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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척 매뉴얼]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2009. 10. 23. 금요일
너부리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들어가며



당 서적을 읽은 척하기 어려운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 분량이라 하겠다. 무슨 그 옛날 어린이 월간지 <보물섬>도 아니고 600여 페이지가 온통 활자뿐인 당 서적의 살인적 두께를 마주했을 때 이것이 대체 책인지 베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혹은 분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은 마치 1.4후퇴 때 시커먼 중공군이 떼로 몰려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딱총 몇 발을 쏴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어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던 UN군의 심정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둘째는 러시아 문학 못지않게 난해한 남미 문학의 등장인물들이 갖는 그 이름들 때문이라 하겠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호세 아르까디오를 낳고, 다시 호세 아르까디오는 삘라르 떼르네라를 통해 또 호세 아르까디오를 낳고, 다시 그 호세 아르까디오는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과 결혼을 해 레메디오스와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낳고...


어디서부터가 사람의 이름이고 어디까지가 접속사인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는데다가 엇비슷한 이름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다시 반복되어 나오다 보니 죽었던 아버지와 새로 태어난 손자가 혼동이 되는 패륜적 읽은 척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할 것이다. (사실 당 서적에는 각종의 근친상간이 연출되므로 소 뒷걸음에 쥐를 잡듯 그 패륜적 읽은 척이 의외의 대어를 낚을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민음사에서 나온 <백년의 고독>의 경우에는 책의 맨 앞장에 ‘부엔디아 집안의 가계도’라는 일종의 족보 순서도를 수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 가계도의 쓰임이 무엇일까 의아해할 수도 있겠으나 혹여 진짜로 당 서적을 읽어낼 경우에는 수십 번을 다시 들추게 되는 매우 유용한 자료라 하겠다.



셋째는 내용의 난해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난해함이란 것이 무슨 니체나 사르트르의 작품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내용의 그 무엇이란 얘기는 아니다. 사실 당 서적은 마치 할머니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은 재미와 황당함이 느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정도로 술술 읽힌다. 다만 할머니의 얘기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고,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 동안 토끼가 낮잠을 자자 거북이가 몰래 토끼 간을 꺼내 용왕님께 가져갔다더라 식의 문어발적 플롯이 얽혀있어 읽었어도 당췌 내용요약이 되지 않아 읽은 티를 내기 힘들다는 것이 난해함이라면 난해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읽었어도 그 티를 내기 힘든 난해함이란 오직 진짜로 읽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종의 특권이라 할 것이니 당 서적을 읽은 척 하는 가장 중요한 스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어떻게든 읽은 티를 내고는 싶지만 ‘재미있다!’. 혹은 ‘환상적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 있을 뿐, 남들에게 그 이유를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어 답답한 가슴을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식의 안타까움의 표출이 당 서적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읽은 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


1)등장인물 및 내용요약


당 서적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엔디아 가문의 백년의 흥망사를 통해 본 인간의 굴레, 혹은 가상의 도시 마꼰도의 백년사를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등으로 책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몇 마디로 정의할 수도 있겠으나, 앞서 읽은 척을 했던 다른 서적들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굵직한 사건의 배열을 통해 구체적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당 서적의 구성에 담긴 작가의 의도 자체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백년의 고독>의 내용 중에 멜키아데스라는 집시가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을 예언했다는 양피지의 구성처럼, 당 작품이 인간의 전통적 시간관념에 따라 순차적으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백년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한 순간에 공존하도록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가 담긴 거대한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백녁의 고독>을 주제로 한 콜럼비아 화가의 작품



가령 당 서적의 시작은 부엔디아 가문의 창시자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아내인 우르술라의 얘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뜬금없이 책의 중반쯤에서나 주인공 역할을 하는 그의 둘째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회고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본문 1권 p.11)



이를 두고 혹자는 당 서적이 시간 개념의 해체를 통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당췌 알아먹기 힘든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얘기는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문학평론가인 척 하기가 아닌 그저 한 번쯤 읽은 척 하는 수준에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루려는 독자들에게는 바람직한 자세라 하겠다. 게다가 필자가 보기에 마르케스가 당 서적을 그렇게 구성한 것은 뭔가 탈근대적인 시도를 통해 특정 시류에 부합할까싶어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 서적을 훨씬 재밌게 함과 동시에 그 주제를 전달하는데도 효과적이라 판단했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당 서적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이해는 시간 순서상의 사건 이해가 아닌,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로 대신하는 것이 읽은 척에 훨씬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 아내 우르술라와 함께 마꼰도를 설립한 일종의 창조주. 전에 있던 마을에서 사람을 죽여 그 죄책감으로 마을을 떠나 마꼰도에 정착하게 된다. 뛰어난 힘과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인물로 작품 초반에 각종의 본의 아닌 코미디를 연출하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멜키아데스의 도움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건지, 아니면 미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밤나무에 묶여 죽는다.



