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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기획재정부가 페이스북을 통해 야심차게 준비한 술자리 예절 캠페인은 욕만 잔뜩 처먹은 실패한 캠페인으로 끝났다. 욕 처먹을 만한 짓은 분명하다. 마침 이 문제가 불거진 김에 더 많이 공론화되어 술자리 문화를 좀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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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재부를 욕하는 언론과 네티즌들의 행태가 좀 뜬금없이 느껴진다. 사실, 기재부가 제시한 술 예절 항목은 대부분 직딩들의 술자리에서 이미 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 손으로 주고 받고, 손윗 사람 앞에서 고개 돌리며 주는 잔을 일단 사양하지 않는다. 한국 성인들이라면 술자리에서 거의 습관처럼 굳어진 그런 관행들이다. <미생> 등의 드라마들에서도 매번 보는 장면이다.


욕하는 내용들도 유심히 살펴보면 술 예절 캠페인을 하는 기재부의 오지랖에 대한 것이거나, 첫 잔을 무조건 받으라는 것을 꼰대 문화로 규정하는 것 외에는 별로 없는 듯하다.


두 손으로 잔을 따르고 받는 행위라거나, 연장자 앞에서 고개 돌리는 게 더 꼰대짓스럽지 않나? 기재부가 마저 쓰지 않았지만, 빈 잔만 보이면 서로 술을 따라주고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술 문화다.


나는 이런 모든 술자리 예절이 아주 없어졌으면 좋겠다.


두 손으로 술을 따르고 받는 것은 현대적 기준으로 과잉 예절이다. 주고 받을 때마다 두 손을 치켜들어야 하니 너무나 번거롭고 짜증난다. 내 스스로 내 잔을 따르려면 주변에서 화급히 술병을 빼앗아 내 잔을 채워준다. 마찬가지로 남의 잔이 비어 있을 때는 내가 채워줘야 한다. 술잔이 비워질 때마다 주변 사람이 술병 들어 채우는 것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연장자 앞에서 고개 돌려 술 마시는 예법은 봉건적이고 위계적 인습의 잔재에 다름 아니다. 이런 성가신 술 문화는 향음주례와 같은 옛 문헌에서 비롯되었다. 21세기에 이런 문화를 잔존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술도 하나의 식음료에 지나지 않는데, 왜 이렇게 지나치게 예절을 강조하는가. 술에 취해서 실수하는 경우를 방지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술은 어른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도 이런 의도의 반영이겠지.


그러나 연장자나 상급자와의 술 자리가 더 점잖아 진다는 보장도 없다. 되레 원샷 강권, 폭탄주, 2차-3차 강요 등으로 개차반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니까 술자리 예법은 위계적 질서를 만끽하려는 꼰대들을 위한 문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과음해서 술에 취해 개가 되는 일은 오히려 이런 술 문화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에 더 심증이 간다. '내가 마신만큼 너도 마시고, 내가 취한만큼 너도 취해라!' 이게 거의 우리 술자리의 강령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쓸데없이 건배와 원샷하지 않고 내가 마시고 싶을 때 스스로 따라 마시기만해도, 자기 주량을 넘어서는 일은 좀체 발생하지 않는다. 고로 과음에 의한 술자리 실수도 그만큼 줄어들 확률이 오히려 더 많다. 술자리에서의 개인주의가 너무나 절실하다.


술 문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이런 병맛스런 예법이 강조되고 온존되어 온 것은 한국 특유의 위계 문화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런 위계적 문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 포스트모던 유행마저 지나간 시대에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에게서 90도 인사를 넘어 심지어 폴더 인사까지 등장하는 것은 불길한 징후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그런 도 넘은 인사법은 조폭들의 위계에서나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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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더하다. ‘님’이라는 호칭이 너무나 일반화되었다. 과거에 적어도 방송에서만큼은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상호간에 ‘씨’를 붙이는 것이 공식 어법이었으나, 그것마저 무너지고 OOO님으로 호칭 인플레가 만연하다.


나는 지금도 어색한 것이 이 ‘님’ 호칭이다. 불과 이십년 전만 하더라도, 이 ‘님’자가 사람 이름이나, 닉네임 뒤에 접미사처럼 붙지 않았다. 가령 ‘소월님’처럼 가장 존경하는 문인이나 위인 뒤에 붙이는 최고 존엄의 극존칭으로서 가끔 사용될 뿐이었고, 그마저도 글에서나 등장하는 닭살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나 PC 통신에서 ‘님’자 붙이는 캠페인이 불더니 어느 순간 그런 호칭 붙이기가 기본 에티켓이 되어버렸다. 그 과도기에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되었냐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사연이 소개될 때, 엽서로 보낸이의 이름은 ‘김말자씨’로 소개되고, PC통신이나 문자로 사연 보낸 이의 닉네임 뒤에는 ‘풍선님’으로 불리는 것이다. 심지어 ‘5678님’으로도 소개한다. 이게 무슨 병맛스런 상황인가.


