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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의 유럽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유럽에 음모와 배신이 횡행했던 한 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전 세계를 배경으로 1935년을 말하자면,


‘1933년 독일이 괴물 히틀러를 탄생시켰고, 1935년 영국이 괴물 히틀러를 완성시켰다’


1934년 독일 폴란드간의 불가침 조약으로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한 히틀러는 이듬해인 1935년 3월 전격적으로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한다. 이에 대응해 1935년 4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가 구호뿐인 ‘스트레사 전선’을 형성하지만, 어디까지나 구호뿐인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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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에 있었던 스트레사 전선(회의)


그리고 대망의 1935년 6월 18일, ‘영-독 해군조약’이 체결된다. 스트레사 전선이 만들어 진지 겨우 두 달 만에 영국이 ‘배신’을 한 것이다.



영국, 동맹들의 등에 칼을 꽂다


1935년 3월 독일의 재군비 선언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게는 도박이었는데, 이는 히틀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스트레사 전선이 구속력 있는 행동을 한다면 독일은 이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히틀러의 허세와 신생 제3제국의 실력 사이에는 격차가 있어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마음먹고 덤빈다면 독일은 다시 한 번 1918년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독일은 제3제국 외교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통해 스트레사 전선의 무력화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때 가장 많이 공을 들였던 대상이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램지 맥도널드는 히틀러를 믿었다. 신뢰까진 아니어도 히틀러가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는 걸 보고는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이는 다른 영국 정치인들의 대체적인 판단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게 있는데, 당시 영국을 포함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연합국) 정치인들에겐 하나의 ‘절대상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전쟁 절대불가


라는 절대조건이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 혐오증에 걸렸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히틀러가 조금 설치더라도 전쟁이 나는 것 보다는 낫다.”


라고 판단했다. 이들의 이런 허점을 간파한 (혹은 활용한)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까지 계속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차곡차곡 독일의 힘을 키워 나갔다.


“평화를 원하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란 말의 적확한 예라고 해야 할까? 당시 유럽은 히틀러를 제거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무수한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해 판단을 보류하거나 회피하면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만들어 냈다. 만약 ‘작은 전쟁’을 각오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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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이 되는 사건이 ‘영-독 해군조약’이다.


영국에 대한 변명을 하나 하자면, 당시 영국은 ‘꽤’ 몰려있는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가 지는 나라’가 된 영국은 자신의 패권을 최대한 부여잡기 위해 ‘워싱턴 체제’에 참여했고, 가장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워싱턴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패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4년, 일본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탈퇴를 선언해 버린다(워싱턴 조약은 탈퇴 2년 전 탈퇴의사를 밝혀야 했다). 영국은 난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와 뒤이은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경제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다시 건함경쟁이 벌어진다면 영국은 이겨낼 여력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영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의 복귀를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재군비 선언을 한 것이다. 최악이었다.


‘바다’를 기준으로 했을 때 영국은 고립된 상태였다. 미국과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동맹이 아니었고,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호시탐탐 영국의 이권을 노려보고 있었다(훗날 대동아공영권의 이름 아래 영국의 식민지를 공격한다). 5:5:3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서양 저편의 5는 동맹국이 아니었고, 지구 반 바퀴 밖의 3은 영국을 노려보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의 5는 일본의 3처럼 어느 한군데에 집중할 수 있는 5가 아니라, 식민지 전체를 담당하는 5였다. 건함경쟁은 영국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난데없이 독일이 끼어들었다. 만약 독일이 건함경쟁에 뛰어든다면 세계정세는 어떻게 변할까? 영국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일 것이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빌헬름 2세의 독일 제국해군(Kaiserliche Marine)과 펼친 건함경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건함경쟁과 뒤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처절함.


좋게 표현하면, 영국의 ‘과대망상’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영국 정보력의 실패이자, 영국 정치인들의 두려움이 만든 실패라고 볼 수 있는 게 ‘영-독 해군조약’이다. (음모론적 시간으로 보자면 영국이 전쟁을 부추겼다는 시각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스탈린이 영국의 ‘황당한 행동’을 보면서 소련을 독일과 일본의 총알받이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였다. 영국의 이해가 가지 않는 몇 가지 행동, 그 중에서도 당장 대륙에 보낼 수 있는 육군 병력이 4개 사단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은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라면 영국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모든 것의 목표가 소련을 독일과 일본의 총알받이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만약 영국의 말이 사실이어도 문제인 게 그렇다는 건 히틀러를 막을 수 없다는 의미라, 스탈린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독일의 과학 기술력과 경제력, 공업력이라면 금방 전함을 찍어내고, 건함경쟁에 뛰어들어 영국을 압박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영국은 독일의 공군과 육군을 과대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판단착오였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이라면 해군력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독일의 해군은 다른 유럽국가나 해군강국들과 비교해 보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국해군을 말할 때의 독일 해군은 스캐퍼플로에 자침한 상황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35년까지 독일 해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묶여 변변한 전함 한 척 띄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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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캐퍼플로에서의 자침으로 독일 해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이를 단기간 안에 복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찌어찌 배를 만든다 치더라도 운용할 해군 병력을 키우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베르사유 조약의 규제로 군 인력을 양성하는 게 어려웠다). 이 모든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영국이 어째서 이런 실수를 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은 전쟁이 두려웠던 것이다.


