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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태우 시절


노태우 시절에는 정리할 만한 독도정책이 없었다. (88올림픽 때문이었는지...)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오고 간 대화도 없었고, 국내 차원에서 독도에 대한 어떠한 정책을 내놓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노태우 시절 독도정책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노태우 정부 시절 독도 현안 정리>


1988

다케시타

노보루

노태우

 


2월 최종덕의 딸 최경숙·사위 조준기 내외 독도의 유일한 주민으로 거주.

9월 16일 소련군용기, 독도 근해를 비행.


1989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노태우

 

 

1990

가이후

도시키

노태우

 

7월 27일 독도를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

1991

가이후

도시키

노태우

 

 

11월 17일 김성도·김신열 부부가 독도로 전입(울릉군 울릉읍 산 63번지)

12월 27일 독도에 일반전화 개통.

 

1992

미야자와

기이치

노태우

 

2월 14일 약 50톤급 일본 순시선 1척 독도영해 침범.

4월 '대일본정의국수회'의 2명이 주일한국대사관에 난입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난동.

 

11월 7일 울릉도·독도지역 특정지역으로 개발하기로 함.




2. 김영삼 시절


드디어! 군사정부가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은 정부 출범과 동시에 금융실명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군사정부에 대한 심판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대해 친선정책을 추진하였고,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 또한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일 양국은 1993년 11월 경주 정상회담을 통해 과거사 문제의 원만한 해결과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구축을 위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 친선관계는 1995년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5년은 해방 50주년이자 국교정상화 3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김영삼은 해방 50주년을 강조하며 '일제유산 청산' 정책을 그만의 카리스마로 강하게 추진하게 되었다. '일제유산 척결'의 시작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시작하였다. 한국 국민들은 김영삼의 이러한 결단력에 박수를 보냈지만, 일본과 한국 내 몇몇 문화재 학자나 역사학자들의 경우에는 '폭파'라는 극단적인 철거가 아닌 일부를 유지하여 연구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고, 일본 정부는 일본에서 건물을 운반해가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신호도 보내왔지만, 김영삼의 불도저(?)와 같은 의지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1995년 광복절을 앞둔 8월 7일, 조선총독부는 산산조각이 나며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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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를 무참히 철거함으로써 김영삼의 국내 지지율은 90%에 육박하게 되었지만, 일본에게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후 김영삼은 반일본 정책을 세운 정권마냥 일본의 과거사에 대하여 무차별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또한 1995년을 기점으로 독도나 역사문제를 조금씩 '왜곡'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그 중 한 예가 일본 문부과학성이 1995년도에 검인정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용 지리부도에 동해 상 한·일 국경선을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바다 위에 설정하여 마치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처리한 일이다. 이렇게 역사전쟁의 기운이 스믈스믈 올라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김영삼 대통령의 <버리장머리 발언>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995년 11월 14일 한·중정상회담(김영삼-강택민) 후 한국과 중국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한 기자가 양국 간에 논의된 평화 협력방안에 대하여 질문을 했는데, 이에 대해 김영삼은 동문서답을 한다.


"내가 취임 후 일본 총리가 네 번 바뀌었으며, 네 사람 모두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역사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과거 식민지로서 우리에게 그렇게 잔혹하게 한 데 대해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의 토대위에서 미래로 나가자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도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을 포함해 건국 후 서른 번은 넘을 것이다. 이번에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


'청와대 만찬 그룹총수 안 불러 눈길, 장쩌민 주석 방한 이모저모' 

1995년 11월 14일 한겨레 신문



개인적으로 들어도 기분 나쁠 말을... 일본이 참여하지도 않은 한·중 회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 <버르장머리 발언>은 11월 14일 저녁부터 일본의 방송과 신문에 보도되었다. 처음에 <버르장머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몰라 조금 당황했다는 후문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일본은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산케이 신문>
"품위없는 표현방식"


<요미우리 신문>
"'버르장머리'는 손윗사람이 젊은이의 나쁜 버릇을 꾸짖을 때 쓰는 속어"


<아사히 신문>
"대통령의 발언으로는 좀 감정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분노는 이해할 수 있다"(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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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머리 발언>건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이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았으나, 본게임은 1996년부터 시작된다.

