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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6.수요일




죽지않는돌고래






1.




지금부터 10년쯤 전일까. 아버지가 독립유공자 후손 모임에 갔다 온 날로 기억한다.




 




‘허! 우리 집이 두 번째로 잘사는것 같다...’




 




그가 모임에 갔다 온 후, 허탈해 하며 내던진 첫마디다. 내가 사는 지역의 독립유공자 후손 중에서 우리 집이 두 번째로 잘 산다는 뜻이었다.




 







 




자식에게 본인의 고생을 물려주기 싫은 탓이었을까. 나는 별 부족함 없이 자랐다. 적어도 사고 싶은 책을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철이 들고서야 알았지만 나의 풍족함과는 반대로 어머니가 시집 올 때만 해도 집안에 빛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아버지, 어머니 모두 직장이 있었고 먹물(교육)이 든 할아버지가 스스로의 용돈벌이를 한 덕에 그 빛은 빨리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지역에서 두 번째로 잘 살 정도는 아니었다. 이사를 하면서 눈에 띄게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 적어도 어떤 지역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라면 준 재벌급 아닌가. 다섯 식구가 50평 남짓한 아파트로 이사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는 아니었다.




 







 




<사진 설명 :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김영욱)와 할머니(장갑조). 증조부는 수재 소리를 듣는 아들(조부)이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식민지 교육을 받아 봤자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차라리 신문물을 배워와 일본을 이기라며 당시로서는 적진과도 같았던 그곳으로 아들을 유학보내는 도박을 감행한다. '재산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머리에 든 것은 뺏어 갈 수 없을 것 아닌가?.' 라는 이유에서였다.




 




조부는 와세다 대학에 들어 갔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정 수준의 영어 통역이 가능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며 손자였기에 일본에서도 매주 동경 경시청에 불려가 신원을 확인받았다. 때때로 몇대의 뺨도 맞아야 했다.>




 




 




 




2. 




유전적인 영향인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돈이 안 되는 일을 좋아했다. 고조부(김종일)는 가뭄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을 위해 곳간을 푸는 사람이었다. 지역민들의 기근을 면하게 한 공로로 고종황제시 8도유림과 도유사가 인정하는 표창을 받은 걸 보면 그 규모가 작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고 평생 동학운동과 항일운동에 몸 바쳤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증조부(김정태)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 진영 제2차 3·1만세시위를 이끌었는데 주모자 가운데 최연소(19세)였다.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치르고 손이 불구가 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이 땅의 광복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운동가들의 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바로 1945 8 15.




 




 




 









<사진 설명 : 왼쪽이 독립운동가 김정태, 오른쪽이 항일운동가 김종일이다. 둘은 부자관계이며 나에게는 증조부와 고조부가 된다. 안타깝게도 고조부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독립운동가에 명단을 올리지 못했고 문중에서만 이를 기념하고 있다. 아버지인 고조부를 따라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던 증조부는 돌아가신지 40년 뒤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실 또한 조부와 부친이 애쓰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르는 역사의 기록이 될뻔한 일이다. 




 




지금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 후손들이 못 배우고 가난할 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선조의 독립운동을 증명할 문서를 찾고 보관할 정도로 똑똑하지 못하다. 개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자신이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 최하층민이라 불리는 사람들.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며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무시당하는 이들이 그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3. 




백범 일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겨울철이라 그리하는지 겉옷만 벗기고 양직(洋織) 속옷은 입힌 채로 결박하고 때릴 때,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다 벗고 맞겠다.”며 매번 알몸으로 매를 받아서, 살이 벗겨질 뿐 아니라 온전한 살가죽이라곤 없었다.」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왔다. 오히려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 손이 잘리면 발로, 발이 잘리면 몸뚱이로 독립운동을 할 만큼 뜻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일개 독재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싸웠던 상대에 비하면 독재자들은 우스운 잔챙이로 보였을지 모른다.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연스레 민주화 운동가로 바뀌었다. 그들이 죽으면 자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독재정권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독립운동가라는 명예가 있으니 국민들의 눈을 봐서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민족반역자를 대거 등용하고 처벌도 흐지부지하게 끝내 버렸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권력자에게는 총, 칼보다 더한 무기가 있었으니 그 무기의 이름이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반공」이다.




 




 




독재자는 반공논리를 들먹여서 정권에 반하는 사람을 잡아들이고 살해했다. 그 중 가장 잔혹했던 것이 바로 「보도연맹사건」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영신(고 이은주)을 비롯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총살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또 최규석의 만화 ‘백도씨’에서는 주인공 할머니가 영문도 모른 채 동네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바로 ‘보도연맹’이다.




