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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1월 29일 자 <정동칼럼>에는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의 ‘민주당만 빼고’라는 칼럼이 실린다. 칼럼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외한 정당에‘만’ 투표하자는 얘기다. 이 칼럼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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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기자나 언론사들이 주장하던 정치적 중립이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론사에선 보통 외부 필자 칼럼에 대해 자신들의 방향과는 다를 수 있다고 한 줄로 면피를 한다. 실제로 방향과 다르냐 하면 그런 경우 거의 없다.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 문제가 될 때 빠져나가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필자를 정하는 것도, 칼럼을 싣는 것도 모두 언론사에서 하는 행위이다. 임미리 씨도 저 글이 경향신문에 실리는 칼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경향신문이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칼럼이 나갈 수 없다. 

 

조선일보에 장자연 씨 이야기를 하며 방상훈 씨를 비판하는 칼럼은 실리지 않는다. 외부 필자의 칼럼이라고 해도 그 언론사나 내부의 기자들 다수가 원하지 않는 원고는 ‘절대’ 실리지 않는다. 내부 구성원들이 실리기를 원하는 내용만 실릴 수 있다.

 

경향에서 강진구 기자의 칼럼과 관련되어 경향신문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사실을 방증한다. 칼럼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기자들 다수가 문제라고 생각하면, 기사가 삭제될 수 있다. 내부 기자의 칼럼도 구성원 다수가 원하지 않으면 실릴 수 없는데 외부 칼럼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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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9일, 경향신문 온라인에 게재된 강진구 기자의 이 기사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와 출고 과정상 문제 등을 이유로 4시간여 만에 삭제됐다. 해당 이미지는 인터넷상에 남아 있는 기사 원문. / 강진구 기자의 칼럼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해놓은 관련 기사 링크

 

언론사에서 외부칼럼을 활용하는 이유는 사회 내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기자들이 직접 하기 면구하고 부끄러운 얘기를 외부 필자의 목소리를 빌어 이야기해서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진중권 저널리즘은 기자들이 자신이 직접 말할 수 없거나 말하기 어려운 속마음을 진중권의 입을 빌어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경향신문 내부에서 강진구 기자와 관련된 논란이 벌어진 걸 보면 ‘민주당만 빼고’라는 글이 실릴 수 있었다는 것은 내부 구성원 다수가 암묵적으로 그 내용에 동의했거나 최소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릴 수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칼럼이 실리고 나서 문제가 되었을 때, 언론의 정치적 중립 등을 이유로 들어 경향신문을 비판하는 내부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 얹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정치인 중에 정치적 중립 위반을 이유로 경향신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비판받은 쪽은 오로지 고발한 민주당뿐이다(민주당이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한겨레에 ‘미래통합당만 빼고’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거나 조선일보에 ‘정의당만 빼고’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리면 ‘오 그렇군’이라며 조용히 넘어갔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언론의 중립의무 위반이나, 기자의 윤리위반이니 하면서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보통 언론사들에선 문제가 되는 칼럼을 쓴 사람의 글은 받지 않는다. 임미리 씨는 저 칼럼이 문제가 된 이후에도 경향신문에 계속 기고를 하고 있다. 임미리 씨의 칼럼이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경향신문 내부에선 국민의힘보다 민주당을 더 큰 적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비토하는 분위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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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5일 경향신문 오피니언 기사

 

그렇다고 진보언론 기자들이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들에게 더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더 위협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진보 진영에게 민주 진영이란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2017년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외친 ‘굳세어라 유승민’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심상정이 ‘굳세어라 유승민’이라고 외친 이유는 유승민이 사퇴하지 않고 대선 레이스를 완주하면 홍준표나 안철수의 표가 분산되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유승민이 미래통합당의 유일한 후보였다면, 심상정은 ‘굳세어라 유승민’을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상정은 2018년 6월 유승민 의원에게 실망했다며 지지 의사를 철회하는데 처음부터 심상정이 유승민에게 실망할 만큼 기대한 적이 없다고 내기를 걸어도 좋다. 그냥 선거에 필요했기 때문에 한 말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응원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쪽을 욕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가끔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감수하는 훌륭한 인간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고, 대부분은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한다. 

 

심상정이 범진보 진영으로 통칭되는 문재인에게는 날을 세우면서 유승민을 응원했다는 사실은 유승민보다 문재인이 정의당 쪽에서는 더 중요한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민주당 사람은 정의당은 중요한 순간에 단 한 번도 민주당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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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이 민주진영의 편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많은 중요한 순간에 다른 쪽에 섰다는 것은 저 둘이 같은 편이 아니었고, 지금도 같은 편이 아니라는 의미다.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진영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민주진영은 같은 편이 아니다. 

 

진보 진영 언론이나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돈 없는 조중동이라며 진보 진영 언론사와 기자들을 모욕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진영에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억울해 만 하는 진보 언론 기자들은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는 그렇게 불릴만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해야 하는데 그들은 저것들은 ‘대깨문’이라 그래! ‘문빠’라 그래! 라며 자신들의 잠재적 소비자들을 모욕하고 떨궈낸다. 맨날 회사가 망해간다든지 언론의 위기다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저러니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다. 

