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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 어른을 소개합니다 - 문정현 신부

 

2009.10.12.월요일
파토

 

지난 시간의 명진 스님에 대한 열분들의 호응,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이렇게도 어른에 목말라 있었던 건지, 이렇게도 우리 삶의 길을 잡아주고 모범을 보여 줄 스승을 만나 뵙고 싶었던 건지...물론 내 자신이 그랬으니 이 시리즈를 기획한 거지만 다들 그렇게까지 공감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거다.

 

그래서 반가운 맘에 금방 다시 쓸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하도 할게 많아 어느새 3주가 넘게 지나고 말았다. 그 동안 많은 독자들이 여러 훌륭한 분들을 추천해 주시기도 했고 다들 이 코너에 나오기에 손색없는 멋진 분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분을 소개해야 하나 그간 고민하다가, 결국 문정현 신부님을 오늘의 주인공으로 선정하기로 했다.

 

머 이 분의 지난 수십 년 행적 자체가 내가 선정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송구스러울 정도지만, 그와는 별개로 사실 굳이 문 신부님을 두 번째 주자로 택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바로 아래의 사진 한 컷 때문이다.

 

 
출처: 연합뉴스

 

오른쪽의 스님은 다들 기억이 나실 거다. 글타... 바로 지난 시간의 주인공, 우리의 명진 스님이다. 스님이 천일기도가 끝나자 바로 용산참사 현장으로 갔던 것은 다들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미 다른 어른 한 분이 든든하게 터를 잡고 계셨던 거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문정현 신부님이다.

 

이 분도 사실 좀 알려진 분이라 나도 성함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용산참사 현상에서 숙식을 하다시피 하며 유가족과 동참하고 있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 사진에 유달리 맘이 끌린 것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두 분의 눈빛과 표정 때문이다.

 

찬찬히 위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시라. 종교적 믿음을 초월한 두 거목의 눈빛의 교환 속에 흘러나오는, 서로에 대한 큰 신뢰와 존경, 그리고 연민이 느껴지시는가? 그 옛날 전두환 시절, 사실상 추방되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돌아와 영삼과 재회했을 때 이상의(영삼이 들먹여서 미안하다만 그땐 둘이 관계가 그랬다) 간지가 넘쳐 흐르는 두 큰 영혼의 소박한 만남,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

 

여튼간에, 이런 이유로라도 아무래도 명진 스님 다음에는 문정현 신부님이 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두 분을 줄 세우는 건 아니고,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연을 존중하고픈 의미라고 보면 된다.

 

 

문정현 신부님은 1940년생으로 이제 우리나이 일흔이다. 보통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고 살았던 진작 은퇴해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허허거리며 살 나이다. 제 아무리 젊어서는 열혈청년이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연세가 되면 이제 난 할 만큼 했다 면서 현실에 안주하기 마련인 거다.

 

아니, 머 그러면 차라리 다행인 거고 젊어서 좀 날렸다는 사람들이 이 나이가 되면 이상하게 삐뚤어지는 경우도 많다. 얼마 전 진중권이 지적했듯 스스로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사회적 망각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 상태를 쉬운 말로는 삐친 노인네라고 하고 어려운 말로는 노추라고도 부른다.

 

최근 몇 년 간 우리는 이런 인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고 또 크게 실망해 왔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이 분야의 거두 영삼을 필두로, 한때 우리 사회의 양심을 자처했던 지하와 동길, 그들보다도 더 일찍 정체를 드러낸 바콩 등, 입만 열면 망언이요 글만 쓰면 자기 과시인 노인네들이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사회 여기저기서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 비해 우리의 문 신부님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래 동영상을 함 보시기 바란다. 신부님은 1분 10초경에 나오지만 용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열분들도 알아야 하니 전체적으로 함 보시라.

 



 

보셨듯 일흔 먹은 노인이 아들뻘, 때론 손자 뻘도 안 되는 경찰들에게 짐짝처럼 끌려 나오고 있다. 별다른 저항도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몸으로 버텨 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듯 하다. 좀 옛날 모습인 저 위의 흑백 사진에서 보이는 당당한 카리스마는 어디로 갔는지, 마치 촌로와도 같은 늙고 약한 모습이 역력하다. 별로 간지 안 난다.

 

그러나 문 신부는 그 곳에서 지금도 그렇게 버티고 있다. 너무 끔찍해서 어쩌면 애써들 눈을 돌리고 있는 대명천지 살육의 현장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이제 8개월 여… 그는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6개월 이상 그곳에 살며 유가족과 현장을 지키는 중이다. 70 노인이 매일 이렇게 살아가니 폼 잡고 먼가 있어 보이게 단장할 여유나마 있겠는가. 몸인들 성하겠는가.

 

근데 사실은 문 신부님은 평생이 이런 식이었다.

