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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주제인만큼, 공들여 준비한 기사에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환영해 주시고 많이 봐주셔서 감사하다. 독자 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자료조사와 관련취재를 열심히 이어나가며 쓰겠다. 

 

자, 그럼 오늘 오늘도 뒷세계로 들어가 보자.  

 

1. 뒷세계에서 성공한 조직의 비결은

 

먀아구치구미 다이몬(代紋).jpg

 

 

일본 야쿠자의 대표격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살인집단”, “피의 역사”, “전국제패”…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 구성원들의 전투력과 압도적인 조직력을 배경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전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싸움만  한다고 오야붕이 있는 것도, 조직이 성장할 있는 것도 아니다. 야마구치구미가 일본 최대의 거대 야쿠자 조직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개인 단위로 보면 싸우는 능력은 오야붕이 되기 위한 필수적 힘이라 하겠지만, 완력이 젊은이들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오야붕들이 야쿠자 세계에서 출세한 과정을 살펴보면, 싸움실력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의협심(義俠心), 꼬붕을 뭉치게 하는 통솔력, 전투를 이끄는 전술력, 다른 조직과의 관계를 감안하여 앞으로 짐작하는 통찰력, 이때다 싶으면 바로 움직일 있는 행동력 등등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

 

조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야마구치구미가 전국의 야쿠자 조직을 떨게 것에는 압도적인 전투력과 그로 인해 획득한 전력을 총동원할 있는 게 컸다. 한마디로 결속력과 전투력. 이 결속력과 전투력을 얻고 유지하는 것은 의협심만으로 모자르다.

 

먼저 경제력이 필요하다. 60년대 중반부터 무려 10 동안이나 계속된 경찰의 대대적 단속작전, <정상작전> 표적이 조직 중에서 야마구치구미만이 살아남을 있었던 이유에는 경제력이 있었다또 하나 중요한 점 '싸움 담당' '돈벌이 담당'을 나누고, 돈벌이 담당 그 자체는 합법적 사업활동을 벌여 자금을 조성했다는 점이다(물론 피라미드형 거대조직이 되어 버린 야마구치구미의 말단 조직에서는 불법행위로 돈을 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사업을 성공시킴에 있어 폭력만으론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있을 것이다. 당시 경제사회 상황에 유려하게 대응하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해 점에서 야마구치구미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쿠미쵸의 개인적 능력에 기초한 부분이 크지만 말이다).

 

핼러윈@야마구치구미 총본부(2).JPG

할로윈 야마구치구미 총본부

 

고베시 나다구() 있는 야마구치구미 총본부에서 할로윈 행사를 치러 화제가 적이 있다. 야쿠자에 대한 반발이 커지는 가운데 세상에 아부하는 '보여주기식 행사'라는 평가가 대세였다. 헌데 지역에선 반응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유는 무엇일까?  

 

 

2. 지역에서 인심을 얻은 이유 

야마구치구미는 옛날부터 명절 때마다 지역주민을 모시고 떡이나 떡국을 대접하는 행사를 치러왔었다. 경찰소방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던 고베대지진 때는 정부가 주춤대고 있는 중에도 일본 전국으로부터 식품음료는 물론 아기용 기저귀 여성용 생리대까지 온갖 생필품을 조달해, 피해지역 주민들에게 나누어줬다. 똥더미가 가설 화장실을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은 역시 야마구치구미였다.

 

2011 동북대지진 후에도 야마구치구미는 트럭에 자원물자를 싣고 피해지역에 뛰어들었다.  후에도 지원활동을 계속하던 야마구치구미 지원대도 있다.

 

재난을 맞아 지역의 질서 유지가 어려운 가운데 주민들이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이 바로 야마구치구미가 꾸린 '자경단' 활동이다. 약탈, 강간 등의 범죄가 발생하기 쉬운 혼란 속에서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이 팀을 짜고 순찰했.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경찰은 거의 쓸모가 없다(사건이 나야 출동하기 때문). 이 때 야쿠자의 기동력,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아웃로(outlaw)성이 악을 억눌러 주었고, 일반시민에게 마음 든든한 아군이 되었.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마구치구미가 선인가 악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 다시 말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선악론' 시각으로 접근하면 것이다. 시대마다 야마구치구미를 둘러싼 경제정치사회 상황, 야쿠자계 전체의 구조나 의식 변화부터 해서 주요 오야붕들이 살아온 사연이나 인간성 개인적 사정까지 꼼꼼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세히 쓰다보면 읽기 지루하거나 답답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기도 하고, 단순한 "범죄나 폭력의 역사"를 애정하는(?)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글을 마구 자를 가능성도 있지만(두고보자!), 나는 이왕 연재를 시작한만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그런 배경 사정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현명한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기대하며 본격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 

