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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942년 6월 4일 오전 10시 25분.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일본의 영광을 상징했던 항공모함 아카기. 진주만해전으로 시작해 실론해전을 거쳐 미드웨이 앞바다까지 달려온 아카기는 명실상부한 일본 해군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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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아카기

 

해전의 주역은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함대는 일본의 제1항공함대였고, 그 주축은 아카기(赤城), 가가(加賀)였다. 

 

그런 카가는 제6정찰비행대대의 급강하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미 해군이 모두 다 카가에게만 덤벼든 탓이다. 미군의 공식 보고로만 5발, 비공식적으로는 10발의 명중탄을 맞았다.

(미 해군 제6정찰 비행대대와 제6폭격비행대대 소속의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10개 편대 28대가 카가를 공격했다. 총 50발의 폭탄이 카가를 향해 날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5분”

 

제6폭격비행대대장 리처드 베스트 대위는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편대기인 에드윈 크외거 중위와 프레드릭 웨버 소위를 이끌고 오른쪽에 보이는 항공모함, '아카기'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4200미터 고도에서 아카기에게 접근하는 동안 딕 베스트 대위의 편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베스트의 편대는 아카기를 향해 급강하. 고도는 점점 내려갔다. 그때까지 일본 해군은 베스트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고도 900미터, 그제야 아카기의 견시가 베스트의 편대를 확인한다.

 

아카기의 남서쪽에서는 미 해군의 돈틀레스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상황이었고, 북동쪽에서는 미 해군의 제3뇌격비행대대가 히류를 공격중이었다. 아카기는 이들 공격에서 떨어지기 위해 계속 거리를 유지하며, 공중방어와 공중초계를 위해서 제로센을 날려 보내려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제로센이 아카기의 갑판을 박차고 나아갈 쯤, 아카기의 견시들이 급강하에 돌입해 날아오고 있는 미 해군의 돈틀레스 폭격기들을 확인한다. 아카기는 가지고 있던 25mm 대공포를 폭격기로 돌려 사격에 들어간다. 호위 구축함이었던 노와키도 대공포를 쐈지만, 이미 진입각도에 들어간 돈틀레스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3명의 조종사가 떨어뜨린 3발의 폭탄 중 1발 만이 아카기에 명중했다. 딕 베스트 대위의 450킬로그램짜리 폭탄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450킬로그램 폭탄 한 발을 맞았다고 아카기 정도 되는 크기의 함정이 격침될 확률은 거의 없다. 보통 이 정도 크기라면 이만한 폭탄 5~6발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맷집이 된다. 괜히 배수량 41,000톤이 아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있기 직전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쇼카쿠는 450킬로그램 폭탄 3발을 두들겨 맞았는데도 살아남았다. 3개월의 수리를 마치고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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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행동 중인 아카기

 

그렇다면 아카기는 왜 격침했던 걸까? 간단하다. 

 

“운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시간에 좋지 않은 곳에 두들겨 맞았다. 딕 베스트 대위가 날린 폭탄은 아카기 갑판의 한가운데, 중앙 엘리베이터 옆에 떨어졌다.

 

중앙 갑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항공모함의 이착륙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따로 있었다. 폭탄이 떨어진 곳 아래에 97식 함상공격기 격납고가 있었던 것이다. 거의 1톤이나 되는 항공어뢰를 매단 97식 함상공격기 18대가 꽉 들어차 있었고, 주변에는 폭탄 무장을 어뢰 무장으로 바꾸기 위해서 널부러져 있는 800킬로그램짜리 폭탄들과 850킬로그램짜리 항공어뢰들이 널려 있었다. 최소한 30톤 이상의 고성능 폭발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에 폭탄이 떨어졌고, 이 한 발로 항공모함 아카기는 격침된다. 

 

 

1. 

 

러일 해전 이후 전세계 해군 전략가들은, 앞으로의 해전을 이렇게 생각했다.

 

“거함거포를 장착한 전함들 간의 함대결전으로 이어질 거다.”

 

그러나 이런 해전은 제1차 대전의 유틀란트 해전 이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이 ‘전함’을 확보하기 위해 목을 매달았다. 

