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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山口組三代目(야마구치구미 삼대째)> 中

 

'일상을 깨뜨리는' 요인의 궁극은 전쟁일 것이다.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권력에 의해 동원되기 때문이다.

 

전시 체제가 일본 전체를 휩쓸며 전선이 확대되었다. 이 때 야쿠자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또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야쿠자가 맡은 사회적 역할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번에는 전시 체제 아래, 그리고 전쟁 직후 야쿠자의 모습을 엿보기로 한다.

 

이 와중에 정치나 군부와 거리를 둔 야마구치구미는 전쟁 중 고난을 겪었다. 야쿠자의 거친 기질이 씩씩함으로 작용한 비일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겠다.

 

 

1. 전시 체제와 야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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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의 성장세를 이끌던 2대 쿠미쵸(두목)가 사망하고 훗날 3대가 되는 '타오카 카즈오'가 두각을 나타내던 무렵, 일본은 전시 체제에 돌입하고 있었다.

 

제2차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 아래, 정부・군부는 물론 모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신체제운동(新体制運動)”이 벌어졌다. 미일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인 1940년에는 모든 정당이 해체,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로 재편되었다.

 

전쟁이 격화되자 세상은 “백수 신세”를 허용하지 않았고, 사상 처음 전업 야쿠자는 불법적인 존재가 되었다. 전업 도박꾼도 토건업이나 운송업, 흥행업 등의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다. 

 

원래 '야쿠자' 기질이라는 것은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다. 군기(軍紀), 즉 군대의 법도와 질서를 잘 지킬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미일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야쿠자가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 머물렀다. 입대를 했다고 해도 상관을 때려 추방당하곤 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야쿠자의 손길이 필요해졌다. 야쿠자가 적극 동원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군이 각 야쿠자 조직의 특색을 고려해 그들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외지(外地, 일본 국외)에는 총을 쏘는 병사 뿐 아니라 작전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환경을 정비하는 병사도 있다. 군은 야쿠자가 평시 종사하던 분야를 감안하여 적재적소에 동원했다.

 

토건업을 하는 야쿠자에게는 군 관련 토목공사를 시켰고, 항만 하역・수송업에 종사하는 야쿠자에겐 인원, 무기, 식량 등을 싣고 나르는 병참(兵站) 업무를 시켰다. 흥행업 계열 야쿠자는 병사 위문, 폐기물 회수업에 종사하는 야쿠자는 금속・섬유 원료의 조달을 맡기는 등 전문 분야에 맞게 동원했다.

 

'의외'라고 해야 할까, 야쿠자는 전지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칠다고 형용될 기질도 전쟁터에서는 씩씩함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평소 그늘에 숨어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던 이들이 '나라가 맡기는' 일을 했다는 것에 힘을 냈을지 모르겠다. (물론 전쟁터에 있어서도 야쿠자는 야쿠자인 것이, 전지나 점령지에서 노름판을 벌이기도 했고 군에 용역을 중개해주면서 중개료를 가로채기도 하였다)

 

한편 내지(內地, 일본 국내)의 야쿠자는 기댈 수 있는 존재로 재향 군인들과 함께 동네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야쿠자가 아직 지역 공동체에 뿌리내려 있는 것에 더해 비일상적 상황에서 사물을 처리하는 방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구하기 어려운 물자라도 야쿠자는 그 연고를 이용해서 조달할 수 있었다. 야쿠자가 동네의 '가오'로 신뢰받았을 거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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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山口組三代目(야마구치구미 삼대째)> 中

 

야쿠자의 활약 무대가 넓어진 건 일본 본토가 공습당하면서다. 도시 주민들은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야쿠자는 식구들이 떠나 빈집이 된 주택을 빈 터(공습으로 인한 연소를 막기 위해)로 만드는 일을 맡았다. 또한 추락한 B29 폭격기 등을 해체・정리하는 일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해체한 전투기에서 추려낸 부품이나 금속류는 큰 수입원이 되었다).

