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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유투브 알고리즘 때문이다. 끊이지 않는 아이돌의 연관 동영상만 아니었으면 해산물과 자신을 동급으로 생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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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동안 아이돌 영상을 보았다. 암바를 했다간 꼭두각시 인형처럼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팔과 초크를 걸었다간 고대로 부러질 것 같은 목을 가진 가녀린 친구들을. 기성복이 맞지 않을 것 같은 몸이 하늘하늘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내 다리로 시선이 내려간다.

 

허벅지가 한 무더기였다. 의자에 눌려 퍼져보이는 것이라고 자신을 달래보았지만, 설경구가 그랬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이미 장기기억 장치엔 나뭇가지 같은 몸이 저장된 뒤였고, 내 몸은 그것을 너무나 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얘는 왜 살을 빼려고 하나

 

어렸을 때부터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말라보는 게 소원이었다. 지금은 BMI 기준 정상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비만이었기 때문이다. 소아비만 출신, 제가 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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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성 부른 아이였던 초1 때 이 정도

 

키는 앞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데, 몸무게는 다른 애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머리 하나는 큰 애들이 입어야 할 사이즈의 옷을 입어야 했으니, 바지가 커서 벨트하는 애들이, 티셔츠 위로 뱃살의 굴곡이 아닌 뼈의 뾰족함이 드러나는 애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몸무게의 최정점을 찍었던 건 중3 때. 좋아하던 남자애에게 "넌 덩치가 있으니까"라는 말을 들었다. 그 때 키가 150cm 정도였는데(인간의 존엄을 위해 밝혀두지만 지금은 이것보단 큼), 무려 이 키로 '덩치'라는 타이틀 얻었다. 순전히 살집만으로 '덩치'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애다.

 

평생 과체중(이지만 방심하면 비만으로 넘어감) 타이틀을 달고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고3 때, 어지간히 공부하기 싫었던지, 태어나서 처음 '마른' 애가 되었다. 공부 스트레스로 2주도 안되는 시간에 5kg 가량이 빠졌던 것이다. 

 

5kg의 효과는 엄청났다.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통통~뚱뚱을 벗어났던 적이 없는 애가 갑자기 뼈가 됐으니, 세상 처음 겪는 일 뿐이었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옷을 통해서였다. 체형 때문에 제약이 꽤 많았던 전과 달리, 마른 몸은 아무 옷이나 허락했다. 이래서 옷을 잘 입고 싶으면 살을 빼라고 하는 가보다. 마네킹이 된 기분(아동복 마네킹임)에 평상시에 입지 못했던 스키니 같은 것들을 신나게 샀더랬다. 

 

아무거나 어울리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아무데나 가서 옷을 입어도 되는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옷가게에서 점원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소아비만 시절에는 옷가게에서 옷을 입어보는 게 꽤 스트레스였다. 키가 작으니 살집이 있어도 스몰 사이즈의 옷을 입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살집 있는 아이가 어른 옷 사는 것처럼), 옷을 입어보기 위해 점원에게 "S 사이즈 주세요"라고 하는 게 꽤 어려웠다. 

 

면전에서 '네가 스몰을 입는다고?'라는 뜻이 담긴 눈길을 받는다면 누구든 그렇게 되고 만다. "저희가 좀 작게 나"온다며 에둘러 거절하는 사람, "안 맞으실 텐데?"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보이는 사람 등을 겪다 보면, 물어보기 전에 방어태세부터 취하고 만다. 스몰을 달라고 하면 이 놈이 곱게 줄까, 아님 뭐라고 할까, 를 미리 생각하는 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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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흐흑

 

옷이 맞으면 맞는 대로 '의외'라고 쓰인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역시'라고 쓰인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의외'든 '역시'든 신경 쓰이는 건 매한가지라서, "제가 키가 작아서 맞는다"든가, "제가 키는 작은데 덩치가 있어서요"라던가, 나도 모르게 변명을 한다(왠지 납득시켜야 할 것 같았음). 누가 보면 공짜로 옷 받으러 간 줄 알겠지만 옷가게에 내 돈(은 아니고 부모님 돈) 내려고 간 것이다. 자본주의에선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겠지만 그게 아닐 때도 있다. 

 

'마른' 애가 되고 이런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웬만한 경우 내가 점원보다 마르기도 했고(키도 더 작지만), 객관적으로도 말라서 아무도 '옷이 맞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펀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마르면 옷가게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뿐만 아니다. XX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주변으로부터 징하게 들은 "왜 이렇게 살이 쪘"냐는 소리가 뚝 끊겼다. 되레 "살 좀 쪄야겠다"라는 덕담 아닌 덕담(내 입장에서는 저주지만)을 들었다. 언제는 '키가 작으니 살이라도 빼야지 않겠냐'고 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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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안 클 것은 뻔하니 살 얘기를 했던 듯

출처: <머니투데이>

 

모든 것은 BMI 지수가 정상을 밑도는 '마른' 사람이어서였다. 바뀐 건 몸무게 밖에 없는데, 나에 대한 무례함이 줄어있었다. 그렇게 치면 살집이 있을 때가 힘도 더 셀 테니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구. 하지만 별명이 목각인형이 될 정도로 마른 애가 되니 사람들이 덜 함부로 했다. '살을 빼니 주변의 태도가 달라졌다'던 말이 이렇게 적용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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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이런 말 하는 사람 엿 먹었으면 좋겠다 생각함

 

하지만 이는 문제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 번도 안 해본 놈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놈은 없다고, '마른' 몸과 그에 따른 주변의 변화를 한 번이라도 맛 본 게 잘못이었다.

