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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수요일


산하


 


PD 짓도 반 점쟁이 짓이라 딱  사람 만나고 청진기(?) 대 보면 견적이 딱 나와.   왕건이다, 별 거 아니다, 내지는 사기다 정도는 분류가 된단 말씀이지.  남의 불행을 아이템으로 삼는 처지에 꼭 그렇게 싸가지없이 표현해야 되겠냐고  힐난하지는 말아 줘.  나한테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단 말씀이지.   그리고 기실 지뢰 밟았다고 할 정도로 골탕을 톡톡히 먹는 일도 많아.



나 나름 관대한 사람이야.  참을성도  그렇게 처지는 편은 아니고 말이지.    근데  판소리에 문외환이지만  세상 사람들아 이 내 말 좀 들어보소 하면서 목청 틔우고 싶은 일이 있었어.


 



4년 전..... 긴급출동  SOS란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도 전, 파일럿이라고 하는 이른바 견본 프로그램에 똥줄이 탈 때의 일이야.  가정폭력 관련 단체에서조차 이런 걸로 장사하려 드느냐고 무지하게 구박받고, 또 영업사원처럼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고 다니기도 하고, 아침 드라마에 제보 스크롤 띄우고는 이제나 저제나 전화통 앞을 지키고 있을 때였어.  그런데 어느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었어.  자기 딸이 무지하게 맞고 산다는 거지.


 




가서 만났을 때 좀 느낌이 이상했어. 이러이러하다 설명을 하는 와중에 할머니가 말을 끊더니 딸더러 이러더군. "너 네 신랑한테 좀 맞아야겠다. 그걸 카메라로 찍어야 하니까." 그래. 우리야  그런 현장을 잡아야 하지. 그런데 그 말을 내놓고는 못하지. 내력을 캐고봤더니 사위가 다소 폭력적이긴 한데 문제의 핵심은 그 집안이 친정어머니의 소작인 집안이었고 결혼 때부터 반대가 극심했으며 희한하게도 어떻게 하면 이혼을 시키느냐 하는 것이 그 어머니의 주요 관심사였다는 데 있었어.



일단 취재는 시작됐어. 친정엄마가 별나든 말든 남편이 폭력으로 아내를 굴종시키려 든다면 그것은 안된다고 옐로우 카드를 내밀어야 한다는 게 우리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별로 이상도 없고, 특기사항도 없어서 유야무야될 상황에 처했지. 솔직히 아쉽기보다는 홀가분했지.  달가운 아이템은 아니었으니.


 


그런데 모처럼 일찍 들어간 날 갑자기 전화가 왔어 문제의 할머니였어.  "저 나쁜 새끼가...... 저 나쁜 새끼가..... 우리 딸 머리에 칼을 들이대고..... 찌르려고 해요 어떡하지?  애는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해요?" 


 


벼락같이 잠옷을 벗어던지고 뛰어나갔지.  술 먹고 있던 조연출 불러내고 꿀같은 휴식을 취하고 계시던  봉고차 기장님까지 득달같이 호출해서 단숨에 경기도 남쪽까지 튀었다.  정말이지 단숨이었어. 아내의 협조 하에 달아놓은 CC TV 에 찍혔을 그림을 상상하면서 마치 봉고차가 적토마라도 되는 듯 쿵쿵 발을 굴러 댔지. 그날 아마도 속도위반으로 두어번은 카메라에 찍혔을 게다.   시속 150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을성 싶으니까.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해서 아내를 불러 내서 만났는데 이 여자분 어리둥절한 눈치야.  멍든 자욱 없는지 물어보며 요모조모 살피는 내게 핀잔같이 던진 한 마디. "말싸움했는데 무슨 멍은 멍이에요."  아니 아줌마. 우린 지금 당신 남편이 칼 들고 설친다고 왔단 말이야...... 멀뚱멀뚱한 아내에게 친정엄마의 제보를 얘기했더니 이번엔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엄마가 집에 왔을 때 저는 소파에 누워 있고 남편이 사과 깎고 있었어요.   그때 말싸움이 있었어요. 그게 다예요." 



CC TV를 들여다봐도 그게 전부였어. 남편이 칼을 거꾸로 쥐고 아내 머리를 겨냥하지도 않았고 호프집 주인 답게 사과 예쁘게 깎아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말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삿대질이 오가는 차에 친정엄마가 들어왔던 거야. 사과 깎던 칼을 본 친정엄마는 바로 뛰쳐나가서 우리한테 전화를 한 거고.  그리고는 바로 들어가서 딸을 보위(?)하기 위해 나섰다가 머쓱한 채 물러선 것이 사태의 알파와 오메가였어.   터지는 분통을 온몸으로 억누르면서 볼멘 목소리로 물었지.  "칼로 찌르려던 것은 아닌갑다"라고 연락해 주면 예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잖느냐, 할머니의 답이 걸작이었어.  "머리에 칼이 가까이 간 건 맞지 않느냐." 


 




밤잠 물리치고 비상등을 켜고 달려오게 만들었던 '머리에 칼'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어. 그리고 이 아이템을 꼬깃꼬깃 접혀 쓰레기통에 처넣어졌고.   그 뒤로도 할머니는 세 번이나 더 전화가 왔었어.  한 번은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해서 혹시나 싶어 알아봤더니 중이염 치료를 받은 거였고 , 납치(?)됐다고 발 동동 굴렀을 때는 부부가 같이 찜질방에 가 있었더군.  


 


나중에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드릴 수가 없으니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모질게 말하게 됐고 내친김에 "실례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라고 날카롭게 다그침으로써 매조지를 지었지. 어떻게 이런 뻥튀기를 그토록 스스럼없이 튀겨낼 수 있나 말이야.   아무리 사위가 밉고 딸이 안스러운들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할머니의 '구라'는 상식을 넘어서 있었지.  오죽하면 내가 서슴지 않고 '또라이 할머니'로 불렀을까.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무례하게 (물론 면전에서야 그러지 않았지만) 별명을 지어 불렀던 것이 적잖이 미안해진다.    그래도 할머니는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오해하거나 불린 것이지만 장난같은 협박 전화, 그나마 일하는 아주머니가 대신 받은 전화 속의 빵빵빵 총성 흉내를 듣고서 '괴한'으로부터  '권총 협박'을 당했다는 SF를 창조해 내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잖아.



무슨 매트릭스도 아니고 전화를 걸던 괴한이 휘리릭 집에까지 나타나서 협박을 해 댔다고 침을 튀기는 것도 어이 실종 신고를 낼 판인데 ,소총 한 자루 없어지면 대통령까지 보고된다는 썰이 엄존하는 대한민국에서 권총찬 테러리스트를 경호원이 그냥 놔 줬다는 설레발에 이르면 이건 과장과 구라의 영역을 넘어 망상의 세계에 진입한 것 같아서 안스럽기만 할 뿐. 



그래. 뭐 어쨌든 협박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  할머니 딸의 머리 근처에 칼이 다가갔던 것만큼은 분명하듯 말이야.  살다보면 참 희한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단 말씀이야.    요즘 내가 희망하는 삶은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사는 것이야.  아마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기이하여 10년이 하루 같을 거 같단 말이지.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사는 건 어떻냐고? 알면서 왜 묻나.


 


 


산하(nasanha@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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