 

그런 와중 야쿠자와 정부가 유착하는 일도 벌어졌다. '관동국수회(関東国粋会)'와 법무성의 관계는 이미 유명하다. 법무성은 관동국수회에게 '폭격으로 사망한 이재민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소각'하는 일을 맡긴다. 이에 국수회는 '무사시제신대(武蔵挺身隊)'라는 협력단체를 꾸려 위촉에 응하였다.

 

육군은 경시청을 통해 타키노가와 일가(滝野川一家)의 니시무라 타미죠(西村民蔵) '총장에게 전국의 국수회 차원에서 협력해 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무사시제신대의 확대판으로, 타키노가와 일가는 조직원 후쿠하라 리쿠죠(福原陸三), 북관동 오쿠보 일가(大久保一家) 나카지마 토요키치(中島豊吉) 총장을 시켜서 아카기제신대(赤城挺身隊)라는 협력단체를 조직하였다. 야마토민로회(大和民労会) 계열 조직들도 쇠나 구리 등 금속 자원의 수집 등으로 정부에 협력하였다.

 

아카기제신대 내부에서는 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야쿠자, 테키야(노점상계 야쿠자), 노가다를 싹 모아 '깨끗한 몸으로 만드는'” 기회로 삼았다. “애국을 위해 일하는 거니 사소한 죄는 봐주겠지”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단다.

 

야쿠자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도' 중 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히로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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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문을 닫는 도박장이 속출했지만, 반대로 영업을 지속하는 도박장은 번창했다. 이들은 히로뽕의 제조, 저장, 판매를 통해 돈을 더 크게, 더 많이 벌었다.

 

일본은 전쟁 하에서 굳이 히로뽕을 제조했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작업원에게는 체력증진제로, 야간 감시 임무를 맡은 전투원에게는 야간 시력 향상제로 주었다. 전쟁 말기에는 특공대원들에게 “특공제(특공에 도움이 되는 약제)”로 주기도 했다(히로뽕의 어원이 “부지런함(근면)”이나 “노동을 좋아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Φιλόπονος(필로포노스)”에 있다는 설이 있다).

 

이 히로뽕 제조, 저장, 배포 과정에 야쿠자가 동원되었다. 물론 히로뽕이 큰 수익원이 되기 위해서는 제품의 일부를 빼돌려 암시장에서 팔아야 했지만, 전후 1951년에 각성제단속법이 시행될 때까지 야쿠자의 주된 자금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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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뽕 외에도 패전 후 군이 관리하던 물자를 야쿠자가 가로챈 것으로 여겨진다. 설탕, 술, 담배, 담요, 옷, 못 등 온갖 물자를 약탈했는데, 압권은 “온 창고 약탈”이다. 창고에 보관된 물건을 싹쓸이했단 게 아니고,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창고 자체, 전화선, 전선, 지하케이블, 지붕, 벽, 기둥 등 '창고를 이룬 자재'를 하나씩 다 팔았단 이야기다.

 

전시 체제에서 야쿠자는 군국주의나 국수주의에 사로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냉담하였다는 설이 있다. 야쿠자의 행태를 보면 자신들의 일이 공식화 혹은 양성화되는 부분에 대해 나름 자신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나, 행동원리 자체엔 의협심과 생존 본능이 있었을 뿐이 아니었나 싶다.

 

 

 

2. 야마구치구미의 쇠퇴

 

이미 언급했다시피 야마구치구미는 정당이나 군부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전시 체제의 단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42년에는 2대 쿠미쵸 야마구치 노보루가 사망했는데 3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다음 해에는 야쿠자의 “쿠미”제도가 붕괴되었다.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통제 때문에 해운업계에서 “일항일사제도(一港一社, 하나의 항만에 하나의 회사만 허용하는 제도)”가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고베항을 본거지로 영업하던 여러 조직이 노무보국회(労務報国会)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야마구치구미는 와카가시라(若頭, 조직의 넘버2) 스미다 무노루(澄田実)와 샤테이(舎弟, 꼬붕) 17명으로 구성된 야마구치구미 형제회가 운영하고 있었다(많은 조직원이 전쟁에 징용되었던 상황이다). 조직 중추부인 형제회가 야마구치구미의 본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쇠퇴하고 있었다.