언어는 대게 시간이 흐를수록 간명화된다. 특히 속도가 중시되는 현대에는 축약 등 언어의 경제성을 더 추구하게 되어 있다. 또 인터넷이나 SNS 등 전자통신에는 이런 양상이 더 강화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님’자의 남발, 경어의 강화는 시대 역행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경어가 복잡하게 발달한 우리말 자체부터가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다. 고종석의 말마따나 우리말은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경어체계를 지닌 말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는 나이나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또는 나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나 사용될 뿐 존칭을 사용해야 할 자리에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그 경우 한국인들은 그 자리를 비워두거나 나이·가족·직업·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아버님·국장님·선생님·숙자 씨 등)를 사용한다.


2인칭 대명사만 위계에 예민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 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나이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갑오경장 이래 법률적 신분이야 없어졌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계급’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신분)를 드러내고,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국어에 대한 내 애정에 주름을 만든다.”

고종석, [시사저널] 463호]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 권력은 신분 높은 이에게 말하는 ‘마담’, ‘무슈’라는 말을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신분 높은 사람에게 붙이는 2인칭 대명사 vous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평어의 tu로 단일화시키도록 했다. 영어의 경우 thou와 ye로 구별되었던 위계적 호칭도 you로 단일화되면서 영어의 경어체계가 무너졌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터넷에서 계급장 떼고 나이 떼고 반말로 대화하는 것은 위계질서에서 벗어난 묘한 해방감을 준다. 딴지일보 초창기 시절 기사도 그렇고, 게시판도 그렇고 모두가 너나들이 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다. 독자와 운영자 사이에서도 반말투로 전달할 내용이 오고갔다. 서열과 위계 문화에 적대적인 리버럴 쪽에서 그런 반말 문화가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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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딴지도 게시판에 경어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스르륵 사태로 딴지 게시판의 새로운 이용자가 대거 생겨난 후부터는 딴지의 반말체는 흔적도 사라지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재미있는 것은 우파 진영의 대표 커뮤니티 일베나 디씨에서는 반말투가 일반화되어 있고, 오늘의 유머라든지 엠팍 불펜 등 야권지지 성향의 커뮤니티는 경어가 게시판 문화가 되어있다는 점이다. 뭔가 전도된 상황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경어를 쓰든, 평어로 쓰든 게시판에서 서열 없이 모두가 동등한 화용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상호 평등성이 유지되기는 하겠지만, 경어 사용은 한국의 위계적 언어문화에 순치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반말 문화를 오프라인에까지 무작정 연장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에서까지 반말로 하기에는 어감상의 저항감도 생기고, 또 인간 관계에서 당장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학교다닐 때 미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전공하고 이제 막 부임한 교수가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관계에서부터도 평등해야 된다며 학생들에게 사석에서도 모두 존대를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도 변했다. 여러 교수들과 학생들이 같이 있을 때, 교수 중에서 자기만 학생들에게 존대를 하게 되니까, 교수들도 그 자리를 어려워하게 되고 학생들도 어색해지기도 해서 도저히 그런 화법을 고집할 수 없게 되더라는 얘기였다. 상호 존대도 이렇게 어려운데, 상호 반말은 상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오프라인에서는 나와 상대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함께 엮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결단으로 호칭과 경어체계의 언어 문화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만큼은 익명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우리나라에 좌파가 있는지, 진보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미국 정치에서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는 패션과 취향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던데, 과연 한국에서는 진보파와 보수파의 문화 차이가 그 정도로 날까.


특히 평등과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좌파라면 한국의 위계와 서열문화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해하고 저항해야 할 텐데, 그런 움직임이 가시화된 것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의 위계 문화에 좌우파가 따로 없다면, 사실상 좌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잘 적응한 이들을 좌파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페미니스트들이 이름에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벌이듯, 좌파쪽에서 위계 없는 언어 문화 운동같은 것을 전개해보는 것을 상상해본다. 모든 경어를 금지하자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위계를 강제시키는 2인칭 호칭만은 바꾸자고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언어 문화를 일거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이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통일된 2인칭 호칭을 새로 만든다면 평등한 인간관계에 한층 가까워질 것이다. 형이라고,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싸우고 삐지고 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회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내가 생각해둔 말은 그냥 'you'다. ‘너’라는 말은 하대로 굳어진 호칭이라 어감의 저항을 받는다는 점에서 적당한 호칭은 아닐 것 같다. you는 영어배울 때, 선생한테도 했던 말이니까 좀 더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 외교 관료들 사이에서도 상대 호칭을 이 'you'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아무튼 좌파 쪽에서 위계문화를 벗어난 그런 언어 운동을 일으키는 대담한 상상이 나오기를 바란다.


새해에는 나는 한국의 술 예법을 무시할 작정이다. 또, ‘님’자 붙이는 일도 가급적 줄일 것이다. 무엇보다, 위계 없는 언어 만들기 운동에 누군가 뜻을 같이한다면 본격적으로 전개해볼 생각이다. 나는 리버럴이고 좌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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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편집 : 딴지일보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