 

고베대지진 후 야마구치구미 총본부 앞(1995.1.).JPG

고베대지진 후 야마구치구미 총본부 앞 1995.1

 

 

 

3.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 뛰어든 '나카시(仲仕)' 세계

 

일본 효고(兵庫) 롯코산(六甲山) 기슭에 번지는 항구도시, 고베. 발전의 계기는 12세기 후반, 사상 처음 무사정권을 설립한 타이라노 키요모리(清盛) 송나라와의 무역을 위해 오오와다노토마리(大輪田泊, 고베항의 옛날 이름)를 정비한 것이.

 

시간이 흘러 1858년, 에도막부가 미국을 비롯한 서양국가와 통상조약을 맺음에 따라 고베는 10 후인 1868년부터 민간무역의 무대가 되었다. 이른바 자유무역의 시작. 사람, 물건, 돈이 대거 들어왔고 고베의 풍경은 죄다 바뀌었다. 고베가 지금과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띠게 것도 이 무렵이다.

 

이후 고베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계기로 급격한 산업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산업화 발달 따른 도시 성장의 이면에는 농어촌의 빈곤이 있기 마련이다. 고베가 무역도시로 급성장하기 위해서는 '가난함을 이긴 유입민'이라는 존재가 필수 요건이었다.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 역시 그런 도시 유입민 하나였다. 1881 아와지시마(淡路島, 오사카만을 사이에 두고 고베항 맞은편에 있는 ) 출생. 섬은 아예 농경지로 이용할 있는 땅이 적어 주민의 대다수가 어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화폐경제가 전면화되면서 상품가치가 낮은, 비싸게 파는 물고기밖에 잡히는 어장을 거점으로 어부의 생활은 생계 유지 자체가 곤란한 일이었다. 1906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아내 와키(ワキ) 아들 노보루() 데리고 고베의 땅을 밟았다.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jpg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

 

당시 야마구치 하루키치같은 아무것도 없이 고베 빈민가에 뛰어든 이들이 먹고사는 길은 크게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빈민가를 돌아다니는 도붓장수(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 사채업자한테 1(당시 액수) 정도를 대출받고 국산쌀과 비교적 수입쌀을 구매하고 섞어 파는 것이다. 사채업자에게는 원금 1엔에 이자 10 정도를 붙여 갚았다고 하니 하루 이자율이 1% 가량이다. 엄청나게 높은 이자율이다.

 

하나의 길은 나카시(仲仕). 즉, 항만노동자가 되는 길이었다. (정확히는 항구에 붙어 정박한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오카나카시(陸仲仕, 육지에서 일하는 나카시)와 항구에서 약간 떨어진 앞바다에 정박한 배에서 일하는 오키나카시(沖仲仕) 구분되나 본문에서는 오키나카시만 언급한다) 나카시는 하역작업(화물선에 짐을 싣고 내리는 ) 하는 인부로 일명 곤조(権蔵)라고도 불리었다. 노동환경은 가혹했다. 고베항 나카시의 표준적인 노동시간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일의 내용은 예를 들어 150킬로를 실은 수레를 끌거나 마대에 들어간 200킬로를 어깨에 올려놓고 나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작 와닿지 않는데 당시 오키나카시의 가혹한 노동생활환경을 상징하는 이런 노래가 있다.