 

당시 야쿠자 조직은 항만 운수업이나 토건업 등에 노동자를 공급하는 노동조직적인 측면도 컸던 만큼, 야쿠자와 노동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구성원이 있었고, 이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조직을 드나들었다. 전시 총동원 체제 하에서는 오야붕한테 “사카즈키”를 받은 멤버만이 남아있던 게 각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참고로 고베에 혼다카이(本多会), 나카야마구미(中山組), 고시마구미(五島組), 오오시마구미(大島組),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아마가사키(尼崎)에 카사야구미(笠谷組), 니시노미야(西宮)에 마츠모토구미(松本組)와 나카무라구미(中村組)가 있었다. 조직원 수는 500명 정도로,  전시 체제라는 파동 앞에 각 조직은 구심력을 잃어갔다. 야마구치구미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

 

그런 가운데 후일 야마구치구미 3대 째를 계승할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가 코치형무소(高知刑務所)에서 출소한다. 1943년 7월의 일이었다. 마중나온 20명 가량의 조직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출소를 축하하였다. 타오카 카즈오는 그 상황을 멀리 바라보는 한 여성의 모습을 알아챘다. 아내 후미코(文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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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카 카즈오와 아내 후미코

 

 

 

3. 전후 “야미이치(ヤミ市, 암시장)”와 제3국인

 

1945년 3월 17일부터 6월 5일에 걸쳐 미군이 고베를 공습했다(영화 “반딧불이의 묘”에 나온 공습). 2만 2,000명이 사망했고, 고베시 소재 가옥의 60%에 이르는 12만 3,000호가 불에 탔다.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에 따라 모든 사람이 전시 체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 전쟁이 파괴의 축적인 만큼 패전 직후 일본은 모든 것이 고갈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도시에는 폭격당해 불 탄 자리, 전철역 앞이나 광장, 철도 육교 아래 등을 이용해 야미이치(ヤミ市), 즉 '암시장'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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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미이치에서는 전쟁 중 빼돌린 물자나 미군에서 빼내 온 물자, 예를 들어 “카스토리”나 “바쿠단(폭탄)” 등 밀조주, 식량, 의류 등이 팔렸다. 지금 JR 우에노(上野)역과 오카치마치(御徒町)역 사이에 있는 '아메요코(アメ横)' 역시 야미이치였다(아메요코라는 말은 “야메야 요코쵸(アメヤ横丁)”의 준말인데 미국 진주군의 방출 물자를 다루는 가게가 모여 있었던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우에노 외에도 신바시(新橋)나 시부야(渋谷), 아타미(熱海), 하마마츠(浜松), 오사카(大阪) 그리고 고베(神戸)에도 야미이치가 생겼다.

 

야미이치는 일종의 “해방구(解放区)”였다(영화 “의리없는 전쟁(仁義なき戦い)”의 모든 장면에 나오는 곳이 야미이치임). 특히 전쟁 중 유난히 강도 높은 억압을 당하던 공산주의자와 이른바 제삼국인(第三國人), 즉 전쟁 중 일본 치정 하에 놓여 있던 대만, 조선, 중국 등지 출신자에게는 '손대는 이가 없는' 해방의 터였다.

 

조선 출신자는 재일조선연맹(현 조선총련의 전신), 대만 출신자는 대만성민회(台湾省民会)에 결집하여 총기나 도검으로 무장하였다. 1945년 11월에 GHQ(General Head Quarter, 연합군 최고사령관)가 낸 “조선인・대만성민을 최대한 해방 국민으로 처우할 것”이라는 성명은 그들의 행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삼국인이 무기를 휘두르는 것을 묵인하였고, 이 때 야쿠자가 등장한다. 물론 야쿠자는 야쿠자대로 지킬 이권이 있어서 그랬다.