1996년 1월 말경 일본 언론들이 줄줄이 '독도문제'를 다룬 데 이어, 1996년 2월 한국 측이 독도 접안시설 공사에 착수하자(독도밀약이 깨지는 순간!!!!!!!!!) 일본이 전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1996년 2월 8일에는 일본수상 하시모토가 한국이 독도에 '선박 접안시설 공사'를 추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일본 기자들의 질문에 '일본자위대 순시선을 파견하여 현황을 파악 하겠다'고 언급한 것이 우리 국내 일간지 및 TV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인 동년 2월 9일에는 일본 외상 이케다 유키히코가 공개적으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호칭)는 일본 땅이다"라고 정면으로 치고 나옴으로써 한·일간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일본 수뇌부 망언에 분노한 우리 국민들 남녀노소는 전국적으로 각계각층이 분연히 일어나서 일본 수상 및 외상의 망언을 규탄하고 심지어 일부 일본상품에 대해서는 불매운동까지 벌이기에 이른다. 이러한 반일감정의 연장 선상에서 김영삼은 KBS방송으로 독도 경비대장과의 통화내용을 방송했는데, 그 내용은 독도를 잘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한일관계의 경직으로 연결되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3. 일본 외교술에 당하다

 

1995년 10월 무라야마 총리의 '한일병합의 법적 유효' 발언, 1996년 2월에는 이케다 외상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온 상황에서 하시모토 수상은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 설정에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는 것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라고 언급하여 독도를 경제수역의 기점으로 삼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 내용은 1996년 6월에 있었던 한일 제주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케다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이은 김영삼의 '독도수호령'이 있었기에 한일관계가 냉각된 후의 정상회담이었다. 사실 정상회담이 있기 3개월 전에도, 태국에서 아세아유럽정상회담(ASEM)에서 하시모토가 김영삼을 만나 200해리 경제적배타수역(EEZ)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있긴 했다. 이 때 역시 김영삼은 '독도는 우리 땅임. 그런 말은 하지마삼'이라는 태도를 취했고, 하시모토도 일단은 알겠다는 식으로 넘어갔었다. (이 때, 김영삼은 하시모토를 의심했어야 했다. 왜 도대체, 독도문제를 그 자리에서 꺼냈던 것일까 의심했어야 했다!)

 

1996년 6월 23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하시모토 일본 수상이 ASEM 때 제기했던 "신해양법에 의한 어업 기선 200해리에 독도가 포함되면 영유권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될 것이 우려된다"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영유권 문제와 어업 협정은 별개 문제로 하여 해결하자"고 답변한 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고 환영한다"고 화답했다. 딱히 큰 분쟁이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 측에서 계획한 고도의 심리전에 한국이 말려든 것이었다. 이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초안을 통해 본 독도분쟁에서도 다루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면에서 외교력이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오랜 기간 일본 정부가 제기해온 '한·일 양국 간에 독도 분쟁이 현안으로 존재 한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이는 '독도는 명백한 한국 영토로 분쟁과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한국정부가 최초로 일본 측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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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일본은 영유권 문제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언론들까지 나서서 김영삼 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태도변화를 '유연한 자세' 운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칭찬이지...


이렇듯 독도분쟁에서 주도권(?)을 일본이 가져가자 한국은 실책을 깨닫고 일본과의 모든 관계 속에서 독도를 주시하고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했다. 1996년 제주 한일정상회담 이후, 1997년 1월 25일 일본 규슈 벳부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산케이신문>, <NHK> 등 일본 언론들은 "하시모토 총리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으로 다케시미는 일본 고유 영토인 만큼 공사 중인 동대를 즉시 철거해달라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요청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의 이러한 태도는 한국 정부를 긴장시켰다. 언제 또 현란한 외교술을 쓸지 모르니, 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상회담일이 다가오자 일본 측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해치지 말자"면서 독도 문제 등을 의제에서 빼버렸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단 안심했지만,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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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국 측의 경계 태세가 풀어지자 일본 측은 대북정책 공조니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향상이니 대일 무역역조 시정 방안이니 하는 우호적인 의제들을 잔뜩 내세워 한국 측을 더 안심시켰다.