 

1966년 27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 문정현. 사실 그의 동생은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유명세를 탔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공동대표인 문규현 신부이고 여동생 문현옥씨는 동두천 성당의 수녀다. 이러니 마 가톨릭 사제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우아하고 차분한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도 아무도 욕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젊어서부터 세상의 모순을 극복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 집행을 저지하려다가 무릎 부상을 입어 5급 장애를 얻기도 했다. 그의 나이 불과 36세 때다.  

 


젊은 날의 사제 문정현.
부드러운 듯 강단있는 듯한, 참으로 한국적인 얼굴을 가진 청년.

 

이어 76년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3.1 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고, 87년부터는 익산의 창인동 성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노동운동에 투신,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며 99년까지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 통일운동과 불평등한 SOFA 개정운동,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 현재의 용산참사 규명운동 등에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바쳐 투신해 왔다. 여기에 더해 86년부터는 전북 익산에 작은 자매의 집이라는 정신지체아동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2008년 1월 원장직에서는 은퇴). 한마디로 30대 때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쉴 틈이 없는 삶이다. 

 


용산 현장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던 문정현 신부.
그의 이런 노력으로 결국은 아래와 같은 가톨릭계의
호응을 끌어내기에 이른다.
우측 말석에 조용히 서 있는 그가 보인다.

 

 

 

이렇게 살아온 신부님이 과연 현재는 어떻게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는지, 그 자신과 주변의 말들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보자.

 

- (용산참사 관련하여) 경찰은 유가족을 순찰차에 실어 경찰서에 데려다 놓고 들어다가 길에 버리듯 내려놓고 도망친다.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연행이다. 종잡을 수 없는 공권력과 대치하고 있다. 상주는 부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도 온 몸에 상처투성이다. 이런 속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

 

- (오체투지순례 관련 주변 증언) 지난 주 우리 집에서 제일 일찍 일어나는 (문정현) 신부님께서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기척이 없어 가보니 심장 발작으로 긴급 처방인 스프레이를 입안에 뿌리시고 축 쳐져 누워 계신다. 약 한달 전에 오체투지에서 동영상을 찍기 위해 차 범퍼에 올라가려다 떨어져 무릎 관절이 틀어지고 연골을 다쳐 반기부스 상태에서 수술 날짜까지 받았는데, 어찌 어찌해서 틀어진 무릎 관절을 맞춰 한쪽 목발을 집고 다니시지만 매일 같이 오체투지에 가서 순례단을 맞이하고 영상 찍어와 밤새 편집하며 여기 저기 인터넷에 올린다.

 

하지만 그 댓가는 혹독했다. 오늘 아침에 또 다시 심장 쇼크가 일어났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오체투지순례는 문규현, 전종훈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종교를 초월하여 지리산 하악단에서 파주 임진각 망배단까지, 장장 400 km를 124일간 오체투지하며 순례한 것이다. 가히 명진 스님이 천일 기도 동안 치른 ‘백만 배’에 버금가는 정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문정현 신부는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대신 위에서처럼 몸을 상해가며 이들을 챙긴 거다.

 


이렇게 400킬로를 갔다. 상상이 되시는가.

 


순례를 마치며 임진각에서 문정현 신부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전종훈 신부.
이 땅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다. 그저 우리가 잘 모를 뿐.

 

- (용산 관련하여) 영정도 뜯어 갔습니다. 똥오줌도 가릴 수 없게 임시 화장실도 빼앗아갔습니다. 반항하면 머리채가 뜯기고 팔다리를 잡아 끌어 연행당하기 일쑤입니다. 심지어 이름을 거명하며 협박을 당합니다. 하루 하루가 생지옥입니다. 촛불문화제만 시작하면 수십 개의 스피커를 들이대며 고성으로 방해합니다.

 

- (용산 관련하여)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강서 신부는 피정은 끝났지만 떠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이로서 남일당 본당신부 이강서, 남일당 본당 보좌신부 문정현 앞으로 두 신부님이 남일당을 본당 삼아 전철연과 함께 사목활동을 해 나갈 것이다(남일당 빌딩은 용산 참사 현장의 이름. 이곳을 아예 성당으로 삼아 살면서 유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의미다)

 

- 그가 최근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절대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사지를 못 쓸 수도 있다고 했다. 절. 대. 안. 정. 문신부의 소원이 있다.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사심 없이 살다가 동지들의 애도 속에서 죽으면 그만. 현장에서 죽고 싶다는 것. 
[출처] 눈물 많은 할아버지 - 깡패신부 문정현 (2002) |작성자 안미숙

 


용역에 의해 밟히고 제압당하는 용산의 문 신부님.
현장에서 죽는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문 신부님의 삶은 단지 봉사하는 사제로서의 차원을 넘어 매일매일이 처절함 그 자체다. 유신 시절이던 30대 중반부터, 자신도 얻어맞아 5급 장애를 얻어가면서, 이미 2002년에 사지를 못 쓸지도 모른다는 선고를 받고도, 2009년 현재 일흔의 나이로 용산 현장에서 6개월째 살아가며 매일 미사를 집전하고 경찰과 용역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고 끌려나가 버려지기도 하는 삶.

