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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살던 인간의 행동원리를 살펴볼 때,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평가한다면 시간과 비용의 낭비에 가깝다. 단죄주의를 버리고 사실을 직시하며, 당시 왜 그렇게 행동했고, 그 행동원리는 무엇인지 밝혀냄으로써, 내가 혹시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는 시각이나 가치관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역사를 보는 보람이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야쿠자와 함께 2차대전 후 해방된 조선인이나 대만성민(台湾省民, 대만인), 일본 경찰이 나온다. 해방 민족의 자존심과 정의를 되찾았다고 평할 수도 있고 동포를 팔았다고 평할 수도 있는 이들이다. 잠시만 민족이나 계급의 옷을 벗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생각해보자.

 

그후, 민족이나 국적을 뒷전에 미룰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행동 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1. 암시장, 제삼국인(第三國人)과 야쿠자의 전쟁판~신바시 사건~

 

대미전쟁에 패배한 일본의 모든 것-국가 체제부터 국민 생활 구석구석까지-은 "리셋”되었다. GHQ(General Head Quarter,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깃발을 든 미군에게 통치를 받기는 했으나 미군은 거시적 관점에서 일본이라는 하나의 시스템을 개편하는데 급급하였고, 사람들의 생활 현장에는 “권력의 공백 지대”가 생겨버렸다. 그 현상을 상징하는 것이 암시장이다.

 

도쿄 우에노(上野), 신바시(新橋), 시부야(渋谷)를 비롯 오사카(大阪), 코베(神戸)에 암시장이 생겼다. 조선인, 대만성민 등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이른바 제삼국인(제삼국인에 대하여 지난번 기사(링크) 참조)이 해방국민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터이자 먹고 살기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기회의 땅이었다. 생활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인에게도 일상을 겨우 유지하게 해주는 삶의 터전이었다.

 

암시장에서 제삼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제삼국인과 야쿠자가 맞선 최대규모의 싸움이 바로 '신바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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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에 암시장에서 노점을 운영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관할 경찰서로부터 영업 허가를 받는 동시에 해당 지역을 나와바리로 하며 자리를 배정하는 테키야(テキ屋, 노점상 계열 야쿠자)에게 돈을 주고 감찰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말하자면 경찰과 야쿠자가 공동으로 암시장을 관리・운영하는 셈이다. 물론 야쿠자가 대놓고 감찰료를 받는 것을 뒷받침하는 법은 없었지만 테키야 야쿠자에 의한 “시키리(仕切り, 사물을 조정함)”는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신바시의 암시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암시장에서 노점을 열려면 관할서인 아타고경찰서(愛宕警察署)가 교부한 허가장과 신바시를 나와바리로 하는 테키야 조직 칸토마츠다구미(関東松田組)가 발행한 감찰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만성민을 중심으로 한 제삼국인은 이 관행에 불복한다.

 

같은 해 7월 19일, 총기, 칼, 곤봉 등으로 무장한 대만성민 수백 명이 트럭을 타고 몰려와 신바시에 있는 마츠다구미 사무소를 습격했다. 대만성민의 움직임을 탐지한 마츠다구미는 권총과 일본도로 무장, 사무소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해서 영격 체제를 마련했다. 도쿄 한복판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은 마츠다구미의 영격을 묵인(사실상 지원)했고, 미군 헌병대(MP)가 개입하고 나서야 사태가 겨우 종식되었다. 사망자 1명, 중경상자 30여 명에 이르렀다.

 

사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바시에서 퇴각한 대만성민 트럭부대는 중화민국변사처(中華民国弁事処, 대만 영사관에 상응)에 들렀다 시부야(渋谷)에 있는 화상본부(華商本部, 중화민국 상인(화교)들로 구성된 상인단체)로 향한 것이다. 마츠다구미 사무소를 함락치 못했던 판세를 만회하려고 작전 지시를 받으러 갔던지도 모르겠다.

 

대만성민 트럭부대가 진로를 시부야로 잡자 시부야 경찰서는 바짝 긴장한다. 당시 “구렌타이(愚連隊, 불량배 집단)의 신”이라는 이명을 얻었던 만넨 토오이치(万年東一)에게 가서 경비를 요청하였다. 만넨 토오이치가 이끄는 구렌타이 집단은 시부야 경찰서 앞에서 대만성민 부대를 영격한다. 경찰도 가세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베고 베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관 1명과 대만성민 4명이 사망, 17명의 부상자가 나고 나서야 사태는 종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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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무력함과 야쿠자가 제삼국인에 의한 공세에 대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다. 일견 제삼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대립구도를 구현하는 사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일견 구 일본 통치지역 출신자(제삼국인)와 일본인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보인 사건에 있어서 “기묘한 연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신바시 사건에서 대만성민의 공격을 영격한 마츠다구미에는 대만성민이 참모로 있었고, 시부야 사건에서 만넨 토오이치가 이끌던 불량배 집단에는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민족”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우 큰 요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각 개인의 속성은 그리 단선적이고 단순하지 않다. 계급, 개인적 인연, 내가 몸을 담는 직업 등 생활자로서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2. 제삼국인 vs 야마구치구미~산노미야 사건~

