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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 이후로 더 이상 놀랄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미국에서 조지 플라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무장도, 저항도 하지 않는 흑인 용의자를 경찰이 8분 46초 간 무릎으로 짓눌러 질식사시킨 사건이다.

 

이는 뿌리 깊은 인종갈등 폭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고 외치는 Black Lives Matter(BLM,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가 시작되었다.

 

비록 한국에서는 주된 관심사에서 조금 비켜나 있지만, 다인종이 살아가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직도 매일 톱기사로 다뤄질 만큼 큰 이슈다. 곳곳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다양한 캠페인과 시위가 계속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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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7일, 영국 브리스톨(Bristol)에서도 BLM 시위가 일어났다. 성난 대중에게 끌어내려지는 동상은 전 세계에 직관적이고도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는 왜 125년 된 동상을 파괴했을까

 

에드워드 콜스턴(Edward Colston, 1636-1721)은 영국 브리스톨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큰 부를 축적한 17세기 무역상인이다. 브리스톨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한 그가 도시를 대표하는 위인이 된 것은 생애 말년에 빈민 구호소, 병원, 학교, 교회 등을 지어 도시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천안의 이순신 장군, 강릉의 신사임당, 고양의 권율 장군처럼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건물, 공연장, 학교 등을 도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 파괴된 동상이,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콜스턴’ 회관 앞에 있는 ‘콜스턴’ 광장의 ‘콜스턴’ 동상이었으니, 도시 내에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종차별 시위대가 콜스턴의 동상을 파괴한 이유는 그의 어마어마한 부(富)에 있다. 아프리칸 노예무역을 독점했던 영국 ‘로열 아프리칸 컴퍼니(Royal African Company)’의 임원으로 13년 간 약 84,000명의 아프리카인들을 납치, 아메리카의 설탕, 담배 대농장에 ‘수출’했다(19,000여 명은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수많은 아프리카인의 피와 땀으로 일군 재산은 브리스톨 항구의 과부, 아동 그리고 빈민들에게 돌아갔다. 이 때 '본인과 정치·종교 성향이 다른 이들이 수혜 받지 않도록' 강력히 원했다고 전해진다.

 

 

자선사업가로 기록된 노예무역상은 심판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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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NN

 

‘잔혹한 노예무역상이자 도시 최고의 자선가’라는 콜스턴의 이중적인 면모는 1999년에야 조명되었다.

 

콜스턴의 노예무역은 브리스톨의 번영에 큰 기여를 했다. 브리스톨 기득권 층의 기원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노예무역 문제에서 자유로울 이들이 더 적을 것이다. 브리스톨은 현재에도 런던, 맨체스터 등 국제화된 대도시와는 달리 백인 거주 비율이 84%에 달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난 20년 동안 콜스턴의 과오를 밝히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도시는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2017년 어떤 예술가들은 콜스턴의 이름을 딴 공연장에서 공연하기를 거부했고, 시민들은 동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안타까운 건 성과로 이어진 게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콜스턴의 이름을 딴 학교는 ‘학교에 실익이 없다(No benefit)’는 이유를 개명을 거부했고, 시의회는 수차례 '엄중히 고려한다'는 입장만을 반복했다. 노예무역상 콜스턴이 브리스톨 곳곳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였다.

 

 

6.25전쟁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친일파

 

공교롭게도 같은 6월, 한국에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논란이 일었다. 보훈처 직원이 찾아와 '법안 개정 시 국립묘지에 안장하더라도 다시 뽑혀 나갈 수 있어 걱정'이라고 이야기 했다는데, 보수진영은 정부가 마치 그를 협박이라도 한 냥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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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백선엽의 친일 전적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그가 6.25 전쟁 당시 사단장으로 복무했던 육군 1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6.25 전쟁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의 업적을 칭송한 비디오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주말 정신교육 시간에 대강당에 모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다부동 전투를 지휘하고, 반격의 선봉으로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는 내용이었다. ‘천하제일 1사단’ 사단가가 울려 퍼지는 비디오 속 모습은 아직도 많은 국군 장병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긴 세월 동안 ‘백선엽이 곧 전쟁기념관’이라 존경받으며, 각종 출판 서적과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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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의 친일 전적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면서 널리 알려졌다(링크).

