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야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 도박꾼 계열의 원류가 에도시대라는 것은 이미 소개했다. 당시 야쿠자는 '도박꾼'으로 바꿔말해도 되는 자로, “전업 도박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도박은 불법이지만 절(사찰)이나 귀족의 저택에 대해서는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도박이 “업”이 될 수 있었다.

 

메이지 신정부가 출범하면서 도박만으로 먹고 살기가 점차 어려워졌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생업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은 기꺼이 근대화의 진전과 함께 탄생한 빈민가에 살 길을 찾고, 산업화 과정에서 수요가 생긴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맡았다.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고베에 와서 처음에 뛰어든 '오카나카시(陸仲仕, 항만 하역인부)'의 세계도 그랬다. 

 

1231312.jpg

 

도박을 일삼는 한편 합법적인 생업을 갖는 방식이 “근대 야쿠자”의 존재방법이다. 의협심을 지키며, 문제해결을 위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합법적 사업에 종사하는 이면성.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친아들, 노보루(登)가 2대 쿠미쵸 자리를 승계하면서 야마구치구미는 근대 야쿠자의 특색을 한층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1. 야마구치 하루키치에 의한 사업 확대

 

초기 야마구치구미는 '항만 하역인부(오키나카시)'를 파견하는 인부 소개・알선업체의 성격이 강했다. '쿠치이레(口入れ)', 현대식 표현으로는 인부 소개・알선업은 전통적으로 야쿠자의 돈벌이기도 하였으니,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도박보다는 이러한 사업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123123123121.jpg

 

카와사키 조선소(川崎造船所)나 미츠비시 조선소(三菱造船所)에서 인부알선을 도급받아 녹슨 배를 닦는 노동자를 파견하거나, 소상점, 극장 등에서 소동을 벌이거나 시비를 거는 이를 억누르기 위한 요진보(用心棒, 사설 경비원 정도) 등을 파견했다. 또한 코미나토도오리(小湊通り, 코미나토 길)에 있던 생선시장에서 도매상이 매입한 생선을 소매점까지 운반하는 일도 도급받았다. 극히 마땅한 생업이다. 

 

한편 야마구치구미는 항만 노동자들을 손님으로 한 도박장을 열었다. 그런데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도박장에서 거두어지는 “테사센(寺銭)”, 즉 노름판이 열리는 장소를 제공하는 자에 대해 지급하는 수수료를 수입원으로 기대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힘든 일을 마치고 노름판으로 모이는 노동자에게 도박 아닌 오락거리를 열어주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당시 일반 대중에게 압도적 인기를 얻은 예능 중에 로쿄쿠(浪曲), 일명 나니와부시(浪花節)가 있다. 일본 전통 현악기인 샤미센(三味線)의 반주에 맞춰 소리꾼이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일본판 판소리 같다). 원래 하층민이 즐기던 예능이지만 1900년대에 일반 대중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고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벳코사이토라마루(鼈甲斎虎丸)'라는 로쿄쿠시(浪曲師, 로쿄쿠 소리꾼)의 엄청난 팬이었다. 그는 고베의 번화가 신카이치(新開地)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후쿠모리 쇼타로(福森庄太郎)와 인연을 맺는다. 후쿠모리 쇼타로는 신카이치의 대(大)오야붕이자 고베시 의원이기도 했다. 정치계에 인연을 얻은 것은 앞으로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흥행업(興行業, 예능 공연 등을 기획하거나 벌이는 업종)에 사업을 확장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후술하는 요시모토 흥업과의 동맹관계도 그가 매개한 것이다.

 

야쿠자가 정치인을 겸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규슈・치쿠호(筑豊)의 대오야붕, 요시다 이소키치(吉田磯吉)는 입헌민주당 소속 중의원의원을 역임하였고, 야마구치・시모노세키(下関)를 본거지로 한 카고토라구미(籠寅組)를 창립한 대오야붕 호라 아사노수케(保良浅之助)는 시모노세키시 의원, 중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Matajiro_koizumi.jpg

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

 

일반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야쿠자 의원에는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가 있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수상의 할아버지다. 요코스카(横須賀)에서 인부알선업을 영위하며 토목공사 도급을 받았던 고이즈미구미(小泉組)의 오야붕이었던 그는, 중의원의원, 체신대신을 역임하였고 2차대전 직후에는 귀족원의원도 역임하였다. 온몸에 문신을 했던 그에게는 어느새 “문신 대신”이라는 이명이 붙었다. 

