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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술자리,국회의원,가듣보 그리고 연예인

 

2009.8.17.월요일

 

어떤 쇼양(쇼+교양을 뜻하는 방송계 속어) 프로그램을 맡아 하던 무렵, 시청률도 잘 나오고 해서 당시 리포터들이랑 한 잔 할 기회가 있었어. 지금은 이미 하늘의 별로 중천에 떠오른지 오래인 정모, 요즘 한창 열애 중이라는 장모, 그리고 내 눈엔 꽤 괜찮은 미남으로 보였던 김모 등과 맥주 500 돌리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지.  

 

 

 

한참 술자리가 무르익고 세 리포터의 익살에 배를 쥐는 차에 옆자리에서 사인 요청이 왔어. 리포터들은 기분 좋게 사인을 해 줬지. 그런데 사인들이 하나같이 기가 막히게 휘황하고 유려하더군. 그래서 사인들 참 멋있게 만들었다고 했더니 정모씨가 대답하더군. "저 한달에 10만원 벌 때부터 사인 연습했어요."

 

한껏 설레는 눈길로 자신의 이름과 날짜를 부르짖으며 모월 모일 자신이 어떤 연예인을 만났음을 증명받으려는 사람들은 계속 줄을 이었고 우리 리포터 셋은 신이 나서 사인을 휘갈겼어. 사인에 여념이 없는, 그리고 사인을 받아가면서 이게 웬 횡재냐는 얼굴로 좋아 어쩔줄 모르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어. 이게 연예인하는 맛이겠구나......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자신의 존재만 가지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 내가 평생에 누구에게 사인해 줄 일이 있겠어?  돈 만원 주고 가져가래도 쓰레기 봉투 아깝다고 안가져갈걸.  

 

이렇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자리를 빛낼 수 있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살짝 부러워지는 순간, 조금 난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어. 옆자리에서 회식을 하고 있는 30대 회사원 집단들이 사인을 요청해 온 것까지는 정상적이었어. 그런데 거기 부장이라나 뭐라나가 술 한 잔 받으라고 누군가를 부른 때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 마지못해 받긴 했는데 제꺽 달려오지 않은 것이 마뜩지 않았나 봐.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어. 어색하게나마 그렇게 끝나면 좋겠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깐죽대는 녀석들은 어디나 꼭 있게 마련이지.

 

누군가 다짜고짜 사진을 찍자고 덤볐어. 연예인들은 몸이 재산이고 얼굴이 신용카드인 사람들이야. 취객들과 어깨동무하고 닐니리야 하는 사진을 찍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들이 거만해서도 아니고, 비싸게 굴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침으로써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자신들의 이미지를 위해서 당연하게 행사하는 권리일 뿐이지. 당연히 정중하게, 나중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또 꼭 오버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 폰카가 여기저기서 찰칵거리기 시작했어.  

 

로드 매니저들도 물리친 채 제작진들끼리만 가지는 자리였기에 제작진이 나서서 양해를 구했지. 이러시면 안된다.....  저쪽 신경쓰지 마시고 즐거운 자리 계속 가지시라. 그런데 한 왈짜같이 생긴 남자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어. "아니 말이야. 사진 하나 찍자는데 뭐가 문제야. 뭐가 그렇게 비싸? 연예인이 무슨 대통령이야? 니미 아니 팬이 사진 하나 같이 찍자는 게 뭐가 문제냐고..... 응?"

 

눈을 박아두고 보니 아까 사인받고 좋아라 했던 사람이야. 자기 아들이 누구 팬이라고 머리를 몇 번이나 꾸벅이던 사람이었어.  

 

"싸가지가 없어 싸가지가. 대가리에 든 것도 없는 것들이 콧대만 높아가지고 말이야." 