 

하지만 비쌌다. 1년 국가 예산의 30%를 넘어가는 비용을 전함 건조를 위해 사용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그렇게 자랑했던 ‘호텔 야마토’의 경우 일본 국가예산의 1%나 들어간 물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양 전쟁이 벌어졌는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전장의 주역은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이 됐다.

(그렇게 자랑하던 전함들은 항공모함 옆에서 대공포대로 활용되던가, 상륙 작전 시에 지원 포격을 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2차 대전 당시 전함처럼 애매한 함종을 찾기가 힘들 거 같다. 이미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으로 넘어간 상황이 아닌가? 함대결전을 위해 만들어진 함정이 ‘결전’할 상대를 잃어버린 거였다)

 

제2차 대전 당시 미 해군은 130여 척의 항공모함을 찍어내 태평양 레이스에 투입했다(대부분이 호위항모였지만).  

 

“하늘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제해권을 잡기 위해서는 공중우세, 제공권이 필요했다. 머리 위에서 내리 꽂히는 급강하 폭격기를 막기 위해서는 하늘을 지켜줄 전투기가 필요했다. 그 반대도 설명 가능했다. 적의 머리 위를 낚아채면 전쟁은 이긴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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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함 뱅가드

 

 

해전의 방향성이 바뀌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전함 뱅가드다. 기공 시기만 보면 인류 역사상 건조된 마지막 전함이 될 거다. 이전함은 2차 대전 내내 건조와 중단이 반복되다 2차대전이 끝난 1946년 8월 9일 취역한다(원래는 1944년에 취역할 예정이었다). 

 

영국은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예비부품들과 남아있는 구형 장비들을 짜깁기해서 어거지로 뱅가드를 완성시켰다. 이미 해전의 주력은 항공모함으로 넘어가, 이 전함은 영국 왕실의 요트로 한 3년 간 사용된다.

(이걸 타고 왕족들이 유람을 간 게 아니다. 영연방을 순방할 때 장거리 여객기 개념으로 썼다. 몰락하는 제국이지만, 아직 위엄이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활용됐다. 실제로 이전 영국 왕실의 왕실 요트들은 순양전함이나 전함들을 활용했다. 지금처럼 항공기로 이동을 하던 시절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VIP의 안전과 국가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 뒤로 얼마간 예비전함으로 운용되다 1959년 매각돼 고철로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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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탈

 

이제 해전의 주력은 명실상부한 항공모함이 됐다. 바다에 포레스탈이 문을 연 슈퍼캐리어(Super Carrier)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미국 정도만이 끌고 다닐 수 있지만).

 

2차 대전 전함의 배수량을 가뿐히 뛰어넘는 항공모함의 등장은 해전의 방향을 가늠케 했다. 포레스탈만 해도 7만 톤이 훌쩍 뛰어넘었고, 니미츠에 이르면 10만 톤급에 이르렀다. 항공모함 1척의 무게가 어느새 전함을 뛰어넘었다(2차 대전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가 6만 4천톤).

 

항공모함의 크기가 커진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긴 갑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전 프로펠러 시절의 전투기를 운용하던 것과 달리 전투기에 제트엔진을 달면서 더 긴 갑판이 필요하게 됐다. 그 결과 갑판이 대형화 됐고, 이 무겁고 커다란 전투기들을 쏘아 올릴 장치들이 달리기 시작했다(캐터팰트). 

 

덩달아 추진기관도 바뀌어, 무한의 힘을 사용하는 원자력 추진기관이 달리기 시작했다. 

 

항공모함은 크고, 무겁고, 비싼 배가 됐다. 동시에 한 국가의 자존심이자, 국가의 ‘전략자산’의 위치를 점하게 됐다. 크고 비싼데 효용이 없다면, 항공모함은 뱅가드처럼 고철로 만들어 버렸을 거다. 그러나 이걸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는 건(미국이나 프랑스, 중국, 인도 등) 가치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항공모함은 어느새 국가의 상징이 됐고, 동시에 적에게는 전략적으로 가장 탐스러운 목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