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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념에 대하여

2009-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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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념에 대하여

 

2009.10.28.수요일
알려지지않은주시자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라는 사람이 있다. 일본의 56, 57 대 내각총리대신이며, 61, 62, 63대 총리인 사토 에이사쿠의 친형이기도 하다. 성이 다른데 왜 형제냐고? 일본이란 나라가 가문이랑 분가랑 뭐 그런게 좀 복잡한 곳이니 이해해 줘라. 노부스케도 태어났을 땐 사토 노부스케였다. 그리고, 몇 년전에 배 아파서 총리 그만 둔 아베 신조(이 친구는 90대 총리)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1896년에 태어난 기시 노부스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현 도쿄대학의 전신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간다. 어마어마한 수재였다고 한다. 졸업후 관료로 활약하기 시작한 그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바로 그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전시 경제체제를 통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A급 전범으로 구속되지만, 미국의 극동정책이 급변하면서 목숨을 건진다. 자기 옛 동료 7명(도조 히데키 포함)이 교수형을 받은 다음날 풀려난 뒤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를 만나러 달려가 담배를 한 모금 빠는 사진이 아직까지 남아았다. 난 담배는 안 피운다만, 그 담배 맛 참 좋았겠다.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의 사진. 왼쪽이 기시 노부스케
사진 출처는 일본 위키페디아

 

그렇게 한 목숨 건진 기시 노부스케는, 공직추방령이 해소되자 정계로 복귀하여 1956년엔 내각 총리대신까지 해 잡수신다. 이때 취임 기자회견에서 부패, 빈곤, 폭력의 세가지 악(삼악三惡)을 추방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얼마전 기사에서 일본이 전쟁 끝나고 구타/폭력 추방할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길 했을건데, 기시 노부스케의 이 발언은 일본이 전쟁 직후 얼마나 암담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를 방증해 준다. 공직은 부패하고 국민은 가난하고 병영문화의 잔재로 각 집단에서 구타와 폭력이 난무했다는 소리니까.

 

기시 노부스케는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그럭저럭 성과도 남긴다. 고도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고. 칭찬 여기까지.

 

이 친구는 방금 살펴보았듯이 미국의 극동적책 기조변화 덕에 살아남은 친구다. 그리고 그 정책의 변화라는게, 전쟁 직후(진짜 종전 사인한 직후)의 일본넘들은 걍 냅두면 넘 위험해. 아예 공업생산시설 다 쓸어버리고 농업국가 만들어버려!!플랜에서 소련에서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농업국가 만들어서 무슨 꼴을 볼려고. 아예 이 섬을 미국의 불침 항공모함으로 만들자!! 플랜으로 전환된걸 이야기 한다. 꽤나 극적이지? 그때 미국애들도 일본넘들 잡아먹어 버리고 싶은 맘은 굴뚝 같았지만(리멤버 펄하버),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더 큰 적의 위협앞에 냉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미국과 기시 노부스케의 관계는 당근 미-일 안보 참 좋아요, 공산당 참 나빠요로 요약될 수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한미동맹의 소파규정은 귀엽게 봐 줄 수 있을 정도의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다 뽀록이 나기도 하고, 미국 큰 형님들 말은 무조건 다 들어주겠다는 당시 일본인들 스팀 돌게하는 외교정책으로 많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58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다시 승리하자 57대 총리가 된 기시 노부스케는, 드디어 1960년에 미일 안전보장조약(신조약)을 체결하려 든다. 일본의 60년대를 최루탄으로 물들인 안보투쟁의 시작이다.

 

이때 도쿄대 여학생이 시위하다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일본 대학생들과 기동대(일본은 한국 전의경의 업무를 담당하는 직업경찰이 따로 있다)의 충돌은 점점 격화된다. 이 시절 자료들 찾아보면 한국의 학생운동사와 비슷한 점이 참 많아 개인적으론 흥미가 넘치는 분야지만, 오늘 본론은 그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뭐, 백악관 보도관이 공항에서 시위대에게 포위되는 바람에 헬기가 출동해서 구출해 온 사건이라던가, 총리관저를 시위대가 둘러싸 기시 노부스케가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저승사자와 고도리를 칠 뻔한 일 정도가 예시라면 예시일까. 여튼, 기시 노부스케가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친 것은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아, 참고로 쇼와의 요괴는 기시 노부스케의 별명이다.