독일은 영국과의 조약을 통해 영국과 100:35 비율로 각종 함정을 만들 권한을 획득한다. 공식적으로 영국 해군 대비 35%의 해군력을 확충할 권한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 의미 있는 조약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보유가 금지됐던 전함과 유보트의 건조가 가능해졌고, 총 톤수로 보자면 ‘워싱턴 체제’에서 프랑스가 확보했던 1.67 비율의 건조비와 유사한 톤수를 인정받았다. 독일은 프랑스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외교적 성과도 얻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영국의 과대망상과 독일의 실제 함선건조 능력이다.


당시 영국은,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군 대비 35%에 묶어놓은 것은 커다란 외교적 성과다.”


라고 자평을 했지만, 독일은 1939년 9월 1일 전쟁을 시작했을 때 35%는 고사하고, 20%도 채우지 못했다. 당시 독일은 탱크와 전투기를 생산하기도 바빴다. 또한 영국은 그렇게 전함을 찍어냈으면서도 전함이라는 것이 단기간에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보자면 그 의미는 더 커진다.


“영국이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스트레사 전선’이 실질적인 행동을 벌일까 전전긍긍했던 독일은 그렇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별 잡음 없이 푼다. 히틀러의 완벽한 승리였다.



배신의 후폭풍


영국의 배신은 이후 ‘스트레사 전선’을 포함한 연합국의 행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영국은 단순히 스트레사 전선만 배신한 게 아니라, 전 세계를 배신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스트레사 전선의 한 축을 맡았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영국의 행보를 보면서 연합국 측에 계속 몸담고 있는 게 과연 옳은가란 회의감에 빠진다.


“유럽의 두 강국이라 자부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렇게 무력했단 말인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이탈리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무솔리니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외교노선에 따라 독일을 불편하게 바라봤지만, 이후 노선에 대한 방향 전환을 고민하게 된다(삼국동맹의 시작은 ‘영독 해군조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어울리는 것 보다는 실익을 찾아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 현명하단 판단을 내린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공격해 전쟁을 일으켰고, 연합국 대신 독일을 선택한다. 이렇게 연합국 공조체계는 서서히 붕괴한다.


가장 큰 배신감을 느꼈을 프랑스도 영국과 엇박자를 내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의견충돌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영독 해군조약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를 불신한다.


이런 개별국가간의 흔들림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완성된 ‘對 독일 안전망’의 붕괴로 이어진다.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 대한 두려움을 뼈저리게 확인한 유럽 각국은 독일에 대한 공동방위를 생각하는데, 이게 바로 ‘대독 포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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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둘러싼 나라들이 일종의 포위망을 만들었다.


베르사유 조약 직후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일관되게 ‘독일의 전쟁 방지’였다. 베르사유 체제 직후부터 대독 포위망 완성에 외교적 노력을 다했고, 그 결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영국 등을 포섭해 독일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영독 해군조약으로 가장 믿을만한(신용은 모르겠지만 실력으로는) 영국이 배신을 했고, 이탈리아도 흔들린다. 그 나머지 폴란드,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지리상, 명목상의 존재들이었다.


대독 포위망이 왜 이렇게 무기력 했는지에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프랑스가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 했다는 점
둘째, ‘블러핑’을 기반으로 한 압박의 한계


이를 좀더 살펴보면,


첫째, 당시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한 세대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 장차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수가 제1차 세계대전보다 떨어지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독일의 인구증가율은 프랑스를 추월해 상승곡선을 타는 상황이었다. 아울러 베르사유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독일의 군사력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산업 잠재력이나 국가 잠재력, 군사적인 능력에서 보여주는 잠재력은 프랑스를 추월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프랑스는 조급했고, 두려워했다.


둘째, 프랑스와 대독 포위망을 형성한 국가들의 공통된 생각 때문에 블러핑(자신의 패가 상대의 것보다 약하다고 생각될 때 오히려 더 강한 베팅을 하여 상대를 기만하는 행동)을 했다. 1920년대부터 프랑스는 부지런히 독일을 견제할 중부유럽과 서유럽의 국가들을 찾아서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러면서 내놓은 카드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면, 당신들이 독일의 뒤를 공격하라. 당신들이 공격당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뒤통수를 치겠다.”


였다, 기본적으로 ‘한대 맞으면’이란 전제가 깔려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억과 독일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어 먼저 전쟁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최후의 순간 전쟁이란 카드를 뽑아들고 독일을 압박해야 하는데, 그 가능성을 제외한 후 오로지 ‘블러핑’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히틀러의 상식을 파괴하는 ‘행동’ 앞에서 블러핑이 통할까? 수세적인 전략만을 세워놓고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 독일을 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믿을 만한 우방은 벨기에 하나뿐이었고, 벨기에 하나만이 프랑스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벨기에는 프랑스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였고, 독일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프랑스와 함께 전쟁에 가장 먼저 노출될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벨기에는 1920년 프랑스와 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이 부분은 눈여겨봐야 하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는 중립을 선포했지만, 위치상의 문제로 독일과 프랑스군에 의해 국토가 짓밟힌다. 어설픈 중립이 부른 참화였다. 이 뼈아픈 교훈 때문에 1920년 프랑스와 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전쟁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1934년, 벨기에는 다시 한 번 중립을 선포하려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다는 내부 판단 때문인지 중립 국가 선포를 취소한다.


프랑스가 만든 대독 포위망 중 남아있는, 그리고 100% 믿을만한 존재는 벨기에뿐이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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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