 

앞바다의 곤조가 인간이라면 나비, 잠자리도 새가 된다

(沖の権蔵(ゴンゾ)が人間ならば、チョウチョ、トンボも鳥のうち)

 

인간으로 여길 없을 정도였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힘든 노동환경에 놓여 있는 나카시지만 "가혹하다"라는 말에 여러 함의가 있듯, 나카시를 둘러싼 환경에도 가혹함의 단계가 있었다. 즉, 나카시는 고용형태별로 삼 단계로 나뉘어져 있었. 하나는 선주(船主, 배의 주인) 하주(荷主, 짐의 주인) 계약을 맺은 하역도급회사 소속의 나카시, 죠닌소쿠(常人足, 상시고용 인부). 하나는 닌소쿠베야(人足部屋, 인부방)라고 불리는, 나카시 알선업체 소속의 나카시인 헤야닌소쿠(部屋人足, 인부). 그리고 나카시 중에서도 최하층에 속한 이들은 카이닌소쿠(買人足, 그때그때 사는 인부)라고 불리는, 요컨대 일용직 나카시가 있.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고베에 왔을 당시, 오키나카시 총 수는 6,000. 죠닌소쿠, 헤야닌소쿠가 각각 1,000명씩, 나머지 4,000명이 일용직 노동자인 카이닌소쿠였다. 고베에서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나카시의 무려 3분의 2 일용직으로 일을 하던 셈이다. 이런 현상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역작업은 싣고 내리는 짐이 있어야 성립되는 일인데 항구를 오가는 화물량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크게 바뀌기 때문이었. 일반적인 직업에 비해 일손에 대한 수요 변동이 크다는 하역노동의 특성이 이러한 기형적 고용형태 구조를 조성한 것이다.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고베에 봉착해서 제일 먼저 몸을 담은 것은 오키나카시, 그것도 (신참자로서는 당연하지만) 카이닌소쿠였다. 당시 카이닌소쿠의 일급은 하루당 30 내지 40. 그러나 실제로 지급되는 액수는 거기서 점심으로 제공되는 주먹밥 값을 금액이었다. 빈민가에 있는 숙박시설에서 하루 자면 5전에서 10전이 나가고 역시 빈민가에 있는 이른바 이치젠메시야(一膳飯屋, 공깃밥 그릇 판다는 뜻의 소박한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려면 공깃밥 하나 1전 5, 그릇이 1 정도였다. 아내와 아들을 같이 데리고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빈민가에 가족끼리 사는 숙소를 확보해야 했기에 경제적 부담은 이상이었다고 잠작된다.

 

오키나카시의 모습.JPG

오키나카시의 모습

 

 

 

4. 고베 야쿠자의 원류

 

오키나카시가 열악한 고용형태와 가혹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나카시 노동자들의 연대,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교섭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베의 오키나카시들은 그날 그날의 수요에 따라 일을 분배받는 일용직 형태가 대세였다는 점은 위에서 언급했.

 

때문에 카이닌소쿠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나카시 전체가 뭉치지 못하여 산산조각으로 끼리끼리 과열한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혜택은 당시 '고양이' 또는 '남경'이라고 불리던 중국인 하역하청업체나 '야시키(屋敷, 저택)'라고 불리던 외국인 경영의 대규모 상업시설, 상관(商館) 등이었다. 물론 배경에는 중국(청나라)이 서양 선주, 하주가 있었다.

 

오키나카시의 노동환경과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힘이 있는 이들 '갑' 맞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 그러기 위한 첫 걸음이 바로 코베 오키나카시 전체(노동시장) 튼튼히 뭉치게 하도록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카시는 워 거친 기질을 갖고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쌍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면 노동자를 관리하는 노하우를 갖추면서 최종적으로는 폭력을 발동시킬 있는 이들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토미나가 카메키치(富永亀吉) 오야붕이 있었다는 것이 고베의 천만다행이었다. 토미나가 카메키치는 규슈치쿠호(筑豊, 메이지시대 초기부터 정부의 정책으로 탄전(炭田)개발이 추진되었다) 거물 오야붕 요시다 이소키치(吉田磯吉) 꼬붕이자 탄광의 요진보(用心棒, 사설 경비원) 하던 남자였다. 토미나가 카메키치는 치쿠호 탄전에서 취해지던 노동자 관리방식인 '나야제도(納屋制度)' 고베에 이식하였다. 노동자들을 나야(納屋, 하꼬방. 원래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헛간을 뜻함)라고 불리는 숙소에 살게 하며 임금을 포함해 생활 전반을 관리하는 방식인데, 거기서 야쿠자가 관리 실무를 맡았던 것이다. 토미나가 카메키치는 이러한 노무관리 방식에 능통했고 방식을 고베의 항만노동이나 토건노동에 활용할 있었다.

