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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에 문득,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자신이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받으려고 주문해 두었던 요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피츠제럴드, <the crack-up>




사연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헬조선 백성답게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겪고 난 후, ‘이번 생 세팅 완료, 로또 당첨 같은 대박 역전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를 알아버렸다.


‘빨간머리 앤’에 보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기준을 ‘요셉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에게도 이런 바로미터가 있는데, ‘체력장에서 기를 쓰고 철봉에 매달려 있는 애들’은 불편하다. 그런 종족들이 있다. 몸 움직이는 건 질색인데, 점수를 위해서는 숨넘어 가더라도 끝까지 버티는. 일찌감치 그들의 길과는 인연이 없다고 결론을 내버렸다.


무한경쟁, 승자독식, 신자유주의...


‘주류 질서 안에서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아.’ 다짐했던 20대, ‘대안적인 삶을 개척해야 하나?’ 고민했던 30대가 끝나고, 뒤늦은 후회가 시작됐다.



 '(소위) 비주류의 생을 선택한 것이 진짜 내가 원한 것이었나?'

 '철봉에 제대로 힘껏 매달려 본 적은 있는가?'

 '느림의 미학을 예찬한 것은 게으름 때문 아니었을까?'

 '어떤 본질적인 두려움 때문에 진짜 욕망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속인 것 아닐까?'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밀려난 게 아니라 내 발로 성문을 나왔어’라고 정신승리 하며 성 밖에 살았는데, 이곳은 치열한 개싸움이 한창이다. 성안 경쟁은 비할 바 아니다.


고심 끝에 강화도 행을 결정했다. 썩 마음에 드는 추진은 아니었다. 또다시 도망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화도 섬사람이 되었다’는 이 한마디를 위해 이토록 거창한 서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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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의 내면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독자를 물들이고 싶은 점령 욕구이고, 또 하나는 외로워서. 이해받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후자보다는, 전자이다.


엄동설한에 철탑 위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분들, 팽목항에서 여전히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고 계신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비견할 수 없겠지만, 각각 짊어져야 할 무게가 더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다. 부모님보다 더 많이 배우고, 훨씬 가난하게 사는 최초의 세대인 90년대 학번 누군가에게 이 글이 새로운 도전의 아이디어가 되었으면 하며 연재를 시작한다.


2015년 10월. 강화읍 외곽의 단독주택을 월세로 계약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특별시민 친구는 3억을 대출받아서 서울 중심부의 아파트를 사버렸고(덕분에 부부 중 1인 수입은 고스란히 이자행), 경기도민 친구는 일억 전세 대출받아 같은 단지 옆 동으로 이사를 갔단다.


각자 사는 방식과 몫이 다르므로 이 모두가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처음 강화도 이사를 알렸을 때 주위 사람들 반응이 다들 그랬다. 엥? 뜬금없이 강화도? 하긴 나도 황당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전등사 소풍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니까.


강화도 이주 결심에 도움을 준 조건들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강화도에 친한 친구가 살고 있다. 이 친구는 줏대 없는 나와 달리 신념의 강자다. 대안교육 운동에 대한 청운의 꿈을 품고 강화도에 터를 잡은 친구 집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두 번째, 남편의 적극적인 동의 및 지원이 있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남편은 평생 아파트만 살았던 나와는 성향이 다르다. 남편은 어린 시절 여름이면 동네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고, 겨울이면 친구들이랑 논에서 썰매를 탔다는, 진짜 촌놈이다. 그래서 딸아이들을 도시 말고 시골에서 키우고 싶어 했었다. 또 워낙 성실하고 가정적이어서(어쩌다 보니 남편자랑) 부지런함이 생존의 필수 조건인 시골 단독주택 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 부분이 꽤 중요하다고 보는데, 부부 둘 다 시골살이에 적합한 멘탈과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적어도 둘 중 하나는(특히 남편!) 시골살이 능력치 레벨이 꽤 높아야 한다.



세 번째, 강화도의 혁신학교와 저렴한 집값이다. 최근 몇 년간 혁신학교 지역 전입이 많아졌다. 경기도 혁신학교 주변은 전, 월세 금액도 높고, 집도 구하기가 어렵다. 강화도는 김포와 일산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와는 차원이 다른 저렴한 집세를 자랑한다. 물론, 강화도에도 전세는 거의 없다. 괜찮은 월세집도 많지 않다.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강화도는 지역 주민들끼리 부동산 직거래가 많이 이뤄진단다. 예를 들면, 강화도 무슨 면으로 이사 하고 싶을 때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하여 그 동네 지역 주민을 섭외한 후, 괜찮은 집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달받아 냉큼 집주인과 계약하는 식이란다.


나의 경우는 강화도 친구를 통해 아는 부동산을 소개받았고, 비교적 빨리 마음에 드는 집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강화도에 입성하고 싶은데 전혀 연고가 없다면, 성에 좀 안 차더라도 우선 강화도로 이사를 한 후, 살면서 천천히 마음에 드는 동네와 집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 친구는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만나기 위해 1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요즘 같은 LTE시대에 이 무슨 전근대 방식인가 싶겠지만, 100세 인생에 이 정도 시간 투자는 아끼지 말자.


잠깐 옆으로 얘기가 빠졌는데, 인천의 진보교육감님 덕분에 강화에도 혁신학교 바람이 한창이다. 인근 김포와 일산, 서울 서쪽 지역 학생들도 강화도 혁신학교로 많이 전학 중이라고 한다. 신상 털리기 싫어서 더 자세히는 못쓰겠지만, 딸아이가 다니게 된 혁신학교 교장 선생님은 훌륭한 분으로 유명하다(그래서 이 동네로 이사 왔다).


