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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소동의 책임을 지고 퇴진한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수상의 뒤를 이은 “평민재상” 하라 타카시(原敬). 민중대책을 위해 토코나미 타케지로(床次竹二郎)를 내무대신(内務大臣)으로 임명하였다. 

 

때마침 러시아혁명이 성사되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세계규모로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의 노동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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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코나미 타케지로는 관동・관서지방의 쟁쟁한 야쿠자 조직을 결집시켜, 세이유카이(政友会, 정우회)계 원외단(국회의원이 아닌 당원으로 구성된 정치단체)으로 대일본국수회(大日本国粋会)를 창립했다. 켄세이카이(憲政会) 계열에는 야마토민로카이(大和民労会), 테키야(노점상) 계열은 대일본신노카이(大日本神農会) 등 여러 거대 원외단이 설립되었다.

 

물론 실체는 야쿠자 조직이었다. 1920년대 일본 사회는 노동운동 대 우익사상 구도가 되었다. 

 

한편 인권의식의 고조로 근세 이래 이어져온 차별에 시달리던 피차별부라쿠(被差別部落) 출신(특히 부라쿠 출신 청년층을 중심으로)의 해방운동이 진행되었다.

 

사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야쿠자들은 어떤 방향으로 살 길을 찾았을까. 일반적으로 야쿠자의 사회운동에 대한 태도는 억압적이거나 적어도 냉담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정말 그럴까?

 

야쿠자 조직원의 출신 계층 비율이라고 언급되는 “3・3・3” 중 두 개의 3은 빈민층과 피차별부라쿠다. 야쿠자와 사회운동의 관계가 단순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가 아니란 걸 쉽게 상상할 수 있겠다. 

 

 

1. 노동분쟁과 야쿠자

 

야쿠자가 노동분쟁이나 소작쟁의(소작인들에 의한 지주에 대한 쟁의. 소작료, 소작권 등의 개선을 요구함) 등 사회운동에 개입하고 방해해온 것은 사실이다.

 

대일본국수회 조직원 수백 명이 야하타제철(八幡製鐵) 파업 현장에 난입・습격했고, 오사카 시영 전철 파업에 있어서는 현장에 파견된 조직원들이 일부 노동자에게 업무를 계속시켜 파업을 깬 사례도 있다. 야마토민로카이는 당시 사회주의 사상가・운동가로 유명했던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를 습격하였고, 일본 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의 파업 중 하나로 꼽히는 노다간장(野田醤油, 현 킷코만) 파업에는 파업을 깨는 조직원을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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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야쿠자가 파업을 방해하거나 파괴한 배경에는 좌우사상의 대결구도라는 "그럴 만한" 모양새가 있었다. 우익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경영진(회사)에 고용된 입장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의 냄새 나는 운동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무너뜨릴 가치가 있다 판단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고객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업자로서의 원리와 공산주의사상에 맞서는 보수・우익주의의 원리가 합쳐졌다. 

 

이와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야쿠자도 있었다. 야쿠자 중에는 일방적으로 회사 편을 들고 노동운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분쟁을 조정(調停)하여 해결하는 오야붕도 있었다. “조정형” 개입으로 수완을 발휘한 야쿠자 대표에 요시다 이소키치(吉田磯吉) 오야붕이 있다.

 

특히 그가 아사히유리(旭硝子, 현 AGC) 쟁의나 미이케 탄광(三池炭鉱) 파업을 계기로 발생한 나가사키 오키나카시(長崎沖仲仕) 분쟁에서 보인 조정 수법은 특이했다. 요시다 오야붕은 분쟁이 생기면 먼저 샤테이(舎弟, 아우)로 하여금 분쟁 현장에 젊은이를 파견시켜 폭력으로 쟁의단을 배제한다. 파견된 폭력단은 당연히 체포된다.