 

일련의 야쿠자 겸 정치인들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야쿠자 조직임과 동시에 노동자 파견・알선업, 예능 관련 공연업 등을 하며 합법적인 생업을 영위하던 조직이라는 점이다. 근대 야쿠자는 야쿠자 조직이면서(따라서 도박도 하고 도박장을 열기도 하며), 일반인들이 꺼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관리가 가능한 일을 맡았던 것이다.

 

아직 일반사회에도 폭력이 만연하던 시대에 있어서 폭력으로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조절하고, 여러 사연 때문에 일반사회에서 탈락해 버린 자들과 세상을 중개해주는 역할을 하던 게 야쿠자 조직이었다.

 

사회도 야쿠자를 필요악으로 받아들였던 시대, 그나마 정당한 “시노기(シノギ, 수입 또는 수입을 얻기 위한 수단)”가 있었기에 야쿠자도 세상 한 구석에 살아남는 터를 만들 수 있었다. 

 

 

2. “키레토의 오야붕” 야마구치 노보루

 

unnamed.jpg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아들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화려함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위세를 떨치기도 했는데, 12~3살에 벌써 고베의 중심가 신카이치를 무대로 활동하던 바라케츠(バラケツ, 비행소년 또는 그 집단. 일명 구렌타이(愚連隊))인 시키시마단(敷島団)의 중심 멤버를 넘어뜨렸다(후일에 조작된 일화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 쳐도 그것을 믿게 하는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인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아들의 그런 기질이 야쿠자에 맞을 것으로 헤아렸는지, 야마구치 노보루가 23세이자 하루키치가 40살이던 1925년, 아들에게 쿠미쵸 자리를 물려줬다. 초대 쿠미쵸의 꼬붕 중 34명이 새로 노보루한테 사카즈키를 받았다(꼬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꼬붕들도 꼬붕을 데리고 있어 계열조직까지 포함하면 100명 정도였다. 

 

야마구치구미 2대째 쿠미쵸를 물려받은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아버지가 진행하던 사업을 확대해갔다. 특히 야마구치구미의 시노기(돈벌이 수단)를 비약적으로 확대시킨 대형 도매시장의 신설과 관련된 사업이 있었다.

 

1930년 고베항 매립지에 고베중앙도매시장(神戸中央卸売市場)이 개설될 계획이 세워지자 야마구치 노보루는 사택과 본부 사무실을 시장 개설 예정지 바로 옆에 붙은 키레토쵸(切戸町)에 옮긴다. 도매시장에서 거래되는 짐의 운반작업을 노린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도매시장이 신설될 일대가 본인의 오야붕인 오오시마 히데키치(大島秀吉)의 나와바리였던 것이다.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자신의 오야붕이 다스리는 나와바리에서 태어날 거대한 이권을 노렸던 것이다.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이러한 행태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오오시마 오야붕이 그를 하몬(破門, 문제가 있는 자기 조직에서 쫓아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화2.jpg

당시 이야기를 기초로 그린 만화

 

하지만 이 이야기에 의문이 든다. 야마구치 노보루가 초대 야마구치 하루키치한테 쿠미쵸 자리를 물려받는 승계식에 오오시마 히데키치 본인을 비롯, 오오시마구미 간부가 참석하였다. 바이샤쿠닌(媒酌人, 새로 가족이 되는 이들 사이를 이어주는 자. 중매인)도 오오시마구미 간부인 우라야스 고스케(浦安五助)가 맡았다.

 

보통 나와바리를 침범해오는 이에게 관용을 베푸는 야쿠자는 없다. 배제할 뿐 아니라 가차없는 보복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오시마 오야붕은 야마구치 노보루의 승계 자리에 참석하였고 조직에서 중매인까지 내주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오시마 오야붕이 야마구치 노보루의 실력 내지 장래성을 인정하여 활약의 무대를 마련해줬다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야마구치 노보루의 “돌파력”도 대단하지만 그후 그의 활약을 생각하면 오오시마 오야붕의 도량도 만만찮다.

 

이렇게 키레토를 본거지로 한 야마구치 노보루는 어느새 “키레토의 오야붕”이라고 불리게 된다. 

