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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딴지 편집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임지현 기자(임권산)였다. 지난 6월 말, 필리핀의 코로나 국면을 직접 겪으며 그 경험담을 독자투고에 썼었는데, 당시엔 쳐다도 안 보더니 이 인간이 갑자기 기사로 내자며 협박(?)을 했다. 결국, 이렇게 기사로 내게 되었다. 지난 3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필리핀에서 직접 겪은 썰을 생생하게 푸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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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야기에 들어가지 전에 현재 필리핀 상황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필리핀은 현재 40년 만에 최악의 경제침체 위기를 맞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대규모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내년 경기 반등을 노리고 있다. 거침없이 빠져나가는 외국인 직접 투자(FDI)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으며 미국의 압박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그럼 이제, 본 이야기를 시작한다.

 

 

필리핀의 코로나 국면, 희망이 없다

 

필리핀에서 진행되고 있는 락다운(격리 조치) 등급.

 

1단계: ECQ(Enhanced Community Quarantine) 강화된 지역사회 격리조치

2단계: MECQ(Modified Enhanced Community Quarantine) 수정된(완화된) ECQ

3단계: GCQ(General Community Quarantine) 일반적 사회격리로 락다운 해제 직전 단계

4단계: MGCQ(Modified General Community Quarantine) 수정된(완화된) GCQ

5단계: New Normal 새로운 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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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2020년 6월 5일 COVID19 팬데믹 사태에 위와 같이 5단계로 락다운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부(Cebu, Philippines)는 지난 3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ECQ에 머물러 있다가 6월에 들어서면서 3단계 조치인 GCQ로 완화되었다. 락다운 단계가 복잡해 보이지만 복잡할 것도 없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ECQ: 아무것도 못한다. 매우 강력한 지역 격리조치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잡혀간다.

 

-GCQ: 아무것도 못한다. 조금 강력한 지역 격리조치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잡혀 갈 수 있다.

 

세부에 ECQ가 발령되면서 각 가구당 1장씩의 “통행증”이 발급됐다. 즉, 가족 중 통행증 가진 사람 1명만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외부에서는 식료품이나 의료품을 사는 것만 가능하다. 약국과 슈퍼마켓 일부 재래시장 말고는 연 곳이 없으니 나가봐야 크게 할 것도 없다.

 

ECQ 기간 동안에는 학교 및 종교행사는 모두 중지되고, 밤에는 ‘통행금지’가 시행된다. ‘통행금지’는 밤 9시부터라고 정해져 있지만 해지고 나서 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필리핀의 대도시들은 강력한 격리조치인 ECQ 상태로 거의 90일을 보냈다. 말이 좋아 석 달이지, 격리조치가 두 달을 넘어가면 사람은 거의 폐인이 된다.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5월 19일에 얼마 후 있을 GCQ 변경을 앞두고 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연설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이렇다.

 

“내년 1월 백신이 나올 때까지 여러분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사신이 찾아오면 ‘내년 1월까지 백신을 기다려야 하니 물러나세요.’라고 말하세요.”

 

5월 19일,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표문 / 출처-<필리핀 TV>

 

이 연설은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그냥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한 거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고위 정부 관계자가 “국민 여러분 별 대책이 없으니 재주껏 살아남으세요.” 이런 발표를 했다고 생각해 보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나는 두테르테 대통령과 필리핀 정부가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고 생각한다. 지난 4월에는 우리나라 “재난 지원금” 같은 형태의 돈을 각 가정에 나눠주었고, 가난한 지역에는 쌀을 비롯한 식료품을 배급했다. 배급 과정에서 이걸 빼먹는 공무원들이 있어 문제가 되긴 했지만, 하여튼 정부와 지자체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정책과 부패는 다른 문제이다.

 

5월이 지나도 세계적으로 COVID-19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필리핀 정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 이상 이런 형태로 락다운을 끌고 가기에는 정부의 재정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격리조치로 사람들을 막아 놓는다고 바이러스가 잡히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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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6월 1일부터 마닐라, 세부를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격리조치를 GCQ로 하향 조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격리조치가 완화되기 전날인 5월 31일, 당시로는 가장 많은 확진자인 862명이 나왔다. 그래도 GCQ로의 지역 격리 완화 조치는 변동 없이 실행됐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필리핀의 확진자 수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월 12일부터 대도시 일부 지역은 격리 규정을 한 단계 더 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는 세부도 포함된다. 