-우르술라 : 근면함과 넘치는 열정으로 남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를 도와 마꼰도를 발전시킨 여성이며, 그녀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방향감각을 잃어 잘못된 길로 가곤 할 때 결정적인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사촌관계이기 때문에 돼지꼬리를 달고 있는 기형아를 낳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멜키아데스 : 물건을 팔기 위해 우연히 마꼰도를 방문한 집시이자, 마을에 번진 전염성 불면증을 고쳐주는 의사이자, 부엔디아 가문의 백년 역사를 예언한 현자이다. 그의 예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 밥이 되고 있다.’



멜키아데스는 대략 이 분과 같은 간지



-호세 아르까디오 : 부엔디아 가문의 장손으로 거대한 덩치와 힘, 그리고 거대한 남근을 소유한 인물이며 동물적 욕망에 충실하다. 집시들을 따라 세계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돌아온 후 진짜 여동생은 아니지만 여동생처럼 큰 레베까와 결혼한다.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총에 맞아 죽는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 당연히 처음부터 대령은 아니고 나중에 대령이 되어 보수파와 자유파의 내전에서 자유파의 수장역할을 하는 인물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형 호세 아르까디오와는 달리 병약하고 내성적이며, 사랑을 모르는 냉혈한이기도 하다. 주의할 것은 당 작품에서 태어나는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들은 호세 아르까디오 아니면 아우렐리아노로 불리는데 모두가 그 이름에 따라 성격과 운명이 비슷하다. 여성의 이름은 아마란따, 우르술라, 레메디오스 셋 중 하나다.



-아마란따 : 부엔디아 가문의 첫 딸. 굴러온 돌이라 할 수 있는 레베까에게 밀려 자동피아노 조율사의 사랑을 차지하는데 실패한 이후 갖은 땡깡을 부리더니 결국 처녀의 몸으로 죽는다. 하지만 집안 내 근친상간의 욕망을 지속시키는 핵심적 인물이기도 하다.



-삘라르 떼르네라 : 카드 점을 잘치는 여인으로 부엔디아 가문의 첫째 아들과도 통정하고 둘째 아들과도 통정을 하여 각기 아들 하나씩을 낳는다. 우르술라는 인정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부엔디아 가문의 최고참 며느리라 할 수 있다.



-레메디오스 :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아내지만 아마란따의 레베까에 대한 질투에 의한 엄한 짱돌을 맞아 14살의 나이에 죽는다. 진짜로 짱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아니다.



-(호세) 아르까디오 : 부엔디아 가의 장손인 호세 아르까디오의 아들 호세 아르까디오인데 같은 이름이라서 그냥 아르까디오라 불린다. 왜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 이렇게 반복되는지는 필자도 모른다. 그러한 작명법이 콜롬비아의 전통인지, 인간의 운명이 대개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지, 아니면 당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는 근친상간의 가능성을 윤리적 독자가 감내할 수 있도록 일부러 헛갈리게 한 것인지.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 : 아르까디오의 부인. 평생 묵묵히 일만하다가 마치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처럼 나중에 가출한다. 하지만 그 드라마의 엄마처럼 존재감이 있는 인물은 아니다.



-아우렐리아노 호세 :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삘라르 떼르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자신의 고모라 할 수 있는 아마란따와 묘한 관계가 되었다가 경찰에 의해 사살된다.



-미녀 레메디오스 : 아르까디오의 첫 딸로 그 미모가 살인적이지만 그녀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며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침대 시트와 함께 승천해서 사라진다. 부엔디아 가문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다 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 : 이번에는 친절하게(?) 세군도라는 인식표를 넣어주었다. 아르까디오의 쌍둥이 아들 중 첫째로 처음에는 빌빌거리다가 우연찮게 바나나 농장의 노조 지도자가 된다. 이후 군인들이 광장에 모인 삼천 명의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하지만 결국 공포에 떨다가 생을 마감한다.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 쌍둥이 동생. 처음에는 다산의 여신과도 같은 뻬뜨라 꼬떼스를 만나 돈을 벽에 도배할 정도로 부자가 되지만(진짜로 도배한다), 왕족 출신의 체면지상주의 여성인 페르난다와 결혼한 이후 점점 가세가 기운다. 중요한 것은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그들의 엄마도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똑같은 쌍둥이로 태어나 자라다가 그들의 장난에 의해 서로 이름이 바뀌지만 결국 운명과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후 부엔디아 가문의 얘기는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후손들로 넘어간다.