 

원래 살이 잘 찌는 체질인데(고2까지 소아비만으로 살았는데 살이 안 찌는 체질일 리 없음), 한 번 말라봤다고 누구보다 마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만족을 모르는 사람의 특성을 더하면, 악순환이라는 이름의 시너지가 일어난다. 

 

고3 때 잠시 목각인형이었다고 해도 체질이란 놈은 나를 다시 곰인형(피부도 노래서 조금 곰돌이 푸우 같음)으로 만들어갔다. 처음엔 부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었다고 하기엔 목각인형으로 돌아가질 않았다.

 

그랬다. 그냥 찐 것이었다. 마른 애가 된 뒤 사들였던 옷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안 그래도 살이 조금 붙은 뒤 만난 친척이 '좀 쪘네?'라며 신경을 긁어놓은 뒤였다. 지금은 '좀'이지만, 완전한 푸우로 돌아간다면? '커서' 못 입겠다 입 털면서 버렸던 예전 옷들을 다시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온다면? 주변인에게 안부인사처럼 잔소리를 듣고 옷가게에서 숨쉬듯 눈치를 보아야 할 것이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이어트'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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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짓을 몇 년이나 함

 

안타까운 건 사람에게는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고, 나는 자연의 섭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찌고 빼는 과정은 몇 번이나, 몇 년이나 반복되었다. 덕분에 온동네 다이어트를 다 해봤다. 고구마만 먹어봤고, 한 끼만 먹어봤고, 안 먹어도 봤다(운동도 함). 하루 다 합쳐 새모이도 안될 만큼 적게 먹다 보면 참 좋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럼에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뼈 위에 거죽만 올라가는 것, 제일 좋아하는 말은 '피죽도 못 먹은 애 같다' '콩 한 쪽을 두 끼에 나눠 먹을 것 같다'다. 어째 소아비만이던 때보다 훨씬 '마름'에 목을 매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입어보기 전에 옷이 작을까봐 고민하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다. 옷이 안 맞을 때 묘하게 비웃는 점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호르몬과 유투브가 만든 고난의 행군

 

몇 년이나 위와 같은 악순환을 반복했지만, 나이는 못 속인다. 체력적 한계로 '살찌면 적게 먹다가 또 살찌는 것 같으면 고구마만 먹는' 일을 쉬고 있던 차였다(견딜 체력이 없다는 걸 우리 집 인형도 앎).

 

이제는 그만해야겠다 마음도 먹었던 것 같은데, 정말로 유투브 알고리즘이 잘못했다. 이미 뇌를 '물도 담을 수 있을 듯 툭 튀어나온 쇄골뼈'로 가득 채워놓았다.

 

재수가 없으려면 계속 없다. 아이돌 몸매와 나의 몸 사이엔 차이점 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는 중인데,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다시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리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제는 생리에 맞춰 슬슬 몸이 붓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건 부종이니 언젠가 빠질 거라고 머리는 알고 있지만, 사실 살이 찐 건 아닐까 신경이 곤두서는 건 서는 거다. 어제 먹은 시리얼이 지방이 되어 몸에서 평생 살기로 결정한 건 아닐까 의심이 든다.

 

자연스레 아이돌의 가녀림과 나를 비교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화를 내게 만든다. 저렇게 마른 애들도 대기실에서 과일 밖에 안 먹고 몇 시간 씩 춤연습을 하는데 너는 왜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있냐고(일어날 생각은 안 함).

 

속상한 건 합리화할 생각도 안 든다는 것이다. 원하는 건 티셔츠의 어깨선이 직각으로 떨어지고, 바지의 허리 부분에 여유가 있는 몸인데, 현실은 살찐 푸우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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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극은 무작정 굶어보자, 라는 계획을 세우게 만들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정보의 요람에서 일주일 짜리 단식 계획표를 찾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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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관 짜는 법

 

내용만 보면 '할 수 있다면 일주일 동안 굶어보시지?'의 전형이지만, 상단에 적힌 한 문장이 여기에 좋아요'를 누르게 만들었다.

 

"Lose 10Lbs in 1 week"

"일주일에 10파운드(약 4.5kg) 빠짐"

 

키 큰 사람에게 4.5kg는 대단한 게 아닐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때 이후로 성장판 구경을 하지 못한 15Xcm인 애에게 4.5kg면 엄청난 무게다.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의 평균 몸무게가 5kg 정도 차이난다는 걸 감안하면, 키는 그대로인데 5kg 차이가 나는 건 '학교에서 어깨를 피고 다닐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를 정도로 크다. 

 

만약 4.5kg이 빠진다면, 정말로 '부러질 것 같은' 몸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말랐던 목각인형 시절, 혹은 그보다 더 가늘어질 지 몰랐다. 주짓수 할 때 암바 걸다가 내 다리가 부러질 지도 모른다. 그럼 꽉 껴서 소화불량을 유도하는 바지도, 팔뚝의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티셔츠도 신진대사를 방해하지 않고 그저 몸을 가려주고 보호해주는 옷 본연의 기능을 하겠지? 이러다 아이돌 데뷔하는 거 아녀?(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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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식사이자 전날 저녁으로 시리얼을 거하게 먹고(이미 글렀음), 다짐했다. 마이너스 4.5kg를 위해서, 내일부터 일주일을 굶는다고. 

 

그렇다. 나는 이 나이에 뭇 어른들이 말하는 '유투브가 애들을 망쳤다'의 전형이 되고 싶어서 굶기로 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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