이 때문에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단지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만 했다. 그러나 하시모토의 발언에는 "경계 획정 및 어업협정 교섭에 관해서는 그간의 회담에서의 합의 사항을 기초로 영유권 문제와 분리하면서 교섭을 촉진하며 계속 노력을 기울이기로 재확인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본 측은 제주 회담 때 김영삼이 내놓은 제안을 정식 의제로 삼아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슬쩍 짚고 넘어감으로써 제안 자체를 기정사실화하여 회송하는 작업만 해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장 중요한 의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한구석에 끼워 넣어 슬쩍 처리하는 것이 '구헤이지 수법'이다. 이 전통적인 수법에 한국 측은 그대로 말려들고 말았다. 즉 이때는 그저 짚고 넘어갔던 문제가 그해 3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어업실무회의에서는 정식의제가 되었다. 한국 측이 이의를 제기하자 일본 측은 이렇게 반문했다.

 

"이 문제는 한국 대통령께서 제주 회담 때 제안하시고 벳부 회담 때 다시 재확인하신 것 아닙니까?"

 

이 한마디에 한국 측은 경계 획정 문제와 어업 문제를 분리해서 협상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료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는 일본의 치밀한 외교 앞에서 즉흥적인 한국 외교는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한국 측은 같은 해 10월 8일 도쿄에서 열린 제6차 어업실무자 회의에서 독도를 포함한 동해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사실상 동의해주고 말았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워딩(wording)을 따르자면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를 울릉도로 하였다는 것이다.


* 추가설명 * 유엔은 해양법으로 배타적경제수역(EEZ) 바다관할권을 12해리~200해리로 확대하게 하였다. 모든 국가들이 자신의 바다관할권을 200해리, 즉 최대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한국과 일본의 바다 거리가 400해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바다에 경계선을 별도로 정해야 했다. 여기에서 독도가 자기 관할 바다로 들어온다면 합법적으로 독도주변을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일본령임을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일본이 들고 나온 외교카드였다.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기양양하게 착공했던 독도 접인 시설이 11월 6일 완공되었다. 접안시설 준공식이 예정되자 일본은 행사를 소규모로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야나이 외무성 차관은 김태지 지사에게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이므로 독도에 건설한 시설을 모두 철거하라"고 요구하였고, 일본 정부는 한국의 독도 접안시설에 완공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시설철거를 요구하였다. 외무부 당국자는 "야나이 순지 일 외무성 사무차관이 이날 오후 김태지 주일대사를 불러 독도접안시설 완공에 대해 항의하고 이를 철거할 것을 요구해 왔다"고 하자 김태지 대사는 "독도는 우리 고유의 영토이므로 일본 쪽의 '항의'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의 눈치 아닌 눈치(?)를 봐야했던 외무부는 일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준공식 행시를 반대했고, 외무부의 건의를 받아들인 청와대에서는 관계 장관 대신 차관만 보내 건설업자 등 100명의 하객과 함께, 그것도 독도가 아닌 울릉도의 독도박물관 앞에서 준공식을 아주 조촐히 취하였다. 독도밀약이 파기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외교적 실책 때문에 김영삼의 공(功) 하나가 묻혀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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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써서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이 잠정수역에 동의를 하고 그 경계를 울릉도로 설정하게 된 배경에는... 1997년 12월, IMF가 한몫을 했다. 필자는 경제에 있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지만, 골자를 보면, 1997년 12월 하시모토는 국가부도위기에 처한 한국에게 대출금 80억 달러를 환수해 가버린 일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경제적 궁지에 몰린 1998년 1월 23일(아직 김영삼 정부), 일방적으로 우리 정부에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근간의 하나이며 그 후 30년간 한·일 어업관계를 규율하여 온 기존 한·일 어업협정의 파기를 통고하여 왔다. 이러한 한일의 어업관계 경제관계와 연동되어 진행된 독도분쟁, 독도영유권 다툼은 자연스럽게 김대중 정부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김영삼정부시절 독도 현안 정리>

1993

미야자와

기이치

김영삼

 

한일외무장관 회담, 무토 가분외상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일본영토라고 주장.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전시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강제성 인정.