-호세 아르까디오 :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우르술라가 교황을 만들겠다며 로마에 유학까지 보내 키우지만 호세 아르까디오가 대체로 그렇듯 집에서 보내준 학비를 삥땅쳐 놀고 먹는 인물이다. 로마에서 마꼰도로 돌아온 후 집안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 다시 로마로 떠나려 하지만, 동성애를 벌이던 소년들에게 살해당한다.



-메메 :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 사이의 딸. 총명하고 밝은 아이지만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와 몰래 연애행각을 벌이다 엄마에게 들켜 억지로 수녀원에 감금되는 비운을 맞는 여인이다.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수녀원에서 갇혀 지내다 그 노동자의 아들을 낳는다.



-아마란따 우르술라 :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막내 딸. 어린 시절부터 벨기에에서 유학을 한 신여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메메의 아들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즉 이모와 조카사이의 근친상간을 통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 : 메메의 아들.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를 통해 수녀원에서 태어난 후 그의 할머니 페르난다에 의해 입양된 아이취급을 당함으로써 다른 가족들은 그의 혈연관계를 잘 모르던 와중에 그의 이모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사랑에 빠진다. 작품 마지막에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를 해독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3)읽은 척 세부스킬



제목에 대한 선입견


먼저,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탄 작품이라는 선입견(?)과 더불어 <백년의 고독>이라는 그 심오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당 서적의 제목은 책장을 한 번 들추기도 전에 왠지 책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도 한 백년은 걸릴 것만 같고, 분명 한글로 쓰여 있음에도 무슨 소린지 당췌 알아먹을 수가 없어 고독해진다는 것은 아닐까 싶은 불길한 예감을 유발한다 할 것이다. 그만큼 제목에서부터 왠지 민간인의 신분으로는 다가가기 힘든 문학적 포스가 느껴진다는 얘기 되겠다.



실제로, 많은 수의 읽은 척 초보자들이 <백년의 고독>이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다느니, 그 내용이 너무 지루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내가 적어도 당 서적을 들여다보긴 했으나 완독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불가항력이었음을, 마치 한줌의 양심은 남아있다는 듯한 구라로 소심한 읽은 척을 자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잔재주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당 서적은 그 방대한 분량과 독특한 시간 구조, 각종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징 때문에 내용 요약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은 첫 페이지부터 마치 남미산 무협지를 보는 듯,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을 듣고 있기라도 한 듯 재미있게 술술 익힌다고 하는 것이 당 서적을 진짜로 읽은 적들의 일반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꼰도 마을에 전염성 불면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이 돌았을 때를 묘사한 당 작품의 한 대목을 보면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 꿈이 그리워 잠을 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피곤해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함께 모여 앉아 끝없이 얘기를 주고 받고, 똑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이나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신경질이 날 정도까지 비비 고아서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얘기하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또 들려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얘기를 듣는 사람이 그러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듣고 싶다고 대답하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하라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자리를 뜰라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자리를 뜨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는 등, 그런 식으로 며칠 밤이 새도록 지속되는 지독한 모임에서 밑도끝도없는 장난을 쳐대곤 했다. (본문 1권 p.75)



게다가 비록 제목은 난해함과 지루함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만 같은 <백년의 고독>이지만 콜롬비아 내전과 바나나 플랜테이션,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기관총 학살 사건 등의 실제 존재했던 사실을 풍자했다는 관점에서 당 서적의 제목은 <백년의 패러디>가 될 수도 있고, 부엔디아 가문의 근친상간과 수간, 동성애 등의 밀도 높은 성애사건들을 중심으로 본다면 <백년의 야설>이 그 제목이 되어도 무방하다 할 정도로 작품 전편에 걸쳐 소설적 재미가 풍성하기 때문에 아무리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문학적 평가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을 들먹인다 할지라도 당 서적을 재미없게, 혹은 어렵게 봤다는 식의 소감은 대번에 읽은 척을 뽀록내는 자충수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머감각이 시세보다 매우 저렴함을 드러내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다.