강화도 혁신학교가 특히 마음에 든 것은 방과 후 교육비를 비롯하여 온갖 교육활동비가 무료라는 점이다. 인구수가 적은 강화군민을 위한 혜택이다.


혹자는 이런 걱정 할 수도 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학군 좋은 대치동 목동으로 진입은 못 할망정, 시골 촌구석 웬 말이냐? 서로서로 열공 격려하는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부모의 이상주의 아니냐? 그런 의견도 존중한다. 초반에 언급했잖아. 이게 최선은 아닌 것 같다고.


그런데 말이다. 대학 입시 제도가 엄청 바뀐 거 다 알지? 우리나라 대입 방식이 3천 가지가 넘는데. 예전처럼 ‘내신점수 + 수능점수 = 대학입학’이게 아니라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자식은 투자하면 무조건 스카이 입성 가능한 수재는 아닌 듯하여, 사교육비 물 쓰듯 펑펑 쓰며 애 쥐어짜고 흔들 계획은 없다. 돈 덜 쓰고 애 안 잡아도 그럭저럭 자신이 원하는 길 찾을 수 있다면, 비용 대비 효과를 따졌을 때 꼭 8학군, 특목고, 자사고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수시 선발 비율은, in서울 대학 경우 거의 70프로에 육박한다. 즉, 이제는 수능이 아니라 내신으로 대학가는 시대란 말이다. (수시니 정시니,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이와 관련하여 팟캐스트 입시왕 추천한다. 지대넓얕의 깡선생이 나오는 좌파를 위한 고품격 대입 컨설팅 방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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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많이 보내는 특목고 자사고의 1년 학비

(등록금과 급식비·방과후학교활동비·기숙사비 등 포함)

출처 - <오마이뉴스>


민사고 2,600만 원, 하나고 1,400만 원, 성산고 1,100만 원, 대원외고 980 만 원 정도다. 특목고, 자사고가 대개 500만 원 수준의 학비가 든다(일반고는 42만 원씩 분기별로 납부하여 200만 원). 여기에 교재비, 사교육비, 용돈 등은 별도로 지출해야 하므로, 합산하면 천문학적인 액수가 된다.



네 번째는 직장과의 거리다. 기억나는 양반이 있을랑가 모르겠는데, 나는 경기도의 교육공무직원(얼마 전까지 학교 회계직)이다. 교육공무직이 뭔지 잘 모르겠다면, 2년 전쯤에 이와 관련하여 쓴 글이 있으니 심심하면 참고해 보시길. (관련기사 : 학교비정규직 일년살이(링크))


물론 그때와 지금은 교육공무직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예전만큼 많이 안 뽑는다. 내가 입사하던 때가 꽤 호시절이었나 보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공무직을 비롯한 공공기관 일반근로자는 나름 노려볼 만 하다. 솔직히 말하면, 공공기관 일반근로자는 보수는 적고 대접 못 받는다. 가오가 중요하다면 하지 마라. 그렇지만, 요즘 같은 40대 명퇴 세상에, (법이 바뀌지 않는 한) 60살 정년 보장되고, (교육공무직의 경우) 노조가 잘 싸워줘서 각종 수당이 병아리 눈물만큼씩 오르고, 무엇보다 칼퇴근 가능하다. 경력단절 여성들이라면 해볼만 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나라일터(링크)홈페이지 참조하기 바란다. 공공기관에서 공무원만 뽑는 게 아니다.


아무튼 나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인 덕분에 강화도 가까운 지역으로 발령 신청을 낼 수 있었다. 김포 신도시 도로 사정도 좋아져서 직장이 서울인 남편 출퇴근 시간도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이다. 강화도 주거의 가장 불편한 점이다. 월세살이지만 자동차는 필수다. 강화읍에서 신촌까지 한 번에 가는 광역버스가 자주 있긴 하다. 서울까지 대중교통 이동이 최악은 아니다. 그래도 서울 출퇴근을 위해서 아무래 자동차는 있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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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권을 옮긴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말이 쉬워 노마디즘이지, 당장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나의 경우에는 간절히 기도했더니 우주의 기운이 도와주더라.


다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차마 시골은 우울해서 못 살겠지? 나는 서울에서 초, 중, 고, 대학을 다닌 순도 200% 서울 여자다(심지어 강남 8학군 출신). 결혼 후 경기도민이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씩 광화문 교보에서 책 구경하고, 대학로 벙커에서 무료강의도 듣고, 북촌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지 않으면 화병 걸린다. 이런 내가 강화도에서 적응한다면, 어지간한 도시 사람들도 강화도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당분간은 던킨 도넛과 투썸플레이스가 있는 강화읍에 거주하며, 강화도 정착 가능 여부를 실험해 볼 요량이다. 겪어 보면 본격적으로 시골에 살지, 다 때려치우고 도시로 유턴할지 알 수 있겠지.


읍민이 된 것은 강화도 10년 차 친구의 충고 때문이다. 어느 정도 도시물 빠질 때까지 읍내 살며 시골 살이 가능 여부를 가늠하면 이주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앞으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꿀팁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애써 보겠다. 각자도생의 시대지만, 함께 잘 살 궁리를 해 보자. 미리 진 다 빼버리면, 시스템 전복이고 나발이고 힘들 테니까. 내가 먼저 강화도에 터 잡고 있을 테니, 안 잡아 먹을께. 드루와~


꼭 강화가 아니어도 좋다. 방향을 살짝만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으니까, 각자의 위치에서 5도씩만 시선을 틀어보자.


병신년 새해, 다들 힘내자.





셀러킴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