 

다만 토미나가 카메키치가 고베의 모든 오키나카시를 자기 회사에 고용하거나 노동조합을 만들게 것은 아니었다. 토미나가 카메키치를 두목으로 치쿠호 출신 야쿠자가 분배의 '시키리(仕切り, 관리하거나 조정함)'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질서한 노동공급을 조절, 고베 항만하역의 원사업자나 외국 상관의 마구잡이식 후려치기를 억제하는 힘을 만들었던 셈이 되겠다. 배경에 폭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야쿠자로서의 '가오()' 가지고 하루하루를 먹고살던 나카시들을 일종의 노동조직으로 정비하고 도급노동력 공급자의 단체로 만들어 것이다.

 

도쿄나 요코하마와 비교하여 고베 항만노동자들 사이의 오야붕-꼬붕 관계가 농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설도 있다. 고베는 토미나가 카메키치 오야붕이 도입한 치쿠호 방식 덕분 항만노동 현장에 야쿠자가 깊숙이 침투했으며, 항만노동자와 야쿠자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이야기이다.

 

코베항(명치시대 중기).jpg

고베항, 메이지시대 중기

 

 

 

5. 오시마(大島) 오야붕과의 만남, 그리고 야마구치구미의 탄생

 

이야기를 야마구치 하루키치로 되돌리자. 그는 탄탄한 몸매와 든든한 체력, 게다가 어부로서 바다에서 일을 경험까지 갖췄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오키나카시가 되기 위해 최소한으로 갖고 있어야 요소이다.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갖고 있던 뛰어난 특성은 오히려 겉보기에 나타나는 부분에 있었다. 그는 말은 없으나 인내심이 강했고, 무엇보다 오키나카시 기질로 가장 중요한, 남이 싫어하는 , 어려운 일을 앞장서서 기꺼이 맡는 행동원리에 따랐던 것이다. 향상심(向上心) 혹은 일꾼으로서의 자존심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팀을 꾸려 일하는 오키나카시의 세계에서 이러한 남자가 주목을 받을  없다. 어느새 코가시라(小頭, 하역작업을 편성되는 팀의 ) 닌소쿠베야(인부방) 오야카타(親方, 사장/오야붕)한테 높이 평가받게 되며 젊은 나카시들은 그를 '형님', '오야붕'으로 받들어 모셔 서서히 얻게 된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낸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사이에 카이닌소쿠 살이에서 벗어나 중견급 닌소쿠베야(인부방) 쿠라하시구미(倉橋組) 들어가며 헤야닌소쿠( 인부) 일을 하게 되었.

 

그러다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인생을 크게 움직이게 번째 계기가 다가온다. 오시마구미(大島組)의 리더, 오시마 히데키치(大島秀吉)와의 만남이다. 1913,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오시마 오야붕의 샤테이사카즈키(舎弟盃), 즉, 오시마 오야붕의 샤테이(舎弟, 아우) 되기 위한 술잔(아래 '오늘의 야쿠자 용어 기초지식' 참조) 받는. “야쿠자 야마구치 하루키치 탄생이다.

 

그리고 2 후인 1915,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효고구 니시데마치(兵庫区西出町) 야마구치구미를 창립하였다. 나카시 40 정도로 이루어지는 닌소쿠베야(인부방)였. 일반 민가를 이용한 야마구치구미 본거지는 1층에 있는 식당에 수 십 명이 동시에 식사를 있도록 반찬이 마련되어 있었고 2층은 . 그  구석에 요와 이불이 높게 쌓여 있었으며 40 정도는 기거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니시데마치 히가시데마치 일대에는 이러한 닌소쿠베야가 모여 있었고 야마구치구미 역시 그런 닌소쿠베야 하나였다. 편백나무로 만든 간판에는 현재까지 야마구치구미의 다이몬(代紋, 야쿠자 조직의 ) '야마비시(山菱, 산과 마름풀)' 그려졌다.

