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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8.월요일


김지룡


 


 


 


몇 년 전부터 가계부를 내가 쓰기 시작했다. 결혼한 이후로 줄곧 아내가 가계부를 써왔는데, 내가 쓰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제 대금처리도 내가 하기로 했다. 카드 대금 결제일이 돌아오면 MMF를 일부 환매해서 결제통장으로 이체한다. CMA 계좌를 만들고 결제통장으로 사용하면 더 편하겠지만, 일부러 MMF 통장에 돈을 넣었다 뺐다하는 식으로 일처리를 하고 있다. 그 편이 아빠라는 존재를 더 많이 실감할 수 있고, 그만큼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마치 탁구를 치는 것 같다. ‘삶’이란 놈이 내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 끊임없이 내게 공을 던져준다. 어려운 공도 있고 쉬운 공도 있다. 어렵든 쉽든 그 공을 받아쳐야 한다. 잘 받아치면 삶이 편안해지고, 잘못 받아치면 불편한 상황에 처한다.


 



 


청소년 시절부터 삶은 줄곧 ‘의문’이라는 공을 던졌다. “너는 왜 사느냐?”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행복이 무엇이냐?” 같은 의문이다. 그 의문에 대해 ‘산다는 것은 허전한 것’이고 ‘행복은 허전함을 채우는 일’이라고 받아쳐 왔다.


 


그때는 삶이란 것이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벌레 먹은 이파리처럼 느껴졌다. 그 허전함은 허탈함이나 허무함으로 커지면서, 때때로 나를 무척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그 허전함을 재미로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으면 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허전함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재미있는 일은 일시적으로 허전함이라는 구멍을 메워줄 뿐이다.


 


재미는 휘발성이 너무 강하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은 잠시 허전함이 채워지지만, 그 일이 끝나면 곧바로 허전함이 고개를 들고 일어선다. 그 허전함을 메우려면 또 재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끊임없이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것에는 중독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되었다. 여자를 꼬시는 일에 중독된 적도 있고, 게임에 중독된 적도 있었고, 술자리에 중독된 적도 있다.


 


아빠가 되고 난 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육아중독’이라고 부를 만큼 아이 키우는 일을 푹 빠져들었다. 더 이상 허전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허전함을 메우는 최고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재미는 날아가지 않는다. 잠시 허전함을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 키우는 일은 재미와 더불어 보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찰나적으로 잠시 느끼는 재미가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고 미소를 지으며 두고두고 즐길 수 있는 재미다. 아이 키우는 재미를 알게 된 뒤로, 내 삶에 펑펑 뚫려있던 구멍들이 하나하나 메워지기 시작했다.


 


삶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삶이란 녀석은 끈질기다. 이젠 내게 문제를 던진다. 그 문제의 대부분은 금전적인 것이다. 나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가족이 내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 대신 가족 부양이라는 문제를 매일 해결하면서 살게 된 것이다.


 


삶이 매일매일 던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때로 지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하루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삶이 내게 던지는 탁구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별 몸부림을 다 쳐봤다. 하지만 문제는 끝도 없이 날아왔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날아왔다. 살아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를 푸는 것을 즐기기로 했다.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대금을 결제할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


“그래, 문제 또 던져 봐. 다 받아쳐 주마.”


 


가계부를 쓰면서 문제의 난이도를 낮추는 법도 알게 되었다. 쓸데없는 데 쓰는 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것만으로도 문제 해결이 쉬워졌다. 테이크아웃 커피 대신 캔커피를 마신다. 되도록 밤 12시 전에 술자리를 파하고, 택시 대신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양주는 국산 양주를 8만 원 이하로 파는 곳에서만 딴다. 그것도 여름에 한 번, 겨울 망년회 시즌에 한 번, 연간 두 번만 딴다. 술에 취하고 싶다고 떼를 쓰는 후배들을 만나면 폭탄주가 아니라 ‘소백산맥’을 쏜다.



문제가 쉬워진다고 해결하는 기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즐거워진다. 내가 삶이란 놈을 조금씩 길들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분들이 아시겠지만, ‘소백산맥’은 소주, 백세주, 산사춘, 맥주(생맥주 1000cc)를 섞은 것이다. 그러면 2000CC정도가 된다. 술을 꽤 마시는 사람도 네 사람 정도는 술에 확 취하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