 

 와가츠마 사카에

 

 

와가츠마 사카에라는 일본의 민법학자가 있다. 위대한 학자다. 칭찬 앞으로도 계속되니 그런줄 아시라.

 

1897년에 태어난 와가츠마 사카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현 도쿄대학의 전신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간다. 어마어마한 수재였다고 한다. 와가츠마 사카에의 스승은 일본 민법의 기초를 다진 하토야마 히데오인데, 그는 스승이 차려놓은 토대를 기초로 자신의 법이론을 확립해 일본 민법을 현대적으로 거듭나게 한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와가츠마 사카에는 고도경제성장기라는 격동기를 맞이한 일본 민법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살아있는 민법이 되도록 노력을 거듭했으며, 그 결과 그의 학설은 그의 사거 이후인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민법계의 지존으로 군림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법이 많이 개정되었고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도 변한지라 예전만큼의 포스는 없다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민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와가츠마 설이 아니면 통설이 아니다라는 옛 격언(?)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으론 농담을 즐기고 재미있는 예시를 통해 알기쉽게 민법을 가르치려 하는 좋은 스승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후학 육성에도 힘써, 현재도 일본 민법학계의 쟁쟁한 원로 학자들 중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도쿄대 학파가 아직까지 일본 민법계를 주름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갑자기 왠 민법학자 이야기냐고?

 

와가츠마 사카에와 기시 노부스케는, 고등학교때 부터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다. 고삐리때 부터 성적이 좋았던 둘은 항상 순위경쟁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도쿄대 법학부에 진학한 뒤에도 둘의 성적은 단연 수석과 차석을 나눠가질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냥 성적만 좋은 라이벌이었던 게 아니라, 진짜 마음이 맞는 친한 친구였다. 기시 노부스케가 전범으로 구속되어 있었을 당시 와가츠마 사카에가 구명운동에 동참한 정도야 뭐 당연한 이야기일 테지만.

 

그런데, 이 와가츠마 사카에는 안보투쟁과 함께 죽마고우가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몰리자, 공개적으로 친구에게 충고를 하기로 결심한다. 도쿄대 법학부 교수가 내각 총리대신에게 충고를 하는게 아니라, 어렸을 적 함께 공부하고 밥 먹던 친구가 갈 길을 잃은 친구에게 진심이 어린 말 몇 마디를 전해주기로 한 것이다. 1960년 6월 7일, 일본 아사히 신문에는 와가츠마 사카에의 이름으로 기시 노부스케군에게 고함이라는 수기가 실린다. 일국의 총리대신을 굳이 직함없이 이름으로 부른 그의 심경을 알만하다. 그중 일부를 부족한 실력이나마 번역해 봤다. 일독을 권한다.

 

 




 
 

자네는 지금의 외교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추진하는 것이 우리나라(일본)의 발전을 위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네. 자네의 신념(이 굳건하다는 점은-괄호 안 역자주)은 믿어 의심치 않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자네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중국, 영국, 미국을 적으로 돌려 대동아전쟁을 단행하는 것이 일본의 발전을 위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엄청난 실수였네. 자네가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아,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네. 지금 자네에게 남아 있는 길은 단 하나, 정계를 은퇴해 낚시로 소일하는 것 뿐일세.

 

 

 

 

아사히 신문에 이 글이 실린 후, 기시 노부스케는 결국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단행한다. 그리고 체결 당일인 1960년 6월 23일, 그간의 소동에 대한 책임을 지기위해 내각 총사퇴를 단행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친구의 충고는 절반만 받아들여진 셈이다. 이후 둘이 같이 낚시를 하러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그 뒤에도 일본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죽는 날 까지 정계의 거물로 통했다. 결국 그도 좋은 말을 들을 귀를 가지진 못했던 듯 하다.

