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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7.월요일


김지룡


 


아빠와 아이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 아빠가 아이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유럽 10개국을 순방하는 환상적인 가족여행을 시켜주면 될까. 지중해에서 요트를 태워주면 될까. 별 다섯 개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시켜주면 될까?


 


특별한 존재란 지극히 평범한 일, 아무것도 아닌 일도 함께 하면 즐거운 사람을 말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남녀 사이에서도.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하고, 공원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피곤할 때 안아서 재워 주고,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무 것도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 사람과 함께 하면 더없이 즐거울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된다. 아빠는 아이에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아이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항상 아빠를 On 시키면 된다.


 


바닷가에서 아들아이와 놀고 있을 때였다. 아들아이가 진흙을 뭉쳐서 내 등에 던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덟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장난기가 동했나보다. 그 아이도 진흙을 뭉쳐 반바지를 입고 있던 아빠의 다리에 던졌다. 그 아빠는 인상을 잔뜩 쓰며 아들을 보고 화를 냈다.


 


“너 한 번만 더 하면 혼날 줄 알아.”


 



 


나는 좋은 아빠이고, 그 아빠는 나쁜 아빠일까. 그럴 리가 없다.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온 아빠라면 자상하고 좋은 아빠일 것이다. 단지 그 아빠는 아빠의 스위치를 On시키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 아빠는 바닷가를 거닐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빠의 스위치를 Off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것을 모른다. 아빠가 옆에 있다면 당연히 On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빠와 놀고 싶다. 아빠에게 장난을 건다. 그 순간 아빠가 화를 낸다. 아이는 영문을 알 수 없다. 아빠와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와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아이가 옆에 있다면 아빠를 On 시켜야 한다. 아빠를 On 시킨다는 것은 대개 아이와 노는 것을 말한다. 아이가 아빠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함께 노는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다가오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지만, 아빠가 다가오면 흥분한다. 엄마가 안아주는 존재라면 아빠는 함께 노는 존재다.


 


나는 평일에는 하루 한 두 시간, 주말이면 하루 열 시간쯤 아이들과 논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좋은 아빠라는 말도 듣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 사실 좀 쑥스럽다. 나는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충고한다.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하지 말고 즐거운 아빠가 되세요.”


 


아이들과 열 시간 씩 노는 것은 내가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과 ‘놀아 주는 것’이 아니다. ‘함께 노는 것’이다. 놀아주는 것은 노동이지만, 함께 노는 것은 즐거운 유희다.


 


살아오면서 별의별 일을 다 해보았지만(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아이와 함께 노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내게 있어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은 아이를 즐겁게 해주는 아빠의 의무가 아니라, 아빠인 내 자신이 더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깨달음을 얻는 것이 무척 힘든 일도 아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삼 일만 아이와 놀아보면 된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삼 일만 눈 딱 감고 해 보면 아이와 노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된다.


 


아이와 노는 것이 아무리 즐거워도, 몸이 힘들어서 못할 때가 있다. 아빠를 Off 시켜야 할 때다. 그럴 때는 아이와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 것이 좋다. 나는 너무 피곤할 때는 집에 곧바로 가지 않고, 찜질방에서 두 세 시간 혼자 쉬기도 한다. 동네 놀이터에서 혼자 캔맥주를 마실 때도 있다.


 


아이와 함께 있는 데, 도저히 아빠를 On 시킬 수 없는 상태라면 Off 상태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두는 것이 좋다.


 


“지금 아빠가 너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어야 해. 아빠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아빠에게 장난치거나 하면 아빠는 아마 화가 날 거야. 그런 것을 원하지 않지. 한 시간만 푹 쉴 게. 그러고 나서 놀자.”


 



 


때로는 아내가 Off 선언을 대신해 주기도 한다. 아내는 내 얼굴만 보아도 컨디션을 안다.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려고 할 때 아내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절대로 아빠 건드리지 마.”


 


* 두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은 ‘아이는 아주 잠시 동안만 아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가 아이인 시기는 의외로 무척 짧다. 놀이 친구로서 아빠를 절실히 원하는 시기도 그리 길지 않다.


 


큰딸 아이도 둘째 아들도 초등학생이 되는 순간 아빠인 나는 스페어타이어 신세가 되었다. 초등 1학년인 둘째 아들은 주말에 함께 놀 친구가 있으면 친구와 놀고, 함께 놀 친구가 없으면 그제야 나를 찾는다. 큰딸 아이를 키운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이런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큰딸 아이가 이제 나와 ‘놀아 주는’ 것은 낚시를 가거나, 유원지에 갔을 때 정도다.


 


이런 일을 예감하고 올해 사업자등록을 냈다. 아이들이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면 그 공허함을 메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꼬드겨 아내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냈다.


“가정 경영 13년 했는데, 회사 경영 하나 못하겠어?”


 


결국 아내가 사장이고, 나는 기획실장이 되었다. 아내에게 사장을 하라고 권한 것은 13년을 같이 살아 본 경험으로 볼 때 나보다 사장일을 더 잘할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내 판단이 맞는 것 같다. 아내가 처음 회사 이름으로 정한 것은 '에듀비전'이었다. 그리고 홍보를 위해 블로그를 만들었다. 나는 무슨 욕을 먹든, 글을 쓸 때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블로그 이름인 '에듀 비전'을 알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사장인 아내는 딴 소리를 했다.


 


"에듀 자 들어간 이름은 너무 흔해. 그리고 우리가 교육 컨텐츠만 낼 것이 아니잖아? 좀 더 참신한 것 생각해 봐."


 


반나절 고민한 뒤, 회사 이름이 바뀌었다.


"컨텐츠 팩토리 갈릴레오.""


이게 지금 회사 이름이다.


 


그리고 요즘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주말에 애들하고 놀 일도 많지 않을 테니까, 주말에도 일 해.”


 


요즘 툭하면 주말에 아들 아이가 친구 집에 가서 놀거나,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불러서 놀거나 한다. 아내가 적극적으로 같은 반 아이들의 주말 놀이를 기획하고 실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주말에도 하루 종일 일을 한다. 죽어라고 일만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이 키우는 재미나, 회사 키우는 재미나, 비슷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김지룡 (http://blog.naver.com/edu_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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