 

이런 것이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반복되어 온 문정현 신부님의 일상이다. 이 나라의 어른으로서 이제 무게 잡고 시국에 대해 한마디씩 좋은 말씀 툭툭 던지기만 해도 존경 받을 분이, 이 빌어먹을 세상 때문에 어른 대접은커녕 저렇게 고생스러운 길을 자처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분,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사심 없이 살다가 죽겠단다. 종교인이건 성자건 구도자건 이게 과연 가능한가. 아니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하는 것만이라도 가능한가.

 

이 분에 비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나 하찮은 날라리냐?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단식 기도중인 문정현 신부님.
67세의 나이로 감행한 이 단식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계속된 심장 발작으로 21일만에 중단됐다.
그의 이런 투쟁은 그저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미가 아닌, 미군기지확장을
빌미로 자행된 대추리 지역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폭거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이제, 지난 시간의 전통을 이어 문정현 신부님의 주옥 같은 말씀을 한번 인용해 보도록 한다. 명진 스님과 가는 길이나 스타일은 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세상을 걱정하고 약자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어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 이명박 정권은 살인 정권이다. 공통분모다. 용산참사, 노동자의 죽음, 두 분모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공통분모가 되어버렸다.

 

- 우리 모두 소중한 길을 걷고 있다. 순례자들 앞 아스팔트길에 널려 있는 자갈이라도 치워주자.

 

- (어느 용역 직원을 생각하며) 오늘은 어린이날. 어떤 아이의 아버지였을 그 사람. 아이의 밝고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행복할까? 아니 권력과 힘에 길들여져 그런 생각이나 할까? 오늘 만이라도 자신이 어렸을 때의 본성을 생각해 보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

 

- 겉으론 아무것도 이룬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우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비록 가난하고, 재능이 모자라고 투박할지라도 서로가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꾸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 (지난 정권들에서 공직 참여 제안을 뿌리친 이유에 대해)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 받는 곳에 언제라도 참여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저의 영성이고 정체성인 거죠. 관에 들락날락하기 시작하면 소외된 곳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출처] 용산참사 다섯 달... 매일 추모미사 봉헌 문정현 신부 |작성자 DGAndrew Jeong

 

- 내가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내가 미쳤지? 옳은 것을 외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는 이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내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곳에 그들과 있습니다.

 

 

 

 

위에서 느꼈겠지만 신부님은 철모르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불의와 부조리를 지켜보고 또 수도 없이 절망과 좌절을 경험해 온 분이다. 그래서 그는 쉽게 세상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저 옳다고 믿는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력을 다해 실행에 옮길 뿐이다.

 

 

생각해 보면 문정현 신부는 앞서 이야기한 삐친 노인네들과 비슷한 연배다. 영삼 동길 등은 10년 이상 위지만 지하와 바콩은 41년생으로 오히려 한 살 어리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의 대단한 원로입네 하며 촛불을 비하하고 개나소나 공산당으로 몰아 세우고 어떻게든 뉴스에 한 마디 나오려고 발악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상해가는 몸을 돌보지 않고 묵묵히 아픈 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우리들에게는 그의 이름이 좀 낯설다(티비다큐에 몇 번 나오긴 했지만). 아직은 방북 사건으로 유명했던 문규현 신부의 형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실은 문정현 신부님이야말로 지난 40년간 이 땅의 음지에서 남이 알아주던 말던 약자의 편에만 서온, 몸이 부서지던 말던 그 자리를 지켜 온 이 사회의 진정한 버팀목, 행동하는 양심인 것이다.

 

 

이런 분이 얼마 전엔 심지어 아래와 같은 말도 하셨다.

 

 

사람이 말 한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 그 말에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면 우린 쪽팔려서 어떻게 삽니까...

 

 


어째 이런 분들은 하나같이 다 표정이 이러냐...

 

 

추신: 문정현 신부님 이야기를 하면 용산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다. 비록 인터넷 상에 많은 정보가 있긴 하지만 그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자들과 싸우고 있는지, 아래 신부님의 칼럼에 함 가보시기 바란다. 신부님이 직접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험담을 실은 것이지만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포함해 우리는 그저 속 편한 날라리일 뿐이다.

 

 

(링크☞ [문정현의 세상보기] [영상] 용산 똥파리)

 

 

 

 

 

딴지 논설위원 파토(patoworl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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