 

 

 신념과 아집 사이

 

 

해외에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그 중 가장 귀찮은 시츄에이션 중 하나는 바라지도 않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노릇을 해야할 때이다. 일본인들이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 모인 자리에서 한국인의 입장을 듣기위해 나에게 발언기회가 주어지면, 제 아무리 지 좋을대로 살아온 나라고 할 지라도 어느정도 균형잡힌 입장이라는 걸 지절거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내 말을 나의 개인적인 발언이 아니라 한국사람들의 입장으로 받아들일테니. 뭐,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현 이명박 정부에 대한 입장을 말해야 할 때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딴지에 가끔 글을 쓰는 인간이고 딴지는 한국에서 어떤 위치에 속한 언론인지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주 애매하다. 그냥 쌍욕을 하면 된다고? 난들 왜 그러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머리 속으로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굴려봐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지금의 한국 행정부? 아주 쥐스럽습니다

 

 

아, 그래요? ... 근데, 왜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나요?

 

 

......

 

 

선거로 뽑은거 맞죠? 쿠데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건 사기극이었습니다. 경제를 살린다는 얄팍한 선전에 넘어가...

 

 

... 그런 얄팍한 선전에 국민 대다수가 속았다는 말인가요?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누워서 침뱉기니. 니네는 자민당한테 60년 넘도록 속았지 않느냐고 말해 본들, 동네 아해들 말싸움이 될 뿐이다. 시위때 지들 지켜준 전경들에게 고맙다고 미국산 쇠고기 만 들여먹이는 좀스런 자들에게 권력을 맡겨두고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까도 그냥 까는 걸론 곤란하다. 잘 까야 한다. 좀 점잖게.

 

 

개인적인 성과만을 보면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경과가 어찌 되었든 고학생에서 출발해 대기업의 요직까지 차지한 인물이니(차마 경영자라고는 말 안한다. 나도 양심이 있지). 불굴의 신념으로 노력을 거듭해 온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부의 획득이나 성공같은 개념과 정치가로서의 자질은 꼭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돌려말하기 참 힘들다. 무엇이 안타까운지는 나도 모른다. 나에게 이 고생을 시켜주신 가카 지지자 여러분, 부자 되셔서 꼭 미국 국적 따시길 빈다.

 

 

 

 

내가 몸서리쳐지는 고민 끝에 찾아낸 가카의 장점. 그것이 저 불굴의 신념이라는 애매한 단어였다. 난 가카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자존심을 위해 되먹잖은 변명을 한 것이라 애써 자위하며 단칸방으로 돌아오던 그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나마 그 점만은 인정해 주마라고 말하는 가카의 장점. 즉 그의 소위 신념과 뚝심이라는 것이,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와가츠마 사카에가 명쾌하게 지적했듯, 정치가의 실정(失政)은 신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념이 넘쳐서 생기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박정희는 굳건한 신념이란 기준에서 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 신념이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그는 항상 약자의 희생을 강요했고 그것을 통해 얻은 큰 이익은 강자들이 서열에 따라 나눠가졌다. 이렇게 하면 아랫것들도 굶어죽지 않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냐는 신념. 그 신념 덕에 우리 사회가 무엇을 잃어야 했는지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반대하는 미디어법이니 4대강이니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니를 굳건히 뚝심있게 추진하시는 가카를 보며, 나는 우리 사회가 원했던 강한 지도자라는 것이 결국 개인의 강력한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인물이라는 어이없는 인간상이 아니었나 자문해 본다.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 절대로 굽히지 않는 신념은 때때로 독이 된다. 민주주의란 것은 결국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남에게 양보를 요구할려면 나도 양보를 해야하니까. 그리고, 목소리 크고 힘있는 자가 이것은 나의 신념이다를 외치며 타협을 거부할 때, 몇몇 사람은 그 신념 때문에 피를 흘려야 하니까.

 

 

50년 가까운 세월 이전에 일본의 한 학자가 그 나라 최고의 권력자에게 용기있게 건넨 한마디. 자네의 신념은 인정하지만 그 방향은 잘못되었다는 한마디가 지금 우리 사회에 너무 절실하다. 가카가 청와대에서 방을 빼시기 전에 이 말이 귀에 닿도록 노력을 하거나, 정 안되면 이제 신념만으로 무장한 인간은 청와대에 안 들어가도록 센스있게 투표할 수 있는 국민이 되거나.

 

 

어느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까?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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