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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제곱] 정말로 환경 탓인가요?

 

2009.8.11.화요일

 

신문 사회면을 보면 이른바 범죄자들의 배경이라는 것이 나온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어렸을 때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쩌고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설명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나는 여기에 개인적으로 불만을 느낀다. 왜 그들이 잘못된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말하는 것인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면 누구나 그렇게 범죄자가 되는 게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 충분히 사랑을 받고 좋은 교육을 받으면 잘 될 확률이 더 높기는 하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모두 다 나쁜 사람 혹은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내 불우한 환경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얘기이다. 세상 누구보다 더 불행했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결코 불행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보다 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기에 나는 감히 여기에 내 불우한 환경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소위 노가다를 한다. 다들 안 되면 어디 가서 노가다라도 하라고 하는 그 노가다가 바로 내 아버지의 직업이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직업이 참 창피했었다. 언제나 땀에 절고 햇볕에 그을려 새카만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볼 때 마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는 여느 친구들의 아버지가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한국에서 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산업역군이 되어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먼 나라의 건설 현장으로 가셨다. 나는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더운 나라에서 모랫바람 맞으면서 아버지는 아파트를 짓고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거기서 번 돈으로 꼬박꼬박 우리 가족에게 송금을 하셨다. 그런데 사단이 나려고 그랬는지 그 사이에 어머니가 바람이 나셨다.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모든 걸 다 용서하겠다며 가정을 지켜달라고 했지만 한번 마음이 돌아선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소위 결손가정의 아이가 되었다.

 

만약 아버지가 바람이 났다면 그건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가 바람이 나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내가 듣건 말건 화냥년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내 어머니를 욕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 키운다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장만한 아파트를 가져갔다. 그러나 어머니가 바람이 난 그 남자는 아주 몹쓸 인간이었다. 밤이면 밤마다 어머니를 그야말로 개 패듯 두들겨 패고 우리 형제들도 그 폭력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거의 매일 피를 흘리며 동생들과 함께 맨발로 쫓겨나서 경찰서를 찾아야 했었다. 그는 엄마와 우리를 죽이겠다며 식칼을 들고 덤볐고 그 폭력에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다. 솔직히 그때의 일은 떠올리는 것조차 참으로 괴롭다. 한밤중에 우는 동생들의 손을 잡고 불 꺼진 이웃들의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그것도 안 되면 파출소까지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사실상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경찰들은 이런 부부싸움까지 우리가 일일이 쫒아 다녀야 하냐며 귀찮아했었다. 그 당시에는 매 맞는 아내 같은 건 아주 흔한 일이었고 가정 폭력은 어디까지나 가정 안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공권력이 개입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에게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아직까지도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새엄마였다. 동화책을 보면 신데렐라도 그렇고 콩쥐팥쥐도 그렇고 나쁜 계모가 등장한다. 그녀는 그런 계모들에게 한 치도 뒤지지 않는 계모였다. 형제들과 나는 조그만 쪽방을 얻어서 함께 살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학교를 다니고 식사와 빨래를 해결해야 했다. 말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거지 그냥 우리끼리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 나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고 동생들은 훨씬 어렸었다. 계모는 우리에게 드는 돈이 아까워서 겨울이면 연탄을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툭하면 냉방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잠을 자야 했고 가끔 계모가 기분이 나쁘면 쌀을 살 돈마저 주지 않았다. 우리는 배가 너무 고팠다. 한참 자라나는 시기였기 때문에 계모가 주는 돈으로는 우리의 먹성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동네 슈퍼에 외상을 하며 다녔었다. 한번은 외상이 너무 많이 밀려서 슈퍼 주인들이 계모를 찾아가서 따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생들과 나는 죽지 않을 만큼 맞았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외상질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 우리는 과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과자 외상을 했던 것이었다. 라면을 외상 하지 못한 것은 라면을 끓여 먹을 만한 연탄을 계모가 잘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사는 셋방에 월세도 툭하면 늦게 줘서 우리는 늘 주인아줌마와 아저씨를 피해 다녀야 했다. 학교에서 내라는 돈도 그녀는 잘 주지 않았다. 도시락도 거의 못 싸서 다니고 늘 입던 옷만 입고 다니는 우리들은 학교에서도 왕따였다. 그 무렵 나는 참다못해 친엄마를 찾아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재혼을 하고 난 이후여서 우리가 찾아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절들을 굶어죽지 않고 버텼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품을 것이다. 친아버지가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지만 무능한 가장에 심성만 여렸던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바람막이도 되어주지 못했다. 우리가 굶기를 밥 먹듯이 해도 학교에 돈을 못 내서 선생님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석을 해도 이미 어머니가 바람 난 이후 술에 의지해서 살기 시작한 아버지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없던 폭력을 휘두르며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계모는 느닷없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라고 했다. 공부를 썩 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인문계 고등학교는 충분히 들어갈 실력이었지만 계모는 나를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 야간을 다니면서 낮에는 계모의 친척 공장에서 경리일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낮에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제일 부러웠다. 쟤들은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렇게 사나 싶고 나는 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는 게 이렇게 날마다 형벌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월급을 타면 동생들에게 뭔가를 사 먹일 수도 있고 필요한 생필품을 살수도 있다는 생각에 처음 한 달은 괜찮았었다.