 

야미이치는 제삼국인과 일본인 폭력배의 투쟁터가 되었다. 도쿄에서는 육군 상해특무기관 소속 군인이었다 훗날 우익단체 대일본일성회(大日本一誠会) 초대 회장을 맡은 만넨 토오이치(万年東一)의 구렌타이(愚連隊, 불량배 집단)가 제삼국인들과 대립했다. 또한 조선인이 3만 명이 넘게 거주하던 고베에서는 야마구치구미 산하 타오카구미(田岡組)를 꾸린 타오카 카즈오가 대립했다.

 

패전 직후 혼란 속에서 야미이치를 무대로 한 제삼국인과 야쿠자의 대립구도는, 일단 일본제국의 구 피지배국 국민과 지배국 국민의 대결구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특히 제삼국인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조선인과 야쿠자는 서로 찌르고 찔리는 싸움을 벌이면서 차차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간다. 야마구치구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뺄 수 없는 대목 중 하나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7) - 샤부(シャ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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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잘못 쓰면 독이 돠죠. '마약'으로 불리는 약물 역시 고통을 완화해주는 등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금지돼 있습니다(규제 대상이나 수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요).

 

불법 약물에는 종류마다 다른 호칭이 있기 마련이죠.

 

나라나 지역에 따라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대마는 "핫파(はっぱ)"라고 불리는데, 아마 "잎"에 유래했을 겁니다. 대마"초"가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겠죠(다른 호칭도 있어요). 참고로 대마가 얼마나 일상화돼 있나면 미국에 있는 맥도날드서 아이스티를 시키며 "레몬 곱빼기요"라고 했는데, 음료를 먹고 확인해보니 컵 안에 티백이 아닌 "대마백"이 들어 있던 사건도 있을 정도죠.

 

아편계열 마약이나 헤로인 같이 완제품이 흰 분말인 마약은 "페이(ペイ)"라고 불리기도 한답니다. 제품이 하얗기에 유통시키던 중국인들이 흰 백(白)을 뜻하는 "베이"로 불렀던 데서 생겼단 설이 있죠.

 

뭐니뭐니해도 마약의 핵심은 각성제겠죠. 각성제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는 "샤부(シャブ)"입니다. 복용 시 쾌감이 다른 약물과 비교가 안 되게 유난하고, 그만큼 부작용도 심한 악마의 약물. 한때 일본 경찰이 각성제 추방 캠페인을 벌였을 때 "각성제 그만할래요? 아니면 인간 그만할래요?"란 표어가 나올 정도였죠.

 

절대 하면 안 되는 샤부인데요,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유력한 설로 '앰플(액체약을 담는 조그마한 유리병)에다 각성제와 물을 넣고 흔들어 섞을 때 나오는 소리가 "샤부샤부"라 들렸다'는 게 있어요. 그 외에도 사람의 모든 것을 모조리 빨아먹는단 뜻의 "호네마데 샤부루(骨までしゃぶる)"라는 표현이 있는데, 각성제도 사용자의 재산, 건강, 인간관계 등등 모든 것을 싹쓸이 다 빨아먹어 버리죠. 그래서 "샤부"라고 부르게 됐단 소리도 있습니다.

 

각성제는 정맥에 투여하면 추위가 느껴진다고 하는데, 일본어로 "춥다"는 "사무이"라고 하죠. "사무이"가 "샤무이", "샹부이"로 바뀌면서 '각성제=샹부'가 됐단 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어 "shave(깎다)"에 유래했단 설도 있고 합니다. 아직 정설로 여길 수 있는 이야기는 없는 판인데 어느 설이든 각성제는 절대 쓰면 안 된단 교훈이 담겨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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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メ、絶対(안 돼, 절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