 

폭력적으로 쟁의를 파괴하는 건 프롤로그에 불과하다. 그 후 요시다 오야붕이 정치계에서 구축한 인맥을 이용하여 체포된 조직원을 모두 석방하게 하고, 요시다가 쟁의단과 회사 사이에서 교섭을 진행한다. 즉, 조정 제1막에서 젊은 조직원들의 폭력을 보임으로써 쟁의단에 대해 “노동분쟁 따위는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무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교섭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조정에 임하는 것이다.

 

물론 요시다 이소키치가 조정에 나서는 이유는 회사 측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인데, 요시다 이소키치는 회사의 입장은 물론 노동자 측의 요구사항도 회사에 전달, 최대한의 양보를 끌어낸다. 서로의 타협을 도출하여 합의점을 모색하는, 말 그대로 '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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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사회주의 운동이 후퇴한 배경에는 대기업 노조가, 노조조차 만들 수 없는 영세기업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구축하지 못했던 면이 있다. 거기에 엘리트 사회주의자들이 결과적으로 서민감정을 무시한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빠져 버렸다는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서민들이 일자리가 없거나 급한 돈이 없을 때에 동네에 사는 오야붕을 찾았던 시대, 야쿠자 조직은 가난한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연대였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야쿠자도 노동자들의 “정”에 호소하고 노동자들도 야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야쿠자에 의한 '조정'이라 하면 오로지 폭력적으로, 일방적으로 회사에 유리하게 사태를 끌어가는 것을 상상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들은 더 실질적인 기능을 했다.

 

 

2. 야마구치구미의 노동분쟁 조정

 

야마구치구미는 대일본국수회에도, 야마토민로카이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정당활동이나 우익활동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직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직역 공동체에게 일종의 사회적 권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고베에서 벌어지는 노동쟁의, 특히 조직이 영향력을 가진 항만노동자의 쟁의에는 자주 조정자로 나섰다.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 야마구치구미가 인부를 파견하여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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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가 관여한 노동분쟁으로 유명한 것이 1932년 말에 발발한 타이쇼 운수(大正運輸) 쟁의다. 타이쇼 운수 소속 거룻배・소형 증기선 승무원이나 인부 약 200명이 일본항만종업원조합(日本港湾従業員組合)에 가입, '해고 통고를 받았던 20명의 해고 철회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쟁의를 일으켰다.

 

항만종업원조합의 본부가 일본해원조합(日本海員組合)에 있는 관계로, 일본해원조합 조합장 하마다 쿠니타로(浜田国太郎)가 야마구치 노보루에게 조정을 의뢰한다. 야마구치 노보루는 자신이 고안한 조정안을 전달하기 위하여 타이쇼 운수로부터 오키나카시 노동의 도급을 받던 조직원 코바야시 쇼키치(小林正吉)를 포함한 조직 간부 3명을 분쟁현장에 보낸다.

 

그의 조정안은 해고 당한 20명은 조합의 체면을 세우는 차원에서 일단 모두 복직시키고, 회사가 최대한 많은 위로금을 주며 다시 인원정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야마구치 노보루로서는 최대한 조합의 체면을 세운 조정안이었으나 노조는 정리해고 허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섭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사소한 일이 도화선이 되어 입싸움이 시작되었고, 결국 교섭장은 난장판이 됐다. 수십 명이나 모여 있던 조합원들은 야쿠자 조직의 간부가 올 것에 대비하여 곤봉, 지팡이 등으로 무장했다. 칼을 숨겼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야마구치 노보루가 보낸 코바야시 등 3명의 조직원은 쿠미쵸의 지시를 충실히 지켜 일체 무장을 하지 않았다. 결국 코바야시 외 1명이 중상을 입고 나머지 한 명은 아랫배에 칼을 찔려 사망하였다. 

 

노동분쟁에 야쿠자가 개입하였다가 노동자를 때리거나 상처를 입히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나 야쿠자가 노동자한테 일방적으로 당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보복에 대비하여 경찰은 경계 체제에 들어갔고 노조는 바짝 긴장하였다. 야마구치구미 내부에서도 '노조원 한 명 정도는 죽여야지 조직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며 보복에 들어갈 분위기였다.