 

야마구치구미의 나와바리인 코베에서도 생존을 건 싸움이 벌어졌다. 1946년 1월에는 나가타구(長田区) 소재 롯켄미치(六間道)를 사이에 두고 재일조선인연맹의 무장 부대와 야마구치구미가 충돌,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났다. 다음 달에는 코베 산노미야(三ノ宮)역 동쪽에 있는 시유지 퇴거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대만성민과 야마구치구미가 격돌했다. 이를 산노미야 사건이라고 한다.

 

2차대전 직후 대만성민들은 산노미야역 인접 땅에 대거 살기 시작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 점거였지만, 코베시 당국은 묵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이 나서 대만성민이 살던 집들이 소실되거나 손상되었다. 코베시는 이 기회에 전철역 인접 구역을 재개발하려고 했는지 대만성민에게 퇴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만성민들은 불에 탄 집을 증축, 재건하겠다고 하며 코베시와 분쟁을 벌였다. 긴장한 코베시 당국은 대만성민 퇴거를 야마구치구미에 맡겨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야마구치구미는 흩어져 있던 조직원을 비상소집, 권총, 일본도, 비수,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불법 점거지로 돌입했다. 증축・재건축되는 건물을 파괴하고 대만성민을 쫓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이 대만성민 점거지까지 갈 때 코베시의 마크가 붙은 트럭 2대에 나눠탔고, 코베시 당국은 경찰과 모임을 가지면서 방관했다는 점이다. 전후의 혼란 그리고 미국이 가져온 민주화 정책으로 인하여 유효한 유형력-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시스템이 재야의 폭력을 이용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코베에서도 제삼국인과 야쿠자의 기묘한 연대가 연출됐다. 제삼국인과 야쿠자가 서로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일부 제삼국인들이 야마구치구미를 비롯한 야쿠자 조직으로부터 사카즈키를 받은 것이다. 제삼국인이 일본 야쿠자 조직에 들어간 셈인데, 이러한 현상을 보면 제삼국인과 야쿠자가 마구잡이로 싸웠던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간적 대화 아니면 공감대를 형성했(거나 그럴 여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만성민이 점거하던 시유지 가까이에는 대만성민회 소속 청년부대의 거점이 있었고 한때 야마구치구미와 대치하였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가 이어졌으나 끝내 간부끼리 교섭하여 화해하였다)

 

또 제삼국인과 야쿠자가 기묘한 연대를 보인 사례에 설탕트럭 집단강탈사건이 있다. 1946년 4월에 코베시 기온쵸(祇園町)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대만성민으로 구성된 무장집단이 설탕 운반 트럭을 습격하여 설탕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집단을 이끌던 이가 일본인이었다.

 

일본국적이 아닌 제삼국인에게는 식량관리제도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삼국인 집단과 행동을 같이하면 강탈하거나 훔친 식량을 암시장에 팔아치우기 쉬웠던 것이다. 그 일본인은 코베 빈민가에세 구렌타이(불량배 집단)의 두목으로 올라간 스가야 마사오(菅谷政雄). 훗날의 야마구치구미 와카가시라(若頭, 넘버2) 보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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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야 마사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전설의 야쿠자> 中

 

 

 

3. 경찰과 야쿠자의 연대~코베 경찰서습격계획 사건~

 

기묘한 연대는 야쿠자와 경찰 사이에도 보였다. 코베 지역의 모든 경찰서습격계획을 계기로 경찰이 보인 태도와 야쿠자의 행태는 오늘날 상상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1947년 대만성민은 효고(兵庫) 경찰서, 수이죠(水上) 경찰서를 잇따라 습격했고, 코베 시내에 있는 모든 경찰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운다. 경찰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야마구치구미에 경찰서 방위를 의뢰한다. 이에 야마구치구미는 밤낮을 안 가리고 조직 본부 가까이에 있는 효고 경찰서에 조직원을 배치, 같은 경찰서가 관할하는 신카이치(新開地, 산노미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코베 시내 번화가)에 자경단을 결성시켜 방위 체제를 구축한다. 방위 대책 본부는 카게츠(花月)극장에 마련했다.

