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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의 일입니다.

 

지하철 4호선이 과천을 거쳐 안산으로 뻗는 와중에 지나치는 역들 가운데 특이한 이름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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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미역'


흡사 경부선 열차가 총알처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간이역들의 풍광처럼 푸른 산과 너른 들에 둘러싸인 곳이었지요. 역에 내려서 제가 찾아가려던 동네까지의 거리도 막막할 만큼 멀었고, 서울 근교 전철역 중에 이런 데도 있구나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 험한(?) 곳을 부득부득 찾았던 이유는 좀 특이했습니다. 그곳에서 열리는 음악회 때문이었으니까요.


그곳은 행정 구역상 경기도 군포시에 속했는데, 당시 군포시에서는 시의 문화 역량을 동원하여 대야미와 같은 조금은 구석진 마을을 방문하여 음악회를 여는, 이른바 '찾아가는 음악회'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게 저희 팀 작가의 레이더에 걸린 것이지요. 음악회는 나름대로 알찬 순서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동네 반장님은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동네 방송 중이었습니다. 오늘 밤 몇 시부터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동네 사람들 다 나오라는 얘기를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쯤 반복하고 계셨죠. 부녀회장 댁에선 아주머니들이 그날 밤 사람들이 아직은 추운 밤 공기와 사람들의 찬 속을 녹여 줄 커피와 차를 준비하고 있었지요. 모두들 상기된 표정이었고 하나같이 들떠 있었습니다. '이런 좋은 구경을, 그것도 우리 마을에 앉아서 하게 되다니'


플래카드가 요란하게 걸린 마을 앞 공터에는 망치 소리 드높이 무대가 서기 시작했습니다. 조명등에서 눈을 찌르는 빛줄기가 피어 오르자 벌써부터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무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저씨들의 신기하기만 한 몸놀림에 눈을 박아 두고 있었지요. 그렇게 공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일기예보에도 등장하지 않던 먹구름이 서쪽으로부터 뭉게뭉게 밀려들더니 곧 시커멓게 대야미의 산하를 뒤덮었습니다. 어라? 설마? 하는 관계자들과 제 우려스런 눈길은 곧 공포로 변했습니다. 새끼손가락처럼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둑 갓 설치된 무대를 폭격하기 시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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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잠깐 사이에 플래카드는 막 널어놓은 빨랫감이 되어 버렸고 열심히 일하던 조명이며 음향이며 각종 시설팀들은 떨어지는 비로부터 장비를 보호하느라 필사적으로 뛰었습니다. 행사의 주관자인 시청 공무원과 선발대로 왔던 공연팀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고, 아울러 이 공연이 무산된다면 그대로 방송 펑크 위기에 몰릴 제 얼굴은 글자 그대로 사색이 됐습니다. 그런 얼굴을 무정한 빗방울이 사정없이 때리더군요.


"공연할 수 있겠어요?" 젖어가는 대지와는 달리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입으로 조명팀 한 명에게 물었을 때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될 거 같은데요. 이 비에 나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시청 관계자도, 공연팀도 망연자실해 있는데 역시 걱정이 되었던지 우산을 쓰고 나왔던 반장님이 힘있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꼭 나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빗속을 내달려 집으로 가시더니 다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비가 내리는 와중이라도 대야미 사람들이 나와 준다면 공연은 강행될 것이며, '손에 손에 우산을 들고, 우비를 쓰고' 대야미에 온 귀한 손님들을 맞자고 대략 열 번쯤 방송을 했습니다. 그러나, 빗줄기는 마을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흐르는 소리를 틀어막을 만큼 거세게 쏟아졌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반장님 집 안에 앉아 작가를 호출하여 급히 다른 아이템 찾아보자고 비상을 거는데 시청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연할 것 같은데요." 예정된 공연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늦춰진 시각, 장화 신고 장난치러 나온 아이들 몇 명 데리고 공연할 건가 싶었는데 시청 관계자의 목소리는 떨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많이들 오실 것 같은데요. 벌써 꽤 왔어요."