 

시국이 이에 이르렀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말 다했냐는 질문(?)과 다했다 왜? 하는 반문(?)이 오가면서 양 진영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어. 이전부터 다혈질로 유명하고 싸움이 나면 이성을 잃는 전과가 있었던 장발의 후배는 벌써 저쪽의 젊은축들과 서로 멱살을 쥐었고 젊은 PD 몇 명도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는 참이었어. 이미 리포터들은 차로 피신하고 있었고. 

 

그런데 저쪽에서 "야 저것들 찍어! 신문사에 갖다 줘 버려."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어. 그때 도끼로 머리를 맞은 듯 쩡 소리를 내면서 머리에 떠오른 영상 하나가 있었어. "개그맨 정모, 김모 일행 심야 난투극"이 주먹만하게 뜬 스포츠조선 10면 기사였지. 여기서 상황이 벌어지고 심야 집단 쌍방 폭행이 이뤄져서 경찰차 신세라도 진다면, 참고인으로라도 우리 리포터들이 불려와야 하는 참극이 발생한다면,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닌 거야. 순간 나는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로 변신했지. 멘트는 "나 돌아갈래"가 아니라 "안돼애애애애"

 

 

상황을 무마한 뒤 시장통을 걷는데 또 별로 달갑잖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졌어. 호적신고 잉크도 안말랐을 것 같은 짧은 머리 중학생 넘들이 야 아무개다 하고는 무슨 원숭이 부르듯 하더니 동물원 팬더 쓰다듬듯 배를 슬슬 만져대지 않겠어? 성질같아서는 확 뒤통수라도 갈겨 주겠는데 졸지에 중학생들의 장난감이 된 연예인은 불쾌한 빛이 역력하면서도 허허로운 웃음으로 그를 억지로 틀어막고 있더군.  아서라 연예인 안할란다.... 쩝  

 

이렇게 두고 보면 연예인들을 보는 시각도 지극히 분열적이야. 아무개가 헤어졌니 누구랑 사귀니 하는 소식에 토끼 귀가 되고, 연예인 누가 떴다 하면 소떼처럼 몰려 다니고 악수라도 하면 손도 씻지 않을 듯 숨가빠하고, 사인받으려 몇 시간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연예인들을 마음으로 존중하거나 존경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아 보이니까. 오히려 멸시에 가까운 시선이 베이스에 깔려 있는 것도 같아. "사인받고 싶은 스타"가 "대가리에 든 것도 없이 콧대만 높은 것들"로 전락하는 시간이 10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은 한 예이겠지.  

 

어떤 미국 쇠고기 수입업자가 "미국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씹겠다."고 말한 여배우를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고, 정말로 "재수와 개념이 골고루 없는" 국회의원이 책임을 지라고 윽박지르고, 이에 한 배우가 항변을 했더니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민감하신 어떤 분께서 "지적 능력이 없는 것들"이라고 일갈하는 일이 벌어졌어. 이 재미있으나 서글픈 일련의 사태는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그날의 술자리를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게 했어

 

김민선씨를 고소한 쇠고기 수입업자와 내가 사는 지역구 국회의원은 연예인 김민선씨의 광팬이 아닌가 싶어. 그녀의 위상과 능력과 잠재력을 오드리 헵번 급으로 보고 있지 않은 이상, 그녀가 그녀의 홈피에 뇌까린 말 한 마디가 수백만 명의 손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오게 했다는 결론이 도대체 무슨 수로 도출된단 말이야? 명색 방송 pd로 할 말은 아니고, 더더군다나 연예인 김민선씨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는 김민선이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었다구. 조용필도 아니고 안성기도 아닌 젊은 여배우의 한 마디에 수백만이 홀랑 미쳐 날뛰었다고 믿는 건 보통의 팬이 아니야.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했던 미친 넘보다 더한 광팬일 거야. 

 

만약 그게 아니라면 문제의 핵심은 자신의 명예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사는 게 인생의 낙으로 보이는 어떤 분께서 내지른 말일 거야. 

