케네디공항에 내렸을때 느끼는 컬쳐쇼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담임선생님의 표준어가 심하게 서툴렀다는 점도 한 원인이긴 하지만, 여튼 그랬다. 우리들에게 힘들여 표준어 신공을 시전하시던 담임 선생님도, 5분후엔 제풀에 지쳐 우얐든동간에, 서울말도 쓸 줄 알아야 된다. 알긋제?라고 하시며 평소 말투로 돌아오시는 것을 보며, 우리는 어른들도 거짓말을 한다는 냉혹한 진실에 몸서리쳤다.

 

그날 이후, 난 엄기영 (당시) 앵커의 9시 뉴스와 그 뉴스에 대해 토론하는 동네 어른들의 언어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그냥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장된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방에서 나고자란 아이들은 거의 두가지 언어를 동시에 습득하는 수준으로 사투리와 표준어를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거의 처음으로 습득한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웠다. 한국이라는 좁아터진 나라에서도, 사용하는 언어는 상황에 따라 변해야 했다.

 

 보수의 땅

 

 

당시엔 니 이불에 오줌을 싸라라는 전기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 일선 교사들이 그 역할을 충분히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12년간의 공교육 동안, 박정희는 신이었고,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고 육영수 여사는 비운의 국모였으며, 북한군은 사람의 옷을 입고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늑대였다. 한국은 위대한 나라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과 북한의 방해를 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전락한 저주받은 천재같은 존재였다. 북한과 일본은 증오의 대상이었고, 만악의 근원이었다. 성장과 분배? 북한을 따돌리기 전에 분배를 이야기 하는 것은 빨갱이짓이라는 논리가 너무나도 잘 들어먹힌 탓인지, 북한과 확연한 경제적 격차가 발생하자 그 빈자리를 일본이 매웠다. 일본보다 잘 사는 그날이 올때 까지 우리는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허황된 논리가 교실을 매우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주변 어른들을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는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였다. 당시 나에게 만원의 행복이란, 주변 어른들이 전두환의 치세를 회상할때 쓰던 에피소드였다. 그땐 물가가 참 쌌어. 만원만 있으면 두 명이서 영화를 보고 커피도 한 잔 하고도 집에 갈 버스 값이 남던 시절이었거든. 새마을 운동은 활기와 패기의 상징이었다. 그땐 하면 된다라는 신념이 있었어. 요즘은 뭐... 나라가 어떻게 돌아갈려고. 육영수 여사(개인적인 감정은 없다만)의 장례를 회상하며, 어른들은 그때 할머니들이 길에서 국모가 돌아가셨다고 울고불고... 참 난리도 아니었지.

 

통행금지로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곤 밤에 거리도 맘대로 못 걷던 시절이, 데이트를 위해 최적화된 시절처럼 회상되고, 파란 페인트칠은 선이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부인으로 퍼스트 레이디의 영전 이외에 아무런 권한도 의무도 주어지지 않은 영부인이 국모가 되어버리는 고장에서, 내가 올인코리아(심심하면 한 번 놀러가 보시라. 재미있는 유머 사이트다) 애독자로 성장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몇가지 우연의 결과였다.

 

 진실

 

6.25 전쟁에 대해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난 고등학교때 처음으로 이승만의 서울사수 방송을 알게된다. 자기는 살겠다고 대전으로 튀면서 곧 적을 물리칠테니 안심하라는 말을 녹음해 라디오로 틀어놓고 도망친 인간. 서울 시민들을 볼모로 한 목숨 부지하려든 초대 대통령. 어라? 국부니 뭐니 하더니만?

 

그때, 나도 모르게 사투리와 표준어에 관한 오래 전 추억을 회상하고 말았다. 내가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이던 것이,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거짓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때 처음으로 불붙게 된다. 5.18을 알게되고, 인혁당사건을 알게되고, 박정희의 관동군 복무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한민국과 내가 믿어왔던 대한민국이 너무나도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대한민국의 소위 수구 세력에 대한 경멸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김대중이라는 정치가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뭐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든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어이없는 캐치프레이즈가 거의 프로파간다 수준으로 유포되기 전, 대구는 이미 그와 비슷한 책임 전가 대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즈음부터 내 또래 몇몇 아이들은 책과 인터넷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구분하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국보법에 위반될만한 주체사상에 전도된 것도 아니고(난 살면서 아직 단 한명의 주사파도 만나보지 못했다. 교우관계가 좁아서 그런가?), 지하실에 모여 체제전복을 시도한 것도 아니다. 아, 딴지는 그때부터 좀 읽었군. 6.25 전쟁 당시의 양민학살사도 읽었고, 한겨레 신문도 읽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읽은 것은 세계사에 관한 책이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 남아있던 유일한 힘은, 역사적인 진실과 개인적인 해석을 구분하려는 이성이었다.

 

박정희가 진정으로 민중을 생각하는 지도자였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야 했나(물론 공식적인 국가살인의 수치는 몇 명 안된다만). 왜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을 통제해야 했을까. 답은 언제나 문제 안에 있다. 숨겨야 할 사실이 있으니 언론의 입을 막은 거였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지도자라면, 왜 비판 앞에 당당하지 못했나. 그 정도 사실을 생각해 볼 여유가, 그 당시 우리들에겐 아직 남아있었던 것 같다.

 

우리들 -또래 세대들 가운데 과연 어느 정도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에게 김대중은 그런 내 머리로 생각해 보자라는 화두에 가장 큰 도전장을 들이미는 존재였다. 어른들은 그를 싫어했다. 김대중씨가 전라도에서 지지를 받는 것이 대구 사람들의 아침 밥상에서 국그릇을 뺏아가는 일이 아닐진데, 왜 그들은 주는 것 없이 저 사람을 미워하나. 호기심은 언제나 70%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매년 노벨평화상 수상이 거론되던 한국인. 민주화의 상징. 인동초. 활자로 전해지는 그 수많은 정보들과 주변 어른들이 그에 대해 품고있는 증오와의 괴리.