한 손에 우산 한 손에 카메라(레인 커버도 준비하지 못했었지요)를 들고 공연장으로 내닫는 제 눈에 저 멀리 무대의 조명빛이 비쳤습니다. 그 불빛에는 아직도 폭우가 빗금을 새기고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무대 앞에 모여 있다는 것, 그리고 계속 몰려들고 있는 풍경도 비춰 주고 있었지요.


"이 비 오는데 공연 보러 가실 거예요!?"


빗줄기와 땅바닥이 키스하는 소리가 워낙 요란했기 때문에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말이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손에 손에 우산을 들고' 아이들까지 우비를 입히고 나가던 한 할머니가 역시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비에 공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보는 게 대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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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무대 앞은 형형색색의 우산으로 가득 찼습니다. 대야미 인구가 얼마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한 집에 두셋씩은 족히 나왔음직한 인파가 수백 개의 우산 아래 모여 있었지요. 예정 시간보다 1시간 30분을 넘겨서 빗소리를 능가하는 함성으로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비디오 가게 딸과 그 친구가 열심히 연습하여 준비한 피리 연주 '사랑으로'가 그 막을 열었지요.


참가한 공연팀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무대는 그나마 천막으로 가렸지만 제대로 된 대기실도 없어서 무대에 올라가는 인원 외에는 우산을 들고 그 비를 맞으며 화음을 맞추고 악기를 튜닝해야 했지요. 그러나 하나같이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차가운 봄비 사이로 입김이 폭폭 나올 정도로 싸늘한 밤이었지만 그 열기는 뜨거웠고, 앞사람의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게 만들던 폭우 소리는 이제 공연의 배경음처럼 들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는 공연팀에게 이런 비 맞으면서 공연해 봤냐고 묻자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뇨."


"힘들지 않으세요?" 라고 물었을 때 누군가가 삐죽하면서 내던진 대답에 저는 그예 하늘을 보고 웃고 말았답니다. "이 비에 공연 보는 사람도 있는데 공연하는 게 뭐 힘듭니까."


특히 사회자 아저씨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음 차례를 소개하기에 앞서서 점점 늘어만 가는 우산들을 감개무량하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런 멘트를 하더군요.


"옛날 프랑스 영화에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알록달록 우산들이 끝없이 오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저는 이 공연의 이름을 대야미의 우산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쉘부르의 우산이 아니라 대야미의 우산!"

 

이제 우산은 비를 피하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서 우산을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무지개빛보다 더 화려한 우산의 행렬은 조명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빛났고, 그 아래에서 사람들의 어깨춤은 더더욱 신이 났습니다. 공연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던 공포의 빗줄기는 축복의 세례로 변했습니다. 우산을 힘차게 흔들어대던 한 아주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대야미가 복 받은 동네라는 생각이 드네요. 무척 기다렸던 비잖아요 요즘 가물어서..."

 

공연이 진행되면서도 사람들 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만 갔지요. 그 속을 누비고 다니던 제게 가장 많이 비에 젖어버린, 아니 숫제 막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듯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공연 순서지를 나눠 주는 스태프였고 새로 온 사람들에게 그 순서지를 나눠 주고 있었지요. 그 순서지들은 파일 꽂이에 곱게 담겨 있어서 비 한 방물 맞지 않고 사람들에게 건네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파일 꽂이를 두 손으로 간수하느라 그는 우산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태평양에 잠수했다가 떠오른 생쥐 꼴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지요. 공연에 참가한 어떤 극단의 막내라던 그는 아직 많은 공연은 해 보지 않았지만 이런 공연은 본 적이 없었다면서, 내일 감기가 아니라 폐렴에 걸려도 좋다고 하면서 빗속을, 사람들 속을 뛰어다녔습니다.


가장 신났던 순간은 한 통기타 가수가 <나의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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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


마치 공연의 주제가 같았습니다. 스태프들도 전부 일어나 박수치며 몸을 흔들었고 우산들은 파스텔 물감이 이리저리 튀듯이 거칠게 움직였지요. 랄랄라라라 랄랄라라라 랄랄라라랄라 노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목이 쉬었고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치어리더처럼 우산들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역시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김광석의 기일인 오늘 새벽, 출근하는데 그 때의 공연 모습이 동과 함께 터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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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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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