 

그 때 야마구치 노보루 쿠미쵸가 “보복 금지” 지시를 내린다. 그는 보복을 외치며 떠드는 조직원들을 억누르고 당초 제안했던 조정안대로 조정을 성사시켰다. 

 

야마구치 노보루가 왜 이러한 판단을 한지는 모르겠다. 야쿠자가 야쿠자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가오라는 걸 생각하면, 조직원이 살해당했는데도 보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얼핏 납득이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원래 목적이 회사와 노조 간 타협을 끌어내는 것에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야마구치구미는 맡은 일을 책임지고 이루어낸 것이다. 조직원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도 시각에 따라서는 “목숨을 건 업무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이보다 마음 든든한 조정인은 따로 없다. 야마구치 노보루는 고베, 오사카 지역에서 많은 조정을 성공시켰다. 조직 규모는 “동네 야쿠자”급으로 작았는데도 큰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오시마 히데키치가 “운가의 오야붕”으로 고베에 군림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3. 피차별부라쿠(被差別部落)와 야쿠자

 

근세 에도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혹은 신분) 제도가 사회의 기본적 틀이었는데, 사실 이 아래에 한 계급이 더 있다. “에타(穢多, 더러움이 많음)”, “히닌(非人, 인간 아님)”이라 불린 천민 계층이다. 그들은 공인 계층 이상의 사람들이 싫어하고 기피하는 직업을 가업으로 승계하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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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살았던 곳 

 

메이지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사민평등(四民平等) 정책 아래 농공상 즉 농민, 공인, 상인은 다 “평민(平民)”으로 편성되었고, 거기에는 “에타”나 “히닌”들 포함되었다. 문제는 호적에 기재하는 방법이었다.

 

농, 공, 상 계층에서 평민이 된 사람들은 단지 “평민”으로 적힌 반면, 에타, 히닌에서 평민이 된 이들은 “새로 평민이 되었다”는 뜻으로 “신평민”이라 기재된 것이다. 그들은 생업뿐 아니라 거주지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동네는 은은히 “부라쿠(部落, 부락)”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부라쿠민(部落民 부락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이 고조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듯 부라쿠민들도 진정한 “해방”을 요구하며 단결하였다. 1922년 3월 설립된 전국수이헤이샤(全国水平社, 이하 '수평사')는 철저한 규탄주의(糾彈主義)를 취했다. 즉,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있으면, 차별한 것으로 지목된 자를 불러 공개된 자리에서 철저히 규탄하고 진정한 사과가 있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는 방침을 취하였다. 

 

이 원칙 아래 전국 각지의 “부라쿠”를 기점으로 지부를 설치, 차별 철폐의 운동을 벌였다. 우익적 관점에서는 피차별민들이 기세를 부리고 차별을 규탄한다는 미명 하에 일반인을 협박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지 모르겠다. 우익 야쿠자와 수평사가 폭력적으로 격돌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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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이코쿠 투쟁(水国闘争)과 야쿠자의 이면성

 

사건은 수평사가 설립된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났다. 나라현 시키(磯城)군 소재 시모나가(下永) 부락에서 부라쿠민인 젊은 남녀가 혼례 행렬을 꾸며 걷고 있을 때였다. 그 모습을 본 한 노인이 부라쿠민임을 암시하는 차별적 손가락 모양을 만들어 혼례 행렬에 보여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모나가의 수평사가 노인을 상대로 규탄에 나섰다. 같은 군에 사는 대일본국수회 소속 나카니시 츠네죠(中西常蔵) 오야붕이 중재에 나섰다. 시모나가 수평사 마츠모토 마츠타로(松本松太郎) 대표는 사태가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고 했는데, 한 수평사 소속 청년이 반발했다. 

 

“차별을 한 자한테 문서로 사과를 시키지 않으면 수평사 본부를 볼 낯이 없다”

 

시모나가 수평사는 차별적 행동을 한 노인과의 합의를 거부하고 공개된 자리에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야쿠자는 가오, 즉 체면이 생명이다. 대일본국수회의 나카니시 오야붕으로서는 가오가 서지 못한 셈이다. 