 

"김민선은 물론 정진영 조차도 사회적으로 파장을 미칠 만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지적 수준이 안 된다. 지적 수준도 안 되는 자들이 자기 의견을 밝히기 시작할 때 대한민국의 소통체계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 문장의 주제는 결국 그 끔찍한 술자리에서 사인 받을 때는 좋다고 날뛰다가 시비 붙으니까 얼굴색 바꾸던 왈짜 녀석의 말이야. "대가리에 든 것도 없는 것들이 싸가지 없이......."

 

자신의 명예는 어지간히 생각하는 분이 어떻게 이리도 험악하고 우악스럽고 저열하고 치사하게 남의 지적수준을 논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가증스럽긴 하지만, 그건 그분의 교육 수준이라고 치고 넘어가 보자.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연예인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초상권을 무시하고 카메라를 들이밀고 어깨동무를 강요했던 취객들처럼 이 명예와 소송 애호가께서는 배우이기 이전에 한 시민으로서 (배우 정진영의 항변처럼) 지닌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는것이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홈피에다가 세상에 대한 느낌 한 마디 끄적인 것조차 지적 수준을 근거로 입 닥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연예인에 대한 모욕이고, 시민에 대한 모독이며 인간에 대한 무례 아닐까. 연예인도 시민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에서 벗어나는 대상이 아닐진대, "대가리 빈 것들 주제에 떠들지 말고 잠잠히 있어"라는 식의 막말을 구사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느 유치원을 나나와서 저리 행동하는 걸까. 왜 유치원이냐고? 이건 고등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 정서와 예절 교육의 문제니까. 

 

술자리의 막판 분위기가 험악해져 갈 때 음험하게 터져나왔던 소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해. "저것들 찍어서 신문사에 갖다 줘 버려." 자기들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고 해서, 연예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가쉽 기사를 만들어 버리겠다는 발상이 무서웠고, 그럴 정도로 연예인이 따지고 보면 허약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 아연할 따름이었지. 

 

쇠고기 때문에 죽을 맛을 봤고 10년만에 찾은 내 새끼같은 권력을 보듬고 있었던 사람들 입장에서야 김민선이니 하는 "싸가지 없는" 것들이 얼마나 눈에 가시였겠어. 연예인들은 그냥 사람이나 웃기고 드라마에서 눈물 콧물이나 빼고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나 공익광고 캠페인이나 찍고 돈이나 벌어가면 되는 존재들인데, 선거 때 되면 불러다가 얼굴 마담이나 시키고 아줌마들 끌어모으는 도구로나 활용하면 되는데, 이 지적 수준 안되는 것들이 정치적 발언을 한다고?  황당했겠지...... 티꺼웠겠지...... 가소로왔겠지........

 

비록 신체적 여건과 정서적 한계와 실질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태어나서 지금가지 연예인 될 꿈은 1초도 꾸어 본 적이 없는 몸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연예인이 되고 싶어. 그래서 연예인의 입장에서, 연예인을 서슴없이 모독하고 있는 "가듣보" (가끔은 들리고 보이기도 하는 자) 언론인 변모씨나 싸가지라고는 엿 바꿔먹은 지 여러 성상인 듯한 여자 국회의원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항의해 보고 싶어.  내 팬(?)들을 동원하고, 연예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서 말이야.  

 

그런데 정작 왜 연예인들은 조용하지? 지적 수준 안되는 니들은 깝치지 말고 국으로 쥐죽은 듯이 살아라 하는 저 뱀의 혀같은 모욕에 아무런 느낌도 없을까? 국회의원도 역임한 사람들도 많고, 정치를 꿈꾸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자신의 직업적 영역의 특수성이 농락당하는 것이 정녕 아무렇지도 않을까? 이것은 연예인에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인식이 대한민국 주류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자리잡을 틈이 없는 걸까? 대한민국 연예인 다 죽었나? 결론은....... 또 그날의 결론으로 다시 한 번 빠꾸하게 된다. 

 

"아서라..... 연예인 안할란다."  

 

P.S. 박중훈이 나섰다. 대한민국 연예인 아직 안죽었다 ^^

 

 

산하(nasanha@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