 

일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부터 일제 패망 순간까지 만주국 장교로 복무했는데, 간도 지역 항일연군 토벌을 목적으로 한 간도특설대에 3년 동안 복무했던 것이 밝혀졌다. 당시 항일연군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 독립군이 활동했다. 백선엽 본인은 조선인 독립군과 싸운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패망 순간까지 일제의 장교로 복무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과'라는 것

 

같은 시기에 논란이 된 에드워드 콜스턴과 백선엽. 이 둘의 공통점은 '힘센 자'라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맥락의 공과(功過)를 공유하는 기득권 층은 오랜 시간 과오보다 빛나는 공적을 조명해왔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역사의 이면을 알지 못한 채 쾌적한 콜스턴 거리를 거닐었고, 자랑스러운 구국의 영웅으로 백선엽을 기억했다.

 

그러나 브리스톨에는 콜스턴 동상을 마주할 때마다 모욕감을 느꼈던 흑인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가슴 한 켠이 시큰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있다. 역사가 오랜 시간 힘센 노예무역상과 친일파의 편이었고, 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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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콜스턴 동상

 

‘브리스톨 시민이 도시에서 가장 고결하고 현명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움'

'Erected by citizens of Bristol as a memorial of one of the most virtuous and wise sons of their city'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 명판에 적혀있는 말이다. 분명 그는 도시 발전과 빈민 구제에 기여한 자선가이지만, 동시에 수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자다. '가장 고결한' 도시의 인물로 꼽기에는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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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두 개의 알파벳을 고쳐 그를 ‘거부(REJECTED)’했다.

 

백선엽 장군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군사정권의 비호 하에 동생 백인엽과 설립한 인천 선인재단에서 극심한 사학 비리와 부패를 저질렀다. 2010년에는 3심까지 갔던 장남과의 골육상잔(骨肉相殘), 강남역 덕흥빌딩 진정명의회복 소송에서 '차명 부동산 투기 및 수천억 대 자산 부정축재'가 드러났다.

 

백선엽 장군이 '6.25 전쟁의 영웅'이라는 공적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면, 그의 과오에서 오는 부끄러움은 후손들이 맡게 될 것이다.

 

 

힘이 셌지만, 영원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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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ristol Post

 

현재 브리스톨 시(市)는 '콜스턴 문제에 있어 이후 나아갈 방향'을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다. BLM 시위대에 의해 항구에 던져진 동상은 건져 올린 뒤 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했고, 그의 이름이 붙었던 건물과 거리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 예정이다.

 

누군가는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과연 동상을 옮기고, 거리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인종차별이 해결되겠냐고.

 

하지만 대중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가 균형 잡힌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분명 2020년의 범세계적인 BLM 시위는 인종차별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에드워드 콜스턴의 후손이 브리스톨 시장에게 노예무역으로 피해 입었던 서아프리카 도시들과 결연을 통해 개발 원조를 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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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을 둘러싼 논란 또한 마찬가지다.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안장을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친일잔재가 청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훈 개념에 대해 활발히 논의가 계속되는 것만으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독립운동가와 후손, 유족이 구성한 광복회는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을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이런 당사자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과오를 덮을 공적이 있으니 친일 전적은 넘어가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얼마나 뻔뻔한가. 오늘날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니 재벌들의 비리 범죄를 감면해주자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

 

에드워드 콜스턴의 과오를 평가하는데 사후 300년, 동상이 쓰러지는데 12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브리스톨 시민들은 끈질기게 친절한 자선사업가의 어두운 이면을 기억하고 있다.

 

노예무역상과 친일파는 힘이 셌지만 영원하지 않다.

 

 

 

참고

 

Bristol City Council - The population of Bristol

BBC News - Who was Edward Colston and why is Bristol divided by his legacy?

The Guardian - Bristol should make peace with slavery past, says Colston descendant

Mail - Bristol University plans to review its logo featuring Edward Colston after BLM protesters toppled slave trader's statue and dumped it in city's harbour

 

한겨레21 - 한국인은 모르고 일본인은 아는 백선엽의 진실

연합뉴스 - [팩트체크] 국립묘지 논란 백선엽, 친일·반민족행적 반성했나?

조선일보 - 6·25영웅 백선엽 장군에 서울현충원 못 내준다는 보훈처

경향신문 - [조호연 칼럼]‘백선엽 논란’, 지체된 정의

인천뉴스 -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행위자, 국립묘지 안장 있을 수 없는 일"

선데이저널 –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6.25전쟁영웅에서 부동산 사기꾼으로


 

Profile
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