 

완화된 락다운인 GCQ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행동 방침은 이렇다.

 

-외출 : 허용된 산업의 출퇴근 필수 재화 및 서비스 이용. 여가 목적의 외출은 허용되지 않음

 

-외출금지: 21세 미만 60세 이상 임산부 및 기저질환자

 

-허용 산업: 농어업, 식품, 테이크아웃 및 배달, 의료, 미용실, 대중교통 운영

 

-허용 불가: 여행사, 마사지, 개인서비스, 예약업무, 식당은 배달만 가능

 

-자동차는 홀짝제로 운행이 계속되며 일부 구간 국내선 비행기 운행

 

-트라이시클(3륜 오토바이) 운행 허용, 지프니(한국으로 치면 버스) 운행 불가 

 

얼핏 보면 도대체 ECQ와 GCQ가 뭐가 다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맞다 구분 안 된다. 현지인 공무원들도 “뭐가 바뀌었냐?” 물어보면 “모르겠다.”라고 한다. 결국, GCQ라도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필리핀 정부를 이해한다. 재정이 부족하고 국가 역량이 떨어지는 필리핀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세부에서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지율은 90%에 가까웠다. 대안이 없어 차악을 선택한 것 일수도 있지만, 어마어마한 지지율로 당선된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나마 대통령 후보들 중 제일 나았다는 뜻이다. 그 지지율은 아직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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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를 상징하는 심볼 스티커. 다양한 디자인의 심볼 스티커가 있다.

 

현지인들은 두테르테의 표식인 주먹 모양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대통령이 그려진 스티커를 자랑스럽게 차에 붙이고 다닌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거칠지만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지도자인 것이다. 한국에 알려진 두테르테 대통령의 폭력적인 이미지와 필리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는 많이 다르다. 내가 세부(Cebu)에 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을 싫어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은 없다.

 

한국의 “확진자 추적 방법” 관련해서 외국 언론들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이야기하며,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것을 많이 봤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저것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들 맘대로 해석한다.”며 기분이 많이 나빴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프랑스 변호사의 칼럼이 나왔을 때는 거의 피가 거꾸로 쏟을 만큼 화가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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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그런데 “한국 정부의 인권침해”라는 단어를 “두테르테 대통령”이라는 단어로 바꿔 놓고 보면 필리핀 사람들이 느끼는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정부의 인권침해”라는 단어를 들을 때의 느낌과 필리핀 사람들이 “폭력적인 두테르테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때의 느낌이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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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내년까지 죽지 말고 버텨라”라고 하는 것이 얼핏 들으면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지만 현직 필리핀 대통령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을 것이다. 표현이 직설적이라고 해서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콤한 거짓말보다는 아프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훨씬 현명할 수 있다.

 

저 담화는 평소 그의 생각을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전달을 택한 것이다. 자국민이 하루에 몇 백 명씩 죽어나가는데 마음 편할 대통령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필리핀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걸 아는 본인은 얼마나 슬프겠는가. “살아서 만나자”라고 하는 저 말이 쉽게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 필리핀은 미래가 없다. 이 말은 내게도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막막하다.

 

 

세부의 락다운

 

지금까지는 전체적인 필리핀의 이야기였다. 지금부터는 세부를 중심으로 3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약 90일간의 락다운 기간이 필리핀을 어떻게 바꿨는지, 교민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세부는 크게 세부 시티, 라푸라푸 시티, 만다웨 시티 이렇게 세 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세부 섬은 길이가 225km 이상 되는 큰 섬이라 이 세 도시 외에도 많은 지역이 있다. 하지만 세부 섬에서 실질적 경제를 움직이고 관광을 이끄는 핵심 지역은 이 세 도시(C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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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필인러브>

 

세부의 중심 도시들을 묶어 “메트로 세부”라 부르는데 '세부 시티', '만다웨 시티', '라푸라푸 시티' 는 메트로 세부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민들은 대부분 이 세 도시에 모여 산다. 참고로 메트로 세부는 세부섬 중부지역의 7개의 시티와 6개의 지방자치 단체(Mnicipalities)로 이루어져 있다. 

 

세부 시티는 어학연수생이나 사업을 하는 교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평범한 대도시이다. 무역과 금융, 유통, 교육의 중심이고 많은 기업들과 유명한 학교, 큰 쇼핑몰 등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필리핀 중부지방의 물류를 책임지는 커다란 항구도 있다. 만다웨 시티는 세부 시티에 포함해서 생각하면 된다.