 

야마구치구미가 경찰과 상의해서 세운 영격 계획은 이렇다. 대만성민 집단이 경찰서를 습격하면 경찰은 중요 서류를 가지고 즉시 피난하고, 야마구치구미는 영격한다. 그를 위해 중유를 채운 드럼통과 수류탄을 건물 옥상에 비치하고 1층에는 “발도대(抜刀隊, 칼을 빼는 부대)”가 대기한다.

 

재미있다고 할까 경이롭다고 할까, 이때 경찰이 보인 행태가 오늘날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경찰은 대만성민의 습격을 대비하여 경찰서에서 대기하던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에게 술을 대접했고, 습격해온 대만성민을 살상했을 경우 그 죄를 묻지 않고, 법에 따라 구속된다 해도 법원 뒷문으로 풀어주겠다고 확약하였다. 장려금과 위로금까지 지급했다니 요새 경찰이 야쿠자를 억압하는 모습이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경찰과 야마구치구미가 연대를 맺었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대만성민 부대는 경찰서 습격을 실행하지 않았다. 훗날 효고현(兵庫県) 경찰은 야마구치구미 괴멸 작전에 나서는데 패전 직후 “야쿠자와의 제휴관계”는 쓰고 언짢은 역사로 남아 있다.

 

 

4. 마텐의 검은 셔츠

 

같은 무렵 오사카. 약탈을 일삼던 한 남자가 있었다.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郎)라는 일본명을 쓰던 그의 본명은 양원석. 조선인으로, 훗날 야마구치구미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는 데 맹활약을 해서 "살인부대"란 이명을 누리게 된 야나가와구미(柳川組)를 만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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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마(天満) 지구를 본거지로 했기에 "마텐의 검은 셔츠(마텐은 텐마를 뒤집어 읽은 것)"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원래 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였다. 싸울 때면 벽돌로 상대방을 마구 때리는 흉포함을 갖추고 있었고, 남과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혼자 행동하다 민족주의 무장 집단과 행동을 같이 한다.

 

야나가와 지로가 약탈을 거듭하던 배경에는 피지배 민족의 원망을 푼다거나 불평등한 사회 자체에 대한 의분심을 행동에 옮긴다는 사상적 동기는 없었다. 본인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하숙집 아줌마가 먹을 게 없어서 배고파 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고 불쌍해서 어떻게든 먹을 거리를 확보해야 돼서 그랬다고 한다. 암시장 노점을 운영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이들과의 불공평은 약탈이라는 (적어도 형식상은) 범죄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정에 불과하였다.

 

론리울프였던 야나가와 지로와 행동을 같이 하던 조선인 청년이 있었다. 강동화(康東華), 일명 타니가와 코타로(谷川康太郎)로 나중에 야나가와 지로와 함께 야마구치구미의 "살인부대", 야나가와구미를 이끌어가는 이다.

 

젊은 야나가와-타니가와의 투톱은 암시장에서 입수한 권총을 들고 팔에는 "보안대(保安隊)"라는 글자가 새겨진 완장을 두른 채 암시장에서 거래될 물자를 실어나르는 트럭을 습격하곤 하였다. 트럭으로 물자를 운반할 정도니 습격당하는 측도 비합법 행위의 프로임에 틀림없다. 야나가와와 타니가와는 암시장을 무대로 반드시 합법적이지 않은 형태로 돈을 버는 상인 네트워크를 교란하며 그 이익을 빼앗는 게릴라 부대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표적은 암시장 유통 물자 뿐이 아니었다. 패전 직후까지만 해도 구 일본군이 숨어둔, 이른바 '은닉 물자'가 꽤 남아 있었다(연료, 가죽, 섬유 등 군수 물자를 비롯해서 캘리코(흰 무명), 군복, 물엿, 휘발유, 심지어는 다이아몬드까지 다종다양한 물자가 오갔었다). 두 사람은 오사카 미쿠니(三国)에 있는 면포공장과 같은 옛 군수공장을 자칭 "적발"해서 "압수"하였다. 그렇게 따낸 물건들은 재일교포 공동체에서 나눠주기도 하고 암시장으로 흘려 현금화한 뒤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본어 관용구 “盗人にも三分の理(누슷또니모 산부노 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도둑놈에게도 조금이나마 도둑질을 정당화시킬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야나가와와 타니가와의 위와 같은 행태는 어떻게 보면 의적(義賊, 부당하게 모은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의로운 도적)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의적의 윤리"나 "분배의 정의" 같은 심성은 당시 제삼국인으로 구성된 약탈 집단들에 널리 보여진 마인드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해방국민으로서 전리품을 요구하고 있을 뿐, 지탄을 받을 정도 나쁜 짓은 아니다. 이게 바로 당시 그들의 실감이 아니었나 싶다.