 

대일본국수회와 시모나가 수평사 양쪽 다 칼, 사냥총, 죽창(대창)으로 무장한 채 대치하였다. 둘 다 나라현 밖에서 원군을 불렀고, 사상초유의 야쿠자 대 부라쿠민의 격돌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수이코쿠(水国)사건이다. 

 

군대까지 출동하여 진압할 정도로 크게 번진 사건 과정에서 수평사 측에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판 결과 먼저 습격에 나선 대일본국수회보다 수평사 측에 더 무거운 형이 선고되었다(대일본국수회 12명, 수평사 3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건 자체가 충격적이었던 데다 불평등해 보이는 판결이 마중물이 되면서 수평사 운동에 불이 붙는다. 

 

그렇다고 피차별부라쿠민의 차별철폐 운동과 야쿠자의 관계를, 권리 획득을 위한 싸움과 그에 대한 억압으로 보기는 어렵다. 야쿠자의 역사적 역할이 일본 사회의 중심과 주변을 연결하는 것이었다면, 주변 사회에는 당연히 피차별부라쿠도 포함된다.

 

야쿠자 인구의 출신별 구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3, 3, 3”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야쿠자는 빈곤층 출신, 피차별부라쿠 출신, 그리고 재일한국・조선인이 각각 3분의 1씩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부라쿠 출신자들이 많은 집단이 전면적으로 부라쿠 해방운동에 적대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지 답은 명백하다. 

 

수이코쿠 투쟁 과정에 있어서도 전국수평사와 대일본국수회는 수면 아래서 교섭하고 있었다. 전국수평사에서 코마이 키사쿠(駒井喜作)와 이즈미노 리키죠(泉野利喜蔵)가, 국수회 야마토(大和)지부에서 부라쿠 출신이자 나라를 대표하는 오야붕인 이마다 우시마츠(今田丑松)가 각각 대표자로 나와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수이코쿠 투쟁에서 사망자가 안 나왔고 부상자도 적은 수준에 머물렀던 데에는 이마다 오야붕이 국수회 본부에 대해 “국수회가 수평사와 대립한다면 나는 국수회를 빠져나가겠다”고 통고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여지가 있다.

 

 

5. 야쿠자와 피차별부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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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수평사를 설립한 사람들

 

야쿠자와 부라쿠에는 겹치는 부분이 매우 많다. 1922년 전국수평사가 설립된 당시부터 그랬다. 같은 해 3월 교토・오카자키공회당(岡崎公会堂)에서 수평사 창립대회가 치러졌는데, 그 때 소요된 비용이 350엔이었다. 그 중 무려 100엔을 출연한 이가 대일본국수회 소속의 거물 오야붕, 마스다 이자부로(増田伊三郎)였다. 피차별부라쿠 출신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부라쿠 해방운동과 인맥을 구축하는 실마리로 삼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으나 액수가 액수인 만큼 회유나 무마의 뜻은 희박하거나 아예 없어 보인다. 수평사 설립을 이끌던 인사들이 부라쿠 출신의 청년들이었던 점, 마스다 이자부로가 종전부터 여러 차별사건에서 조정・중개를 맡아 온 점을 감안하면, 그가 부라쿠 출신 젊은이들을 “우리 젊은이”로 생각했던 측면이 있는 거 아닐까.

 

그뿐만 아니다. 야쿠자와 부라쿠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 꼭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남자에 마에다 헤이이치(前田平一)가 있다. 평소 '수평사 인사의 협력이 있어야 오야붕으로 일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던 그는 종종 “수평사 도박”을 주재하였다. “부라쿠”로 차별당하고 있는 동네에서 노름판을 5번 열면 그 중 1번은 장소 사용료, 수수료 등을 모조리 고베 수평사에 기부했다. 도박장을 오가는 액수를 생각하면 기부액도 상당했을 것이다. 