 

라푸라푸 시티는 좀 특이한 지역이다. ‘막탄섬’이라는 세부 본섬에 붙어있는 작은 섬에 형성된 도시이다. ‘영종도’나 부산의 ‘영도’처럼 막탄섬은 세부 본섬에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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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교는 공사중.

 

라푸라푸 시티에는 ‘막탄 국제공항’이 있고 고급 리조트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곳은 따뜻한 날씨 탓에 아일랜드 호핑이나 스쿠버 다이빙 같은 해양 레저를 즐기는 관광객으로 1년 내내 붐비는 곳이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관광지 ‘세부(Cebu)'는 막탄 섬의 “라푸라푸 시티”를 지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막탄 섬에 산다고 보면 된다. 

 

COVID-19의 확진자가 생기기 시작하던 2월 초부터 세부에는 관광객이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대형 여행사를 비롯한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중심의 자유여행사들이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고 3월이 되면서 모두 문을 닫았다.

 

“늦어도 4월 말이면 다시 출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 기회에 좀 쉬시죠.” 

 

2월 말 까지만 해도 각 관광 관련 사업체의 사장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이때만 해도 세부의 한인들은 늦어도 5월이면 정상화가 될 줄 알았다.

 

3월 중순이 되면서 갑자기 필리핀의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급기야 필리핀 정부는 강력한 지역 격리 조치인 ECQ(Enhanced Community Quarantine)를 발령했다. 모든 국민들을 집안에 가둬버린 것이다.

 

갑자기 내려진 강력한 조치 때문에 세부 시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교민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더 큰 문제였다. 관공서가 문을 닫았으니 비자부터 문제가 생겼고, 교통이 통제되고 쇼핑몰이 문을 닫았으니 생활이 어려워졌다. 항공편이 끊기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도 힘들어졌다. 발 빠르게 귀국을 준비한 사람들은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었지만, 설마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발이 제대로 묶인 것이다.

 

4월이 되면서 세부의 한인회에서 귀국할 사람들의 명단을 접수해 특별기로 귀국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현지인과 결혼해 가족이 남아있거나, 투자한 돈이 많아서 현금화가 어려운 사람들, 방학이 가까웠던 학생들 그리고 한두 달만 버티면 정상화가 되어 특수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빠져있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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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단된 상가

 

 

유령도시 세부, 쓰러지는 사람들

 

최근 들어 세부에는 소규모의 개인투자자가 많아졌다. ‘패키지여행’ 시장은 내리막을 걷고 있었지만, ‘자유여행’ 시장은 계속해서 성장세를 보여서 어쨌든, 돈을 쓰기 위해 오는 한국인이 많았다. 돈의 흐름이 커졌으니 돈 냄새를 맡은 중개인들이 한국의 소액투자자들을 쉽게 끌어들였다. 

 

한국보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좋다는 계산 때문이어서 인지 어설프게 프랜차이즈에 투자하려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세부로 돈을 싸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이런 투자자는 많았지만 요 몇 년 동안 급격히 늘어났다. 

 

덕분에 세부의 노른자위 땅에는 한국인이 투자한 커피숍, 마사지샵, 미용실, 식당, 렌터카 사업 등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하지만 투자를 한다고 누구나 돈을 벌 수는 없는 법이다. 돈이 있는 곳에는 사기꾼이 따르기 마련이고 필리핀은 사기꾼들의 천국이다. 투자자가 많아진 만큼 사기꾼에게 돈을 날리는 사람도 많아졌다. 

 

또한 돈을 벌고서도 관리를 못해서 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필리핀은 카지노와 유흥 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한국에서는 멀~쩡했던 사람도 필리핀에 오면 이상해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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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라푸 시티

 

근래 라푸라푸 시티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투자를 많이 했다. 작년 추세를 보면, 중국인들의 투자가 한국인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3년 전쯤, 라푸라푸 시티의 "막탄 뉴타운"에 입주가 시작되면서 중국인들의 투자가 본격적이 됐다. '막탄 뉴타운'은 주상 복합 빌딩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비즈니스 타운이다. 