 

김어준을 음모론자라고 욕할 줄만 알았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기레기라고 욕하며 그 음모론자를 신뢰하는지에 대해 1초도 생각해보지 않고 억울해하기만 한다. 자기들끼리 김어준 욕하면서 서로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기뻐한다.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질까.

 

문빠, 대깨문들이 무식해서 그렇다는 소리만 할 것이다. 이런 기자들은 대개 박사모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 때는 그들이 살아온 세월과 삶을 이해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던 이해심이 깊은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이해심이 왜 박사모에게만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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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링크

 

박사모 사람들의 잘못을 떠나서 그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왜 그런 시도가 가장 많은 수인 민주 진영 지지자들에게만은 이뤄지지 않느냐는 거다.

 

진보 진영 언론인들이 민주 진영(당과 정치인뿐 아니라 김어준 같은 민주 성향 언론인이나 그들이 문빠라고 부르는 지지자들까지 포함)을 수구 진영 사람들보다 더 큰 혐오하고 욕하는 건 민주 진영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데서 온 배신감과 실망감 그리고 가깝기 때문에 자신들의 차지하고 있는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이 혐오감과 미움은 정의당 같은 진보 진영 정치인뿐만 아니라 홍세화, 강준만 등의 진보 진영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말이 전부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하는 말이 전부 틀리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역사의식, 시대를 관통하는 통시적 시각을 가져야 하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이면서 눈앞의 일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식견의 부족함과 맥락에 대한 이해 결여 그리고 자신의 말이 어떤 식으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 받을 만 하다. 물론 진중권은 그냥 룸펜 구직자 같은 것으로 여기 낄 자격도 없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제가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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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 세력에 이용당하는 진보 진영과 왜곡되는 여론

 

민주 진영은 자신들의 시장을 뺏을 수 있는 경쟁자라는 면에서 수구 진영에게도 그렇지만 진보 진영에게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원교근공이고, 적의 적은 친구다. 그래서  진보 진영 인사들이 수구 진영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입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참여 정부 이후 다시 한번 벌어지고 있다. 

 

민주 진영을 공격하는 진보 진영의 목소리가 보수 정부 때보다 잘 들리는 이유는 이것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보수 진영의 필요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은 말과 돈과 권력의 요지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쉽게 유통할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지금 제일 필요로 하고 유통하고 싶은 정보는 민주 정부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진보 진영 인사들의 민주 진영에 대한 공격은 이 필요를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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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민주 진영도 진보 진영도 빨리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둘은 같은 진영에 속해있지 않지만, 서로 힘을 합칠 수 있고, 합쳐야 하는 상대다.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권력을 뺏기지 않는 보수 세력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정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바뀌고, 민주당이 180석 가까이 차지했다고 해도 힘의 차이가 하루아침에 역전될 수 없고, 역전되지도 않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참여정부 부총리를 한 김병준을 총리로 임명하려 했으며, 그가 미래통합당의 비대위원장이 된 게 그냥 벌어진 일이 아니다. 노무현이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유엔 사무총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반기문이 미래통합당의 대선후보가 될 뻔한 게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현재 민주 진영의 힘은 겉으로는 막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언론 지형도만 봐도 명확하다. 지금 언론 중에 친정부적인 보도를 하는 언론사는 어디인지 생각해보면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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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진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세인 진보 진영도 한겨레나 경향 같은 확실한 친 진보 진영 매체를 가지고 있다. 김어준이나 유시민이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친정부 언론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고작 프로그램 하나 두 개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매체에 나오는 여론과 실제 국민 여론의 괴리를 보여주며, 지난 총선 결과는 이 괴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진중권 저널리즘으로 상징되는 ‘민주 진영 여론에 대한 과소 대표와 나머지 진영에 대한 여론에 대한 과잉 대표’가 계속되고 있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김봉현 씨에 대한 보도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누군가가 우리나라 매체들을 보고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과반에 육박하는 상황이라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진영과 세력의 크기에 대한 인식은 문제 인식의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옳고 그름의 싸움인 동시에 세력과 진영 간의 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진영에 속해있고 현재는 어떻게 진영이 나뉘어 있는지 어떤 진영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상황이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여론이 정치에 반영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론이 가능한 정확하게 반영될 필요가 있다. 언론과 기자들은 국민 여론을 정밀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역사적, 현실적 이유로 인해 국민 여론은 기형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언론에선 이 왜곡을 고치려고 하기는커녕 즐기고 있다. 

 

보수, 민주, 진보 세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는 정확한 인식이 왜곡된 여론 대표성을 수정할 수 있는 출발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 3분론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확산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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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챙타쿠

 

이걸로 삼분론은 끝이다. 

 

긴 시리즈 읽느라고 고생하셨다. 그런데 삼분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중권 저널리즘’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중권이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어떤 맥락으로 언론과 수구 정당에서 소비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안 중요한 진중권과 달리 중요하다. 그래서 3분론 외전 ‘진중권 저널리즘의 이해’를 딱 한편만 쓰려고 한다. 확정된 건 아니고, 영 자괴감이 들면 안 쓸 수도 있다. 외전에서 보게 되면 보자. 재미없는 글 읽어준 당신에게 감사.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