또한 당 서적에는 남미작품 특유의 이른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이 전편을 통해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마술적 사실주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뿐만 아니라 보르헤스, 이사벨 아옌데 등의 유명 남미작가를 거론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인데, 당 작품에서 구현되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우르술라가 산후 조리차 집에서 휴식을 취한 지 약 사십 일째 되던 날 집시들이 마을로 돌아왔다. 지난번에 얼음을 가져왔던 그 곡예사들과 마술사들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이 멜키아데스 족속들과는 달리 진보된 문명의 전파자들이 아니라 단순히 여흥을 제공하고 물건을 파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었었다. 얼음을 가져왔을 때도 그들은 그것을 인간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그저 서커스의 볼거리로 선전했을 뿐이다. 이번에 그들은 다른 발명품들과 함께 날아다니는 양탄자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을 교통 수단의 발전에 근본적으로 공헌할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오락 기구로 소개했다. (본문 1권 p.54~55)



속임수로 힘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 까따리노는 그가 카운터를 움직이면 12뻬소를 주겠다고 했다. 호세 아르까디오는 카운터를 뽑아 머리 위로 추켜들어서는 길바닥에 내놓아 버렸다. 그 카운터를 다시 제자리에 놓는 데는 열한 사람이 필요했다. 파티의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 그는 여러 나라 글귀들을 새긴 울긋불긋한 문신이 꽉 들어차 있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남근을 카운터 위에 전시했다. (본문 p.140)



가장 좋지 않았던 점은 장마가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가장 건조한 기계들도 삼 일마다 기름을 치지 않으면 기어들 사이에 꽃들이 피어났으며, 금자수의 실들이 녹이 슬고, 젖은 옷에는 사프란 이끼가 돋아났다. 공기가 어찌나 축축했는지, 물고기들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방 안 공기 속을 헤엄쳐 창문을 통해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본문 2권 p.165)



장난을 쳐도 벌을 받지 않는 것에 재미를 붙인 아이 넷이 그 다음날 아침 아우렐리아노가 부엌에 있는 틈을 이용해 양피지들을 망쳐버릴 준비를 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누르스름한 양피지에 손을 댄 순간 아이들은 어떤 부드러운 힘에 의해 바닥에서 들어올려졌고, 아우렐리아노가 그들에게서 양피지를 빼앗을 때까지 그대로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본문 2권 p.241~242)



이뿐만이 아니다. 절대미녀 레메디오스가 어느 날 갑자기 공중부양을 해 사라진다거나,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는 텍사스 소떼를 몰고 다니듯 늘 나비떼를 거느리고 다닌다거나, 사년 십일 개월 이틀 동안 비가 내리는 등, 한 마디로 당 작품의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럴듯한 구라’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학계의 업자용어라 할 수 있다.



고로 향후 당 서적을 읽은 척 함에 있어서는 남미 특유의 마술적 사실주의 어쩌구 하는 식의 외우기 힘든 대사들을 읊기보다는 “그 책의 제목은 말야. 백년의 고독 보다는 백년의 구라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정도의 일견 무식해 보이지만 한편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만 같은 한 마디가 더 적당하다 할 것이다.


마꼰도와 좃도


대한민국에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마술적 사실주의를 극대화한 구비문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소위 ‘좃도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행정구역상 좃도 크군 만지면 성내리의 18번지에 위치한 그 좃도로 가기 위해서는 좃꼴리는대로를 경유해야 하고, 그 섬의 천연광물로는 변강쇠와 씹탱구리가 있으며, 복상사라 불리는 사찰에 가기 위해서는 그 섬 특유의 사람이 지고가야 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좃빠지게라더라, 하는 좃도 시리즈 말이다.




가상의 지역 마꼰도에서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를 형상화하듯, 부엔디아 가문의 6대, 혹은 6.5대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는 인간욕망의 좌절사를 사실과 구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술한 당 서적의 근본 발상이나, 정치적 강압과 성적 금기에 휘둘리고 있던 시기에 교묘한 말장난으로 욕을 욕이 아닌 것처럼, 육두문자를 육두문자가 아닌 것처럼 유포시켰던 좃도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얘기 되겠다. 물론 좃도 시리즈가 노벨 구비문학상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조금은 위험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실재 사건과 각종 신화, 전설, 민담, 문학 등을 교묘히 배합하여 마꼰도의 백년 역사를 그린 당 서적을 읽은 척 함에 있어, 처음에는 단순한 말장난으로 시작했겠으나 나중에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를 아우르는 거대 구라가 되어버린 좃도 시리즈를 참고하는 것은 유용한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꼰도나 좃도나. 그리고 전설의 섬 명박도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발발했던 각종 비극적 사건들(대표적으로 유럽과 미국에 의한 수탈 및 자국 내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이유로 당 서적을 무슨 역사서 대용쯤으로 이해하며 읽은 척하려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삼국지를 읽는 이유가 단순히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학습의 차원이 아니듯 당 서적 역시 남미의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참고 서적이기 전에 인류의 보편적 욕망과 그 욕망의 좌절에 의한 고독이 고스란히 담긴 위대한 문학작품이라 하겠다.



고로 당 서적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었다느니, 피착취국가의 설움을 느낄 수 있었다느니 하는 읽은 척은 틀린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주객전도의 읽은 척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통해 읽은 척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할 것이다.



딴지 편집장 너부리(newtoil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