 

고급스러운 뉴타운 지역에 중국사람들이 때로 몰려들었고, 주변 상권은 중국인들이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새로운 중국인 가게들은 오픈도 하기도 전에  모두 셔터를 내렸다. 아니 셔터를 올려 보지도 못하고 모두 잠정 휴업에 들어갔다.

 

중국인이고, 한국인이고, 현지인이고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공사 중이던 수많은 상가와 리조트들이 골격만 남긴 체 앙상한 몸으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세부의 관광지역은 거의 유령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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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 500개가 넘는 쉐라톤 리조트도 공사가 중단됐다.

 

3월부터 석 달간 지속되던 강력한 격리조치가  6월이 되면서 ECQ에서 GCQ로 하향 조정됐다. 지역 격리 조치의 완화는 환영받을 일이지만 걱정되는 것도 많다. 

 

ECQ(강력한 지역 격리 조치) 상태에서는 큰 쇼핑몰이나 상가에 입점해 있던 가게들과 맘씨 좋은 건물주들은 월세를 깎아줬었다. 그런데 GCQ(완화된 지역 격리조치)로 변경이 되면 그런 혜택들은 모두 사라진다. 어설픈 완화 조치가 세입자들을 파산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GCQ 상태라고 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교통은 계속 통제되고 차량은 홀짝으로 운행해야 한다. 각 지자체 별로 격리 기준이 달라서 시티(City) 간 이동도 원활하지 않다. 이러니 GCQ로의 완화 조치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풀려면 다 풀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으니 정부도 답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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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또다른 적, 불신 문화

 

진짜 걱정되는 것은 지금도 필리핀에는 확진자가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의 COVID-19 검사능력은 하루 3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했지만, 이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데이터를 잘 못 계산하거나, 검체 오염으로 인한 오류의 문제가 계속해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리핀은 의료진의 확진 비율이 높아 앞으로의 검역과 치료에 더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6월 초에는 한인 커뮤니티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 세부에서 제일 시설이 좋고 큰 병원인 '청하 병원(중국계 병원)'에 '맹장'이 걸린 환자가 들어왔는데, 의사가 아무도 없어 종합병원 로비에서 대기하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이 돌면 현지에 사는 한인들은 거의 사실로 믿는다. 이것보다 더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확진자 수는 늘어가는데 격리조치는 완화됐다. 이 말은 진짜 코로나 바이러스를 조심해야 할 시기가 됐다는 뜻이다. 격리조치가 완화되며, 모두가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구도 못 믿는 시기가 된 것이다.

 

필리핀에 살다 보면 불신(不信)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라는 말 보다 ‘불신에 젖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정부고 공무원이고 옆집 사람이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공무원의 부정부패나 기업인의 비리는 뉴스거리도 아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라 신경 쓰지도 않는다. 비리를 저질러 시장 직에서 쫓겨난 사람의 부인이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는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필리핀에서 사는 것이 정말 힘든 점은 부정부패 같은 사회 비리 때문이 아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불신(不信) 때문이다. 이건 정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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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이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되돌아 가는 것은 인간적, 사회적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에게 자주 속는다는 뜻이다. 

 

처음 이런 일을 당하면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필리핀에서 너무나 흔한 일이다. 내 주변의 일을 일반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에 사는 외국인에게 필리핀 살이의 제일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불신(不信)"을 이야기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만연해 있는 생활 속의 "불신(不信)"은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적응하는 사람은 또 쉽게 적응한다. 그래서 적응에 성공한 사람은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나 적응 못하는 사람은 빨리 떠나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심한 경우 인간을 혐오하는 단계에 까지 가게 된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적응'이란 뭘까? 이건 누굴 믿고 안 믿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안 믿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호 간에 아무도 안 믿으면, 서로가 피해를 볼 일이 없다."는 것에 적응하는 것이다. 모두가 속이고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속임을 당해도 그리 불쾌하지 않게 된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이건 냉소적인 것과는 좀 다르다. 뭔가를 포기하는 듯한 묘한 부분이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필리핀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금방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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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필인러브>

 

이런 필리핀의 불신 문화가 코로나19와 만났으니, ​이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은 생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리핀은 지구 상에서 사라질 텐데, 설마 그런 일이야 생기겠는가. 단지, 큰 희생을 치를 것이라는 것이 걱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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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I think I'm fighting for a life I ain't got time to live"
- Dallas Buyers Club, 2013.
가끔은 살려고 애쓰다가 정작 삶을 누릴 시간이 없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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