 

하지만 월급날이 되자 사장은 이미 계모가 내 월급을 가져갔다고 했다. 참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내게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습게도 팬티였다. 계모는 옷은 물론이고 속옷조차 제대로 사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 떨어지고 헤어진 팬티를 입고 다녀야 했다. 한창 스스로를 여자라고 느끼는 나이에 떨어진 팬티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보다 더 창피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면 나는 언제나 화장실에 가서 혼자 갈아입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가끔 내 서랍장에 가득한 팬티를 보면 꼭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나는 교통사고가 났었다. 앞 이빨이 부러질 만큼 얼굴을 크게 다쳤었는데 계모는 합의금을 받았지만 나를 입원시켜주지 않았었다. 이빨이 부러진 그날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잠을 자는데 얼마나 울었던지 귀에 눈물이 들어가서 설상가상으로 중이염까지 함께 걸렸었다. 아마 내 평생 가장 몸이 아팠었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말도 잘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왜냐면 앞 이빨 하나가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계모에게 아무리 울며 애원해도 그녀는 비싸다는 이유로 내 이빨을 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빨이 빠진 채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때 세 번째로 재혼을 한 어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우리와는 연락을 완전히 끊고 살았었는데 길을 가다가 딱 마주친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자가용을 몰고 있었다. 아마 결혼을 잘 한 듯 싶었다. 어머니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부터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을 하면 대학 등록금도 주고 내 이빨도 새로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고3 여름방학 이후였다. 당시 막 수능이 생겼기 때문에 대학을 가고 싶은 실업계 학생들은 무조건 학원을 다녀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내 내신 성적은 그야말로 최하위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 물고 공부를 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다기 보다는 정말로 이빨을 하고 싶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수능을 꽤 잘 봤다. 그래서 내신 성적이 완전히 엉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전문대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수능을 보던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싸 주는 도시락에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시험을 치르러 갔지만 나는 계모가 부러 알람을 꺼 버리는 바람에 허겁지겁 일어나서 편의점에서 우유와 빵을 사들고 시험장에 갔었다. 빠진 앞 이빨을 혀로 느끼면서 꼭 시험을 잘 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대학 첫 입학 등록금을 대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결코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대학생이 되었다. 물론 이빨도 새로 해 넣고. 어머니는 대학 첫 등록금은 줄 수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무작정 동생들을 데리고 나와 학교 근처에 조그마한 방을 얻어서 살았다. 그 전에도 집을 나오고 싶었지만 성인이 되지 않고 나오는 건 가출일 뿐, 그리고 가출의 말로는 지금보다 더 불행할 뿐이라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꾹 참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이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가출이 아닌 독립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의 그늘에 보호를 받지 않아도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으며 더불어 아이들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나의 독립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아이들과 나와 살며 학교를 다니면서 정말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었다. 아이들을 먹여야 했고 방세를 내고, 내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막말로 도둑질 빼고는 다 했다. 그 당시 여대생이었던 내가 가장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곳은 룸싸롱이었다. 그래서 나는 돈이 너무나 궁했던 겨울 방학동안 룸싸롱을 다녔었다. 집에서 조금 먼 곳이었는데 차비를 아끼느라 늘 걸어서 다녔었고 밤이면 역시 걸어서 집으로 왔었는데 그때까지 동생들은 자지 않고 까만 눈을 뜨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눈물이 마른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 그때 내 눈물은 거의 다 말랐을 것이다.