 

 

3. 도약의 1932년

 

Kobe-Meriken_Hatoba_circa_1930.jpg

1930년 즈음의 고베항

 

1932년은 고베항 매립지에 중앙도매시장이 개설된 해이자, 야마구치구미가 크게 비약하는 해다.

 

야마구치구미는 도매상에게 도급받아 생선과 계란을 소매점까지 운반하는 일(이른바 “요코모치(横持ち)”)을 독점하였다. 이것이 야마구치구미에 있어서 몹시 큰 시노기가 되었다.

 

일단 노동력 수요의 안정성이 컸다. 이미 언급한 대로 항만 노동력은 고베항을 오가는 물류량에 좌우되기 때문에 하역노동에 대한 수요 변동이 역시 매우 컸다. 반면 도매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류량은 다소의 변동이 있더라고 항만하역과는 비교해 매우 안정적이었다. '예측할 수 있는' 수익원을 쥔 것이 야마구치구미의 경제기반은 한층 더 든든하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중앙시장에서 도매상으로부터 도급을 받은 주체가 정확히는 “야마구치구미 합자회사”였다는 점이다. 초대 쿠미쵸 자리에서 물러선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순수 사업회사인 '야마구치구미 합자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새로 생긴 대형 도매시장을 무대로 야마구치구미는 합자회사를 세워 땀을 흘렸다. 야쿠자보다는 사업가로서 자질이 강했던 아버지는 사업에 집중하고, 야쿠자 기질이 넘친 아들이 야쿠자의 길을 걷는 모양새였다. 이는 근대 야쿠자의 전형적 모습이자 이후 야마구치구미가 걸어가는 길을 암시하는 원형이기도 하다.

 

1932년은 초대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진행하던 흥행(興行, 예능 공연 등을 기획하거나 벌이는 업종)계로 본격 진출한 해이기도 하다.

 

야마구치 노보루가 도쿄를 본거지로 한 흥행사(興行師) 나가타 사다오(永田貞雄)를 찾아가서 로쿄쿠계와의 인맥을 강화한다. 나가타 사다오의 조력도 있어서 야마구치 노보루는 당시 스타들이 총출연하는 “동서 로쿄쿠 일류 대회(東西浪曲一流大会)”를 대성공시킨다. 야마구치구미 흥행부가 주최했는데 야마구치 노보루는 같은 부 책임자로 로쿄쿠시의 전 매니저를 앉혔다. 

 

Tamanishiki_with_The_Emperor's_Cup.jpg

타마니시키(玉錦)

 

야마구치 노보루가 주력한 흥행으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스모(相撲, 일본 전통 씨름)다. 그는 스모를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소행이 나빠서 요코즈나(스모계의 최고위) 승진에 반대의견이 많았던 타마니시키(玉錦)가 요코즈나로 승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후원회장이었던 야마구치 노보루가 있었다고 한다(타마니시키가 야마구치 노보루의 꼬붕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야마구치 노보루의 사업확장을 가능케 만든 요인에 정치인도 있었다. 같은 동네 출신의 중의원의원 스나다 시게마사(砂田重政)와의 인맥이 특히 그랬다. 말을 잘하는 재주가 있던 야마구치 노보루는 선거 때 스나다 후보자를 응원하는 연설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야마구치 노보루가 단순한 폭력집단의 두목이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텐데 어쨌거나 정치계와의 인맥이 사업에 있어 큰 힘을 발휘한 것 같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국기원(国技館)에서 치러진 피스톤 호리구치의 권투 시합이었다. (일본 국기인 스모를 하는) 신성한 국기관에서 복싱 시합을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각 방면의 반대에 부딪쳤음에도 야마구치 노보루는 우익의 거물이었던 도오야마 미츠루(頭山満)와 담판을 지어 국기관에서 복싱 시합을 열었다. 정치와 의협이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관계가 눈에 보이는 시대였다. 

 

그런데 1932년, 사건이 벌어졌다. 야마구치구미의 구성원이 위에 나온 스모 선수 타마니시키(당시 오제키(大関, 스모계 서열 2위))와 입싸움을 벌인 스모 선수 타카라가와(宝川)를 습격했던 것이다. 습격자 중 막내였던 남자는 타카라가와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려쳤다. 옆에 있던 타마니시키가 제지한 바람에 칼은 타카라가와의 이마를 깨고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의 절반을 자르는데 그쳤다.