11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사죄발언'

 

10월 29일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독도가 한국 땅 임을 입증하는 고지도 발견.

1994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김영삼

2월 11일 일본 해양경찰 소속 순시선, 독도영해 침범.

3월 24일 1996년까지 독도 동도에 부두를 만들기로 계획수립.

1995

무라야마

도미이치

김영삼

 

1월 일본여당 총선에서 '독도침탈'용어 사용.

한국의 독도접안시설 공사 착공에 반발.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 발언.

11월 에토타카미 총무청 장관 '무라야마 담화' 부정.

 

독도접안시설 공사 착공.

에토타카미의 발언에 대해 김영삼 정부, 한일 정상회담 거부.

1996

무라야마

도미이치

김영삼

배타적 경제수역(EEZ) 설정 시 일본이 독도를 기점으로 삼을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한·일 양국 마찰.

 

2월 9일 일본 이케다 외상 다케시마 영유권 천명, "죽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니 한국은 경찰수비대를 즉각 철수시키고 시설물을 철거하라."

2월 일본 연립 여당 "독도가 지난 1905년 일본 영토로 등록돼 시마네(島根)현이 관할토록 결정했는데도 한국측은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인정했다. 한국측의 독도 접안시설 공사에 적극 대처하라"

6월 5일 일본은 독도 기점으로 200해리 EEZ채택을 결의하고, EEZ구획선을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확정하였음을 선언.

9월 30일 일본 자민당의 총선 공약 "독도는 일본 영토임을 모든 기회를 동원해 한국 측에 주장한다"

10월 하시모토 류타로 독도 영유권 주장.

10월 20일 일본 자민당, 독도·조어도·쿠릴열도 확보를 총선 공약으로 내세움.

10월 22일 외무성 하시모토 히로시(橋本恕) 대변인 "다케시마는 우리 영토며 이 같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일본 외상의 주장에 대해 "독도는 한국 고유의 영토이고 한국이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영토이기 때문에 접안공사는 한국의 정당한 주권행사이므로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밝히고 독도 주변수역을 공동관리수역으로 할 수 없음을 주장.

4월 접안 시설 공사 개시.

1997

하시모토

류타로

김영삼

 

3월 6~7일 한국과 일본은 EEZ경계문제와 어업협력협의를 분리 협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서울에서 EEZ경계획정 협의와는 별도로 한일간 어업협의 실무자 회의가 시작됨(제1차 한일 어업협의 실무회담).

10월 10일 제6차 한일어업실무자 회담이 동경에서 열림. 한국은 동해에 잠정수역을 설정하자고 하는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임.

 

1월 일본 외교백서에서 일본 외교 10대 지침의 하나로 독도 찰환외교 방침을 설정.

4월 11일 일본 자민당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독도는 일본영토이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처할 각오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외교정책지침을 마련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

6월 2일 일본정부, 독도개발계획 철회요구.

 

 

7월 한국정부는 울릉도를 한국 EEZ 기점으로 위한다고 발표함. 그 후 양국 EEZ 구획선을 울릉도와 오키도의 중간선을 제의함(1년 2개월 후).

8월 8일 울릉도 약수공원에 독도박물관(관장 이종학) 개관.

11월 6일 독도 동도에 접안시설 준공. 접안능력 500톤급, 총사업비 172억 4천 3백만원, 면적 569평.

11월 21일 독도 서도에 '어민숙소' 등 준공. 35.97평에 2층건물로 수용인원 25명, 사업비 4억 8천 만원.

12월 13일 법률 제5447호로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 보존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매번 여러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독도 문제를 이야기 할 때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시기의 독도문제다. 그런 만큼 다음 번에는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준으로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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