 

2차대전 직후 오사카에서는 친형제가 각각 부락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 수이헤이샤의 후신) 지부장과 지역 최대 야쿠자 조직의 두목으로 자리했다. 지역마다 야쿠자와 부라쿠의 관계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오사카, 고베, 교토 등 관서지방에 비교적 부라쿠가 많다는 사정도 있어서 둘이 겹치는 범위도 넓고 그만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확실한 건 일단 야쿠자가 일본 사회의 중심과 거기서 동떨어진 “주변”을 연결해주는 존재이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질해버린 계기는 1969년 도오와(同和)대책사업특별조치법이 제정됨에 따라서다. 즉, 부라쿠가 일종의 이권이 되고 나서다.

 

그 후 야쿠자와 부라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짚어보도록 하고, 다음회부터는 본격적으로 야마구치구미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오늘의 야쿠자 용어(5) ~ 엔코즈메 (エンコヅメ)】

 

야쿠자 사회가 바뀌고 있다고 해도 아직까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일반인 입장에서도 바람직해보이고 되도록이면 지키고 싶은 도덕에 가까운 것이 있어요. 반면 문명인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적어도 일반인 입장에서는) 야만하고 잔인한 것도 있죠. 대표적 사례가 바로 엔코즈메(エンコヅ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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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코(이것도 야쿠자계 은어니 조심하시길!)'는 손가락, '즈메'는 "자르다"는 뜻의 동사 "詰める(즈메루)"의 명사형입니다. 즉, 엔코즈메는 손가락을 자르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지요(그래서 "유비즈메(손가락 자르기)"라 하기도 하죠).

 

놀라운 점은 싸우거나 린치(사형)를 가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공격 방법이 아니라 야쿠자 본인이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른단 부분입니다. (엄청 아프겠는데 자르는 순간은 그다지 아프진 않고 오히려 손가락을 자르고 나서 병원에 가면서 아파지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아마 심리적 요인도 크겠죠)

 

상상하기만 해도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짓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알아보니까 그 이유는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즉, 자른 내 손가락을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각오를 보여줌과 동시에, 

 

①나 혹은 나의 아우/꼬붕이 저지른 실수를 용서해 달라

②(조직 간 진흙탕 싸움을 그만하는 등)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을 진정시키자

③조직에서 빠져 나가게 해 달라

 

라고 부탁하거나 제의하기 위함인 거죠. 

 

손가락을 바치는 상대는 사정에 따라 달라집니다. A, B 각 조직의 젊은이가 조직의 나와바리나 면목과 아무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길거리에서 싸웠다고 칩시다. A구미 조직원이 B구미 조직원에게 중상을 입혔어요. 일단 A구미 조직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싸움의 당사자인 A구미 조직원이 엔코를 잘라 A구미 쿠미쵸에게 제출, 쿠미쵸는 B구미 쿠미쵸한테 가서 "이걸로 용서해주시오"라고 사죄합니다.

 

참고로 어떤 야쿠자 분의 설명에 의하면 자른 손가락을 갖다가는 상대방이 자기가 소속하는 조직이 아닐 경우 손가락에 반드시 손톱이 붙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즉 두 번째, 세 번째 마디는 내 조직 내부에서 처리될 경우에만 허용).

 

손가락을 자르는 방법에 대해서는 '꼭 이렇게 해야 된다' 정해진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단 손톱을 위로 향하느냐 아래로 향하느냐, 자르는 도구가 칼이냐 끌이냐, 자르는 부분에서 손가락을 묶느냐 마느냐, 남의 도움을 받느냐 마느냐 등 스타일을 연출할 수는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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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단대책법은 엔코즈메를 "유비즈메(指詰め, 손가락 자르기)"라고 부르며, 

 

"폭력단원이 그 소속하는 조직의 통제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것에 대한 사죄 또는 그 소속하는 폭력단에서부터의 탈퇴가 용인되는 것의 대상(代償)으로서 기타 이들에 유사한 취지로 그 손가락의 전부 또는 일부를 스스로 잘라내는 것"

 

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법에 의해 "지정폭력단" 조직원이 지정폭력단 조직원에게 유비즈메를 강요하거나 권유하는 행위, 유비즈메를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행위 등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이들 행위에 대해 중지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