 

방학이 끝날 즈음 나의 룸싸롱 아르바이트도 끝이 났다. 마음속으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정말이지 학교를 다니면서도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한번 물이 들면 절대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잘 먹이고 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나는 내 자신을 그렇게 잃고 싶지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고 취직을 했으며 아이들의 학교 공부도 시킬 수 있었다. 물론 늘 어려웠다. 세상은 단 한 번도 내게 거저 무언가를 주지 않았고 가끔은 내일 아침에 영원히 눈을 뜨지 않고 이대로 계속 잠들었으면 했었다. 어쩌면 내가 그런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는 살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그래서 내가 인생이랄지 삶이랄지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사람들이 말 하는 것처럼 빗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바람이 난 이후로 누군가 내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고 말 하고 싶다. 쟤는 빗나갈 것이라는 아니 빗나가고 말 것이라는 시선들이 정말로 힘들었다. 결손가정의 아이, 폭력가정의 아이, 더 나아가 형제들과 혼자 사는 어린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온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언제 엇나갈 것인지, 언제 내 인생을 패대기칠 것인지 팔짱을 끼고 두고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단 하나는 내가 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다잡는 것 이외에는 정말 할 것이 없었다. 빗나갈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불행한 아이들은 특유의 불행한 냄새를 피우는지 평범한 아이들에게는 오지 않는 나쁜 꼬임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달콤한 꼬임에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 꼬임에 넘어가 잠깐은 현실을 잊고 행복해질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고 어쩌면 꼬임에 넘어가기 전 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오리라는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우한 환경에 태어나 가장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면 부모도 없는 사람 혹은 날 때부터 큰 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나처럼 사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를 해서 내가 더 불우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내 인생이 꼭 나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을 읽으면서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범죄자들이 알고 보면 다 불쌍하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시선이었다. 그건 행복한 사람들, 진짜 불행이 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를 불쌍하게 보는 것이다. 그건 고마운 게 아니다. 그건 우리를 위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헤치는 일이나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건 폭력의 또 다른 승계일 뿐이다. 내가 불행하니까 너도 어디한번 불행해보라는 것은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말이 안 된다. 만약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아이가 범죄자들의 대부분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래 나도 나빠져도 괜찮다는, 나는 충분히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는 비록 인생을 길게 살아보지 않았지만,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힘든 일을 겪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자기 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우한 환경 탓을 하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 그리고 자신이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폭풍은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 폭풍을 피할 수 없다면 고개를 숙이고 그것이 지나가가기를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 폭풍을 잊어 보겠다고 나쁜 길로 빠진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포기하고 버린다는 얘기다. 죽지 않을 바에는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 부모 잘 만나서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 모두 범죄자 혹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범죄자는 늘 불우한 환경이었더라 하는 핑계거리가 아닌 그저 그들이 그 순간을, 자기 앞에 놓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별 말 없이 색안경 쓰지 않고 지켜봐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혹은 어른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죽지 않을 거라면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를 탓하고 환경을 탓 하는 게 당장은 탈출구가 되겠지만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기에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모든 사람들에게, 더구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불우한 환경 탓에 불행한 이들에게 건투를 빈다. 그대가 아무리 힘들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건 간에 그대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그 존재만으로도 귀하다고. 그리고 그러길 진심으로 바란다면 언젠가는 그 고통이 끝나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고.

 

투덜은 나의 힘
스테로이드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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