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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첫, 그리고 가장 막대한 희생자는 진실이다.”

 

                                                    - 아이킬로스

 

아이킬로스의 명언이다. 이 말을 보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던 게 생각난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비극 작가 아이킬로스의 저작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어둡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내 관점에서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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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 中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아라짓 전사들처럼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를 겁탈하는 세상은 아직까지 오지 않은 거로 알고 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터에서의 강간은 일종의 공포전략이다. 적대국의 공동체와 사회를 해체하거나 상처 주기 위한 전쟁의 한 부분이란 거다. 

 

동, 서양의 역사를 보면 병사들의 개인적인 욕망을 푸는 차원에서, 혹은 지휘관의 판단에 의해서든 강간은 늘 있어왔다. 이걸 막으려고 군법을 엄격히 적용한다 해도 강간은 늘 있어왔다. 

 

 

현대 가장 비극적인 강간 사건

 

현대 총력전을 배경으로 가장 비극적인 강간 사건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게 1945년 5월의 베를린이다. 나치 독일을 끝장낸 건 소련이었다. 그들은 1941년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잊지 않았다(이 때문에 독일군들은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과 영국군 쪽에 항복하려 갖은 애를 다 썼다). 

 

소련 침공 초기 이어진 독일의 살인, 강간, 약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소련은 독일에 그대로 되갚아 줬다. 소련 점령 기간 동안 강간당한 여성은 2백만 명이 넘을 것이란 보고가 있다. 이건 최저치이고,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란 보고가 줄을 잇는다.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쪽에서 당한 여성들의 숫자만 최소 14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치도 나와 있다.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한 직후 몇 개월 동안 독일의 의사들이 낙태 시술을 한 건수만 10만여 건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1945년 5월 베를린의 인구는 270만 명이었는데, 이 중 200만이 여성이었다. 강간을 당한 후 사살된 거로 추정되는 여성만 24만여 명이 넘는 거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강간이 두려워 자살한 여성들, 강간을 당한 뒤 자살을 한 여성들도 상당수다. 

 

이 당시 소련군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규정된 인간에 대해서는 나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8세 소녀도 있었고, 80세 노파도 있었다. 

 

이 당시 독일 의사들은 여성들이 자살 방법을 문의하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강간이 가지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는 남성이라 쉽게 감이 오지는 않지만,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신체를 훼손당하거나 침범당하는 기억은 딱 1번이라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문제는 이 기억이 1번뿐이 아니라는 거였다. 최초의 진출부대 뒤를 따라 점령부대가 속속 들이닥쳤고, 강간을 당한 여성이 또 다른 소련군에게 계속 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희생자 중 한 명이 2011년에 자살한 헬무트 콜 총리의 前 부인인 하넬로네 콜 여사였다(하넬로네 여사는 남편이 대중에게 노출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늘 불편해했다). 그녀는 1945년 5월 소련군이 독일을 점령할 즈음에 강간을 당했다. 그것도 엄마와 함께 말이다.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당시 상황은 그녀의 자서전에 잘 나와 있는데, 

 

“성폭행을 당한 뒤 감자가 담긴 자루처럼 1층 창문으로 내던져졌다.”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하넬로네 여사는 평생 남성의 땀과 마늘, 알콜 냄새, 러시아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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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일 첫 총리인 헬무트 콜과 그의 첫 번째 부인 하넬로네 콜.

 

역사가들은 소련의 독일 점령 당시 자행한 강간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강간 행각’이라고 말하곤 한다. 안타깝지만, 이게 사실일 확률이 높다. 인류 역사에서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여성들을 강간한 사례를 찾는 건 꽤 난망한 일이다. 

 

이런 강간의 결과는 1년 뒤인 1946년 엄청난 베이비붐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3년간 독일 전역에서는 최소 2백만 건 이상의 낙태 시술이 있었음에도 베이비붐을 다 막아낼 수는 없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독일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독일어는, 

 

“프라우 콤! (Frau Komm : 여자, 이리 와!)”

 

이었을 거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단위 강간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걸까? 그 이유를 확인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이런 강간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던 이유 

 

첫째, 소련군은 점령군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점령군. 그것도 치열한 혈투 끝에 얻은 승리인 경우에는 이런 식의 약탈과 강간이 이어졌다. 비근한 예로 1차 대전 초기 독일이 벨기에에서 일으킨 루뱅(Leuven) 학살 같은 경우가 있다. 보불전쟁 이후 이렇다 할 전쟁 없이 40여 년 간 훈련만 받아 온 독일군이기에 실전은 처음이었다. 

 

슐리펜 계획으로 빨리 프랑스령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벨기에가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점령지에서 빨치산 활동이 있다는 풍문이 돌았고, 실제로 병사 한 명이 총격에 죽는다. 이후 벌어진 살인과 강간, 약탈은 벨기에를 몸서리치게 했다.  

 

소련군은 전쟁 내내 독일군에게 당했다. 이긴 전투에서도 사상자 숫자는 소련군이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었고, 전쟁 초기에는 이보다 더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보복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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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소련군

 

이 당시 소련군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건 고사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병사도 많았다. 타고난 품성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윤리 교육도 받지 못했다. 베를린의 수도꼭지와 전구를 뽑아내 전리품으로 삼은 이들이, 이걸 자기네 농가에 가 집에 붙이면 물이 나오고 불이 켜지는 줄 아는 경우도 있었다. 

 

이성에 호소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거다. 

 

셋째, 스탈린의 방관

 

스탈린의 개인적 복수심일 수도 있고, 그의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점령지 통치의 기본이기도 하다. 보통 타국을 점령한 주둔군은 한동안 치안 부재 상태를 만든다. 치안 부재 상태에서 겪게 되는 살인, 약탈, 강간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는 민간인들은 어떤 ‘세력’이 됐든, 치안을 유지시킬 정도의 무력이 들어온다면. 이것을 우호적이진 않지만 최소한 비토하는 분위기는 없다는 거다.

 

이런 점령지 정책의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판단으론 스탈린의 개인적인 복수심이 섞여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추축국 편에 붙었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나 다른 추축군 영토를 점령했을 당시에도 소련군의 고삐를 풀었다. 그 결과 부다페스트에서만 5만 명의 헝가리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 

 

이런 대단위 강간 사태가 잦아들 수 있었던 건 주코프의 강경 대응 때문이다. 소련군의 강간 범죄가 도를 넘어섰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감지됐다. 백주대낮에 길을 걷던 독일 여성을 붙잡고, 저항하면 구타하고, 도로나 골목으로 끌고 가 강간을 했다. 내키면 살려주고, 기분이 나쁘면 죽였다. 하넬로네 여사의 경우는 이 당시에는 일상이었다. 

 

군대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 상황. 게다가 베를린에는 소련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연합군의 눈치도 봐야 했다. 

 

결국 주코프는 강간 범죄를 저지른 병사는 즉결처형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강간은 계속 이어졌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련군을 처형한 뒤에야 이 폭풍은 가라앉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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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강간 행각’은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