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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식량이 활약할 공간은 ‘전쟁’ 뿐이다. 평시에 군용 비상식량을 먹을 이유가 있을까? 군인이라도 평시에는 일반적인 식사를 한다(유통기한이 임박해서 뿌리는 경우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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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본은 내전상태로 보는 게 맞다.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에도막부가 무너진 이후 일본의 권력이 유신정부로 넘어간 듯 보였지만, 260년을 이어져 내려온 에도막부가 호락호락 무너질 존재는 아니었다. 

 

권력 체제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이 그냥 가만히 있었을까? 보신전쟁(戊辰戦争), 세이난전쟁(西南戦争)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여기에 고개를 들이민 게 ‘빵’이었다. 보신전쟁 때 관군은 검정깨를 박은 빵 5,000명 분을 들고 나갔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빵이 전쟁에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빵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건 세이난전쟁이었다. 유신삼걸(維新の三傑)로 이름을 날렸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건 다바라자카(田原坂)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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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의 봄은 예년과 좀 달랐다. 3월이면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는 게 상식인데, 이 해엔 장마가 온 듯 수시로 큰 비가 쏟아졌다. 관군과 사이고군은 빗속에서 열이레 동안 사투를 벌였다. 양측 모두 30만 발의 탄환을 쏟아부었고, 1만 2000명이 전사한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요소 중 하나가 ‘보급’이었다. 사이고의 부대는 비 오는 와중에 밥을 짓고, 주먹밥을 만들어야 했는데, 비가 내리기 때문에 밥을 짓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설사 밥을 짓는다 해도 제때 건네기 어려웠다. 덕분에 사이고의 부대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워야 했다. 

 

반면, 관군은 최소한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단팥빵’을 만든 기무라 빵집(キムラヤのパン : 1869년 창업한 일본의 대표적인 빵집. 메이지 일왕에게 팥빵을 헌상한 걸로 유명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4월 4일을 팥빵의 날로 제정했다)을 비롯한 3개의 빵집에다가 14만 2000㎏의 빵을 주문했다. 사이고의 부대들이 굶주리고 있었을 때 관군은 빵을 씹으며 싸웠다. 

 

빵의 위력이 확인된 순간이다. 

 

(관군이 먹었던 빵은 단팥빵 같은 일반 빵이 아니라 ‘건면포(乾麺麭)’, 그러니까 ‘마른 빵’이었다. 건빵의 전신이라 할 수 있지만 건빵과 달리 꽤 컸다. 한 끼에 2개, 하루 6개를 먹는 게 정량이었다. 너무 크고, 잘 부서진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주먹밥 보다는 나았다)

 

건면포가 건빵이 되기 위해서는 전쟁을 거쳐야 했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주먹밥을 만들려고 해도 부대 이동이 너무 빨라서 밥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건면포로 비상급식을 해!”

“그건 너무 커서...”

“배고픈 것보다 낫잖아!”

“너무 잘 부서져서 가루가 됩니다.”

“가루라도 먹을 수 있잖아! 이것들이 배가 불러가지고!”

 

청일전쟁 때 일본군은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조선과 청나라를 배경으로 싸웠기에 당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동 거리가 길어지니 보급선도 길어졌고, 취사나 보급에 난점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주먹밥으로 병사들의 허기를 채우기는 어려웠다. 이때 다시 등장한 게 건면포였으나, '너무 크다'는 것과 '잘 부서진다'는 단점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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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건면포의 한계를 실감한 일본군은 이후 다시 한 번 군용식량의 개량작업에 들어간다. 

 

“선진국들의 군용식량을 참조해서 우리만의 새로운 군용식량을 만들자!”

 

일본은 전통적인 우호국인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등에 군용식량 조사단을 파견한다. 이 때 이들 눈에 들어온 게 독일군의 '비스킷(biscuit)'이었다. 

 

일본은 독일의 비스킷을 참조해 '중소면포(重燒麵包)'란 걸 만들어낸다. '중소(重燒)'는 두 번 구웠다는 뜻이고, 비스켓 또한 '두 번 굽다'란 뜻이니,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 '면포(麵包)'는 '빵', '떡'이라는 의미다. '중소'와 '면포'를 이어붙이면, “두 번 구운 빵”이 된다.

 

밀가루에 찹쌀가루 등을 혼합해 구워낸 중소면포는 보존연한이 7년이나 되는 ‘괴물’이었다. 다만 보존연한을 유지하기 위해 수분을 한계치까지 줄여야 했고, 이에 따라 굳기와 맛이 ‘일반상식’을 넘어섰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도 굶는 거 보다는 낫다.”란 평가를 받았지만, 여전히 잘 깨졌고, 물 없이는 먹기 힘들고, 먹다 보면 질렸다.

 

불만이 쌓인 병사들은 엄한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중소(重燒)'란 말이 '중상(重傷)'이란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이거 들고 다니다가 총 맞는 거 아냐?”

 

병사들은 중소면포 들고 다니는 걸 꺼리게 됐다. 물론 중소면포는 야전에서 비상식량으로 충분히 맹활약 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조리 없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으로 할 일을 했다. 생명 앞에서 불편함은 사치다.

 

그렇다고 병사들의 불만사항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이후 다시 한 번 군용식량의 개량작업에 들어간다. 

 

“중소면포가 잘 부서지는 건 점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건 글루텐 함량이 낮은 미국 밀가루를 써서 그렇다. 이제 글루텐 함량이 높은 유럽 밀가루로 만들자.”

“병사들의 사기 함양 차원에서 '중소면포(重燒麵包)'란 이름은 버리고, '건면포(乾麺麭)'로 바꾸자!”

 

개선된 건면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다. 칭다오 전투 때 일본군은 건면포를 씹으며 독일군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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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계속해서 건면포를 개량했다. 밀가루에 쌀가루 감자녹말을 섞었다. 

 

“쌀가루와 감자녹말을 10% 정도 더 넣어! 점성이 올라갈 거야.”

“병사들이 맛이 없다고 투덜댑니다.”

“맛을 개선하기 위해서 참깨를 좀 넣어봐.”

 

이런 식으로 여러 번 개량한 건면포는 1920년대, 다시 한 번 중대한 변화를 시도한다. 

 

‘별사탕’이다. 

 

일본 입장에서 소위 ‘시베리아 출병’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이걸 붕괴시키겠다고 일본이 7만 3천의 병력을 동원, 러시아로 밀고 들어간다.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건면포를 지급하며, 시험적으로 별사탕도 같이 지급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별사탕의 색깔이다. 

 

“별사탕이 흰색이라 눈에 흘리기라도 하면 찾기가 힘들다.”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에게 눈은 일상이었다. 별사탕을 먹다가 흘리면 다시 찾는 게 어려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 있는 별사탕'의 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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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건면포가 건빵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건빵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전쟁을 거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