 

 

5. 야쿠자와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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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연맹의 자치대

 

야쿠자와 제삼국인, 특히 조선인은 위에 소개한 사례 이상으로 야쿠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거나 아니면 조선인이 야쿠자 그 자체였던 케이스가 많다.

 

2차대전 후 테키야(的屋, 노점상) 계열 야쿠자의 두목이자 시의원도 역임한 요시하라 타케죠(吉原竹三)가 하쿠류샤(白竜社, 백룡사)라는 조일 혼합 아웃로 집단을 조직했다. 그때 부단장을 맡은 인사는 재일조선연맹(조연, 현재 조선총련의 전신으로 여겨짐) 지부장 자리에 있던 한현신(韓玄申)이었다. 시가현(滋賀県) 나가하마시(長浜市)를 나와바리로 한 이 조직은 말그대로 조일 혼합 준 야쿠자 조직이었다.

 

야쿠자와 조선인의 이러한 동맹관계는 해방 전에도 종종 보이던 현상이다.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무너져버린 요코하마형무소 부지에 조선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마땅한 직업을 못 가진 그들에게 하역 노동을 시킨 것은 츠루오카구미(鶴岡組)라는 야쿠자 조직에 속하는 조선인 야쿠자였다. 노동자를 모아 관리하는 일은 야쿠자의 전통적 시노기(돈벌이거리)이다. 국적은 조선이지만 그를 빼고는 완전히 야쿠자로 행동하고 있었다.

 

2차대전 중에는 노무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를 관리하던 자들 중에 적지 않게 조선인 야쿠자나 야쿠자 조직에 드나느는 이가 있었고, 규모가 큰 공장 등에서는 소아이카이(相愛会), 쿄와카이(協和会) 등 내선일체를 목표로 하는 단체가 경찰이나 공장 운영자와 협력해서 조선인 노동자를 통괄했다.

 

오사카 키시와다(岸和田)에 있는 방적공장(紡績工場, 솜으로 실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던 정이순 할머니에 따르면 소아이카이 사무소가 조선인 노동장 통괄자의 아지트였고 "건달들이 모여 있었"단다. 그 건달들이 일본인 야쿠자와 무연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야쿠자의 출신에 관한 "3:3:3 원칙"은 '야쿠자에는 빈곤층 출신, 제삼국인(사실상 한국∙북한 국적자), 피차별 부라쿠 출신자가 각각 3분의 1씩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일본 사회의 저변을 이루며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던 이들이다. 이번에는 그 중 제삼국인과 야쿠자의 관계에 조명을 맞췄다.

 

다음 회에서는 조선인과 야쿠자의 기묘한 연대에 관한 이야기 조금 더, 그리고 드디어 야마구치구미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는 3대 째의 이야기를 하겠다.

 

 

 

【야쿠자 용어의 기초지식(8) ~ 나와바리(縄張り)】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세력범위라든가 그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등을 뜻하는 말로 “나와바리”가 있습니다. 이 말의 기원은 글자 그대로 “縄を張る(나와오 하루, 줄을 치다)”에 있습니다. 즉 옛날에 집을 짓는 범위나 땅의 경계선을 정하기 위해 줄을 둘러친 것에 유래한답니다.

 

15세기 중반 전국시대 이후에는 성곽을 구성하는 건물이나 돌담 등의 배치를 대지 위에 그리는 목적으로 줄을 쳤고 이것을 '나와바리'라고 불렀다네요. 그후 지금과 같이 “세력범위”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에도시대에 접어들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설명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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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2017년 기준) 야쿠자의 '나와바리'

 

그런데 야쿠자 용어로서의 나와바리와 관련해서는 또 하나 재미 있는 설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나와바리 의식은 관동지역 야쿠자가 강했는데 이것은 관동지역에 도박꾼 계통의 야쿠자가 많았다는 요인이 있다고 하네요. 즉 야외에 도박판을 설치할 때에 도박판을 둘러싸는 뽕나무들을 궁이 휘어지듯이 줄로 세게 매어둡니다. 그리고 포리나 노름판 털기가 공격해 오면 매어둔 줄을 칼로 끊는 거지요. 그러면 줄로 묶어져 있던 뽕나무가 세차게 튀며 포리나 노름판 털기를 격퇴해주는 겁니다. 진위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재미있는 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