 

사투리와 표준어라는 내 처세술(?)은 이때도 유효하게 작용했다. 난 한국 현대사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내 고장 대구가 약간(아주 약간) 특수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내가 대구에서 살면서 맘속으로(아직 투표권이 없었으니)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 안기부로 끌려갈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15대 대선 다음날 나에게 이민 선언을 한 친구는, 스스로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부지가 이민가자 카더라. 윗 세대의 생각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다음 세대로 전파된다. 온 가족이 식탁에서 박정희를 추모하는데,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교육이 어디에 있나. 말뚝선거, 우리가 남이가,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그리고 나와 친구 몇 명은, 몇 달 후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을 보았다. 그날따라 중국집이 참 조용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

 

몇 년 후, 유학생활을 하던 일본에서 나는 또다시 김대중을 만난다. 물론 직접 만난건 아니고,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활자를 통해 만난 거였다.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지는, 나가 본 사람들이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기억하는 김대중은 안타깝게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보다도 김대중 납치사건의 피해자로서이다. 씁슬한 일이긴 하지만, 자업자득이다. 하나 물어보자. 동남아시아의 어떤 나라에서 민주화 지도자가 독재정권의 암살기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서울로 망명을 왔다고 치자. 근데 서울 시내의 호텔에서 그 민주화 지도자가 자국 정보부원에게 납치되어 자국으로 끌려갔다면, 그 나라를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일본인들에겐 아직도 김대중은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한국 정보부원들에게 납치되어, 배에 태워져 현해탄에 빠질 뻔 한 상황에서 일본 해상자위대가 조명탄을 쏘는 등 위협하자 겨우 암살될 위기를 면하고 부산으로 끌려간 훗날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1등 서기관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알게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를 발동한다. 호의가 가지 않는 인물이라는 비교적 온화한 설명이 붙는 이 외교용어는, 사실 무진장 쪽팔리는 이야기이다.

 

알다시피, 외교관은 주재국에서 체포를 당하지 않을 특권과 같은 많은 특권을 보유한다. 이거, 말이 좋아 특권이지 어이가 없는 이야기다. 외교관에 대해서는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그러니, 이런 체포를 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인격과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만약에 외교관이 그 지위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라면, 이 인간을 우리나라에 외교관 자격으로 두고 싶지 않으니, 도로 데리고 가라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권한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게 페르소나 논 그라타다.

 

김동운은 일본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를 발동한 첫번째 외교관이고,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니네 외교관 못 믿겠으니 도로 데려가쇼라는 빠꾸를 먹은 첫번째 나라로 기억되게 된다. 참고로, 일본은 2006년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두번째 페르소나 논 그라타를 발동할 때 까지,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2009년 현재, 일본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를 발동한 외교관은 총 세명 있다. 첫번째는 대한민국의 김동운. 두번째는 코트디부아르의 외교관으로 이 친구는 자기 집을 조직폭력배의 도박장으로 빌려줬다가 걸렸다. 세번째는 인도 대사관의 경비 담당관으로, 비자 신청하러 온 아가씨 성추행하다 걸린거다.

 

참 자랑스럽지 않냐?

 

 다시, 대구.

 

머리에 피가 살짝 마를만한 나이가 되어, 나는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사실 톡까놓고 이야기 해서, 이제 진정으로 지역감정을 이야기하고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하는 2,30대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토익과 토플에 시달리고 공모전이라도 하나 입상해야 밥을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은 88만원 세대에게, 지역감정과 정치적 이념은 사치 비슷한 것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한국사 바로보기가 대기업 면접에서 거론되지 않는 이상, 박정희와 전두환 따위 과거의 인물일 뿐인, 그저 나 잘먹고 잘살자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목도하는 듯 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세대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에겐 여전히 6월항쟁은 빵과 우유를 나눠준다니 멋모르고 따라간 대학생들이, 주동 세력의 스크램에 말려서 우연히 행진 끝날때 까지 걸을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었고, 근혜 누님은 연약한 몸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철의 여인 이었으며, 박정희는 여전히 연설녹음만 틀어놓아도 공원에 인파가 몰려드는 존재였다.

 

노무현이 탄핵되던 날. 난 펜을 집어던지고 시내로 나섰다. 대구에서 시내라고 하면 한일극장 앞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찰이 대폭 인원수를 줄여 발표하지 않아도 될만한 인파를 목격하고, 그냥 탄핵 반대 몇 번 소리만 지르다 인근 호프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경이 투입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시위 규모를 보며, 할 말 다 했다는 심정이었다. 그날 술잔을 기울이며, 일본에서 친구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치는 참 후져. 그지? ... 그래도 한국은 정권교체는 한 번 해 봤어. 일본보다 나아. ...정말 그럴까?

 

이런 대구에 살면서, 김대중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자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박정희가 독재자가 아니면, 왜 굳이 외국까지 나가있던 정적을 일일이 잡아 죽이려 들었을까. 그렇게 해서 까지 제거해야 할 만큼 독재자를 위협했던 인물이, 우리 대신에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이룩하려 했던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국그릇 빵 몇 조각 이전의 문제인,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권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정치가에게, 대구는 과연 무엇을 해 주었나.

 

일본에서 근근히 밥을 먹고 사는 나에게, 그래도 한국은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해 본 적이 있다라는, 참 코미디에 가까운 마지막 자존심을 허락해 준 사람. 대구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이제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닐까 한다. 아직 우리들에게 그럴 자격이 남아있는 동안.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