 




쉽게 말해 이승만 정권이 빨갱이로 몰아 국민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인데, 단군이래로 가장 큰 국가적 범죄로 손꼽힌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조차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제대로 검색조차 되지 않던 철저하게 은폐된 범죄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들어와서야 겨우 진실을 규명하는 단체가 만들어 졌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이마저도 흐지부지 되는 중이다.




 




진실이 밝혀질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친일파와 독재정권의 후예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나온 논리가 이것이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국민을 분열시키지 마라.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사진 설명 : 김구와 이승만의 사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김구의 경우, 생애 마지막에 '진정한 민족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꽃피운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물론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라는 말은 아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그 훌륭함에 비해 약간 박하게 줄 수 밖에 없었던 적도 존재했다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남한 단독 선거가 영원한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거라고 주장했지만 한때는 이승만의 단정론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만큼 이데올로기 정체성이 약했다. 전통적인 신의를 중요시한 점은 인간적으로 매우 훌륭한 부분이나 한살 많은 이승만을 꼬박꼬박 형님이라 부르며 어쩌면 필요이상으로 깍듯하게 대했던 점은 정치가로서의 약점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인생전반을 살펴보면 이승만과는 정반대로 너무 순수했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신기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전무했다.




 




(그에 비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무서울 정도로 그 직함에 집착했다.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되고 신채호에게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집착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재밌는 점은 미국의 한인사회, 독립운동 활동, 그리고 국내의 정치활동에서도 그는 항상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이승만은 학교 공부에 한해서 만큼은 천재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부하는 머리와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비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현대사 최초의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지막 1년, 김구는 정치가로서 약점이라고 생각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극복했다. 생애의 끝자락에서 이념을 뛰어 넘었고, 한반도 한쪽만이 아닌 전체를 생각하는 민족 지도자가 되었다. 목숨을 건 독립운동,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뜨거운 진정성, 거기에 마지막 1년이 더해져 대한민국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다.




 




사실 서거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가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인물에 순위를 올려 놓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과거의 위인이나 역대의 몇몇 대통령과 달리 김구는 오랜기간 국가단위로 주도하는 '영웅만들기'나 '상징 만들기'의 주체가 되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언론에서 그를 잊어 버리지 않도록 수십년간 지원사격을 해준 적도 없다. 그나마 일정규모 이상으로 김구를 기념하는 행사가 커진 것도 현대사에서 최근의 일이라 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랜기간 정권과 기득권층이 그의 존재를 달가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했음에도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승승장구 했던 것에 비해 계속해서 민중들이 그를 추적하고 응징을 시도한 것만 봐도 정권과 민중의 시각차이를 알 수 있다.




 




그와 대척점에 섰던 인물들은 정권, 언론, 학자에 의해 추앙받고 신격화되어 왔지만 김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도 미개척지라고 할만큼 부족한 현실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언론이나 정권의 지원 하나 없이 그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유지해온 인물도 드문데 말이다.




 




나는 김구가 비열한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에 대한 반발심에 무작정 완벽한 지도자로 신격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반대로 과격하기만한 독립운동가로 비춰지는 얄팍한 평가 또한 바라지 않는다.




 




김구는 그가 생에서 보여 주었던 만큼, 반드시 딱 그만큼만 평가받아야 할 인물이다. 그 위치까지 가면서도 소탈하고 순박하며 순수한 열정만으로 나라를 사랑한 김구였기에, 그럼에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나라를 지키는 문지기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스스로도 신격화를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 그는 엄중하고 냉정한 잣대의 평가를 거친 후에도 민중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 덧붙이는 글 :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증조부는 백범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천리길을 마다않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김구와 뜻을 같이했던 지식인이라면 그가 생사를 달리한 순간, 본능적으로 조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두동강 난 한반도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당시 증조부에게는 일경의 고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대현실이었을 것이다.




 




피격을 당한 김구는 현장에서 즉사한 탓에 외부로 시신을 이동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백범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 둘 경교장으로 모여들어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아래의 사진은 그 구전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백범 서거 당일, 경교장 마당에 엎드려 통곡하는 민중들. 이 사진은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가 서거 당일 경교장 2층 백범 집무실에서 찍은 것으로, 사진 하단에 안두희가 쏜 총알의 탄흔이 선연히 보인다.




 




 




*. 밑줄 친 부분은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님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Profile
딴지일보 편집장. 홍석동 납치사건, 김규열 선장사건, 도박 묵시록 등을 취재했습니다. 밤낮없이 시달린 필진들에게 밤길 조심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북극(혹은 남극)에 사는 것이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