 

1580a650.jpg

 

이 막내 습격자 이름은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 후일 3대째 쿠미쵸로 야마구치구미를 전국 규모의 조직으로 키우게 될 사람이다. 

 

 

4. 요시모토 흥업(吉本興業)과의 관계

 

오사카 난바에 본거지를 둔 요시모토 흥업은 일본의 '오와라이(お笑い, 일본식 코미디)'계에서는 확고부동한 기획사이자 흥행주, 극장주다.

 

이 요시모토 소속 연예인(개그맨)이 야쿠자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는 “국민 MC”급 유명 개그맨이 야마구치구미 와카가시라와 사이 좋게 교제하고 있다는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사건이 있었다. “반사회적 세력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불리지만, 야마구치구미와 요시모토 흥업의 관계는 원래 서로가 서로의 도움이 되는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 

 

ㅇㅅㅁㅌ.jpg

 

요시모토 흥업은 1912년 요시모토 키치베에(吉本吉兵衛), 세이(せい, 결혼 전 성씨는 하야시(林)) 부부가 오사카시 키타쿠(北区, 북구)에서 요세(寄席, 만자이, 라쿠고 등의 공연을 하는 극장)를 개설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4년 후 본거지를 미나미쿠(南区, 남구)로 옮겨 정식적으로 요시모토 흥업부(吉本興行部)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훗날 요시모토 흥업 회장으로 요시모토를 “오와라이 제국”으로 육성하게 될 세이의 친동생, 하야시 쇼노스케(林正之助)가 입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24년 두 창업자 중 하나인 요시모토 키치베에가 사망, 경영은 세이와 하야시 쇼노스케, 그리고 세이의 또 다른 친동생 히로타카(弘高)가 맡게되었다. 오사카를 기점으로 교토, 고베, 나고야, 요코하마, 도쿄에도 진출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예능이란 것은 원래 무언가 특이한 능력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발휘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일반인들이 갖춘 “세간의 상식”과 떨어져 있어 좋은 예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업이 전국으로 확장됨에 따라 요시모토 흥업은 자유분방한 코미디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또 각지에서 “안전하게” 공연을 주최하기 위하여(시비를 걸거나 난동을 부려 공연을 방해하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고베의 얼굴인 야마구치 노보루와 인맥을 맺기 시작했다.

 

고베에서 공연을 주재함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사업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야마구치 노보루 입장에서도 로쿄쿠계에 영향력이 있는 요시모토 흥업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흥행업 확장을 위해서 중요했다. 

 

순조롭게 보인 둘의 관계였으나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요시모토 흥업과 동맹관계에 들어간 것이 원인(遠因)-간접적인 원인-이 되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지경에 빠질 것은 아무도 몰랐다.  

 

 

 

【오늘의 아쿠자 용어(3) ~しのぎ(시노기)】

 

shinogigoroshi_01.jpg

 

야쿠자계 인사들은 돈벌이 수단, 수입원 아니면 수입 그 자체를 "しのぎ(시노기)"라고 합니다. "요새 시노기 어때?" 하면 "요새 장사 어때?"라는 뜻이고, "시노기를 넓힌다" 그러면 "수입원을 확대/다양화시킨다"라는 뜻이 되겠죠.

 

시노기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걸까요? 한국어 표현에 "풀칠"이라는 말이 있지요. 문자 그대로 풀을 바르는 일을 이르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계를 꾸며간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호구를 연명한다"는 것도 있지요. 이때 호구를 한자로 쓰면 "糊口" 즉 풀(糊)과 입(口)입니다. 그리고 이 "호구를 연명한다"를 일본어로 옮기면 "糊口をしのぐ(코코오워 시노구)"가 됩니다. 이 동사 부분, 즉 "시노구"의 명사형이 바로 "시노기"인 겁니다. "しのぐ(시노구)"라는 동사가 원래 '어려운 지경을 겨우 넘어가거나 살아남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호구"를 안 붙여도 와닿긴 하지요. 

 

옛날에는 시노기 중에 항만노동, 토건업, 운송업, 노점상 등 완전히 합법적인 것도 많았는데 요새 그런 합법적 수입원이 차단되면서 중심 사업이 법을 어기는 일로 바뀌었습니다(마약 밀매, 매춘 알선/관리, 불법 사채업, 피싱사기 등). 폭력단대책법, 그리고 각 지자체가 제정한 폭력단배제조례로 인해 야쿠자의 합법적인 활동범위마저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