 

먀아구치구미 다이몬(代紋).jpg

 

그 후 야마구치 하루키치에게 있어 다행이라고 형용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움직인다. 오시마 히데키치가 토미나가 카메키치의 샤테이인 이시카와 케이조(石川恵造) 샤테이였기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토미나가 카메키치를 큰형으로 모시게 되었던 것까지는 그의 선견지명으로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923 토미나가 오야붕이 동네 야쿠자 나카야마구미(中山組) 쿠미쵸 나카야마 야소키치(中山八十吉), 수에키치(末吉) 형제에게 살해당해 버렸고 이시카와 케이조도 뒤를 따르듯 병을 얻어 돌아갔다. 결과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직접 사카즈키를 받고 오야붕으로 모시는 오시마 히데키치가 고베 야쿠자계의 탑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오시마 히데키치는 고베시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기에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고베의 그늘과 양지 양쪽 세계의 가오를 오야붕으로 모시게 것이다.

 

여기서 다시 기억해야 둬야 것은 창립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본업은 오키나카시를 관리 파견하는 닌소쿠베야(인부방)였다는 점이다. 야쿠자인 이상 도박꾼이며 때로는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는 하나,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오시마 히데키치의 사카즈키를 받은 것도 오키나카시로서 일을 하는데 도움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야마구치구미를 창립한 것도 닌소쿠베야를 운영함에 있서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어쩌다 야쿠자가 되어 버렸다기보단, 어디까지나 항만노동자 아니면 사업가로서 계산에 기초하여 야쿠자가 되기"" 것이었고 야마구치구미는 야쿠자 조직이기"" 것이었다.

 

야마구치구미의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되기까지는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아들 노보루()에게 쿠미쵸 자리를 물려주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

 

 

-계속

 

 

사카즈키고토(盃事).JPG

 

오늘의 야쿠자 용어 - 사카즈키고토(盃事)

 

야쿠자의 인간관계는 아버지-아들, -아우 의제적(擬制的) 가족 관계가 그물처럼 짜여져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A 오야지(おやじ, 아버지), B 꼬붕이 되는 관계를 맺고 A C와는 -아우 관계를 맺게 경우(C 다른 조직의 A 비슷한 인사일 경우가 많음) B A하고 C 각각 뭐라고 부를까요? 그렇습니다. 일반 가정과 비슷하게 A오야지(親父)” 즉, 아버지라고 부르고 B오지키(叔父貴)” 즉, 삼촌이라 부릅니다.

 

사카즈키고토(盃事) 이런 ()가족 아니면 유사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의식이자 야쿠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겨지는데요. 방식이나 절차 등은 도박꾼 계열과 테키야(노점상) 계열 사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고 새로 형성되는 관계(아버지-아들, -아우 ) 따라 종류도 다양합니다.

 

단, 거의 모든 사카즈키고토의 공통된 점은 뿌연 술잔(사카즈키) 술을 담고 한꺼번에 마시는 .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사카즈키고토("오야꼬(親子, 아버지-자식)사카즈키"라고 ) 있어서는 아버지가 내려준 술잔에 채워진 술을 아들이 되는 이가 한꺼번에 마시고 술잔을 카이시(懐紙)라는 특별한 종이로 싸서 호주머니 깊이 넣지요. 순간 오야붕-꼬붕의 관계가 되며 이후 오야붕이 것을 검다고 하더라도 꼬붕은 그에 따라야 정도로 강력한 복종관계가 만들어집니.

 

최근에는 간략화되는 추세에 있다고 하고, 특히 야마구치구미 6 구미쵸를 반대해서 이탈한 고베야마구치구미에서 다시 이탈한 닌쿄야마구치구미(侠山口組, 키즈나카이(絆會)) 오다 요시노리(織田絆誠, 본명 김정기) 대표가 조직 내에서 사카즈키고토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충격적 소식으로 야쿠자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이목도 끌었습니다단, 어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이것은 그가 사카즈키고토를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고 사카즈키고토의 불합리한 측면에 대한 문제제기를 취지인 같아요. 오다 대표를 쿠미쵸라는 직함으로 언급하는 보도도 많은데 정식적으로는 '대표' 것도 그런 사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사카즈키고토를 통해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자체는 일본에 널리 있던 관습입니다. 오늘날도 전통 일본식 결혼식-이른바 신젠식(神前式, 앞에서 혼인을 맹세함)-에서는 산산쿠도(三三九度)라고 해서 신랑 신부가사카즈키에 담은 매개로 하나의 가족이 되는 관습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