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0.03.09.화요일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1. 지갑을 뒤적이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려고 집을 나섰는데, 지갑을 뒤져보니 3만원이 나온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배춧잎 세 장. 세종대왕 세 분.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오늘 일용할 맥주를 사고 리필이 많이 되는 알탕 같은 안주를 살테다. 집에 가는 길에 만두도 사 먹을까.


 


그러다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 삶은 얼마인가.


 



2. 산수놀이


 



 


30000을 365로 나누면 대충 82.19얼마얼마가 나온다. 이 말은 우리가 만으로 82세까지 살고 또 몇 달을 더 살아야 겨우 태어난 지 3만일에 도달한다는 거지. 개인차는 있겠지만(사실 이 분야만큼 궁극적인 개인차가 존재하는 분야도 드물지만), 사람은 결국 이 지상에서 3만일 전후를 살다가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다. 조조가 적벽에서 창을 비껴들고 흥에 취해 노래를 부를때 뒤에 서 있어야 했던 병사들 숫자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10만도 아니고 5만도 아니다. 딱 3만. 뭐 100세를 넘어 기네스가 어쩌고 하는 수준에 도달하더라도, 4만을 채우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란 소리지.


 


당시 삼국지에 취해 일만 이상의 단위에 상당히 무감각해져 있던 나에게 이 사실은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작 3만이란 말인가. 그걸론 형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텐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하루를 1원으로 치면 고작 3만원이 나에게 주어졌을 뿐이란 말이지. 그걸론 둘이서 아웃백도 빠듯한데.


 


게다가 이게 용을 쓰고 노력을 한다고 뭘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숫자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당시 아직 20대 초반이던 나에겐 꽤나 묵직한 주제로 다가왔다. 살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지 모른다. 담배를 안 피우고 술은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거나 잘 해소 하거나. 돈이 허락하는 한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교통사고를 안 당하는 것도 중요하고 범죄자에게 살해당할 것 같으면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다 갖춰져도 기껏해야 3만이 3만 5천으로 늘어날까 말까 한다는 말이지. 흐음...


 


갑자기 손에 들린 지갑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난 이 돈을 오늘 다 쓸 생각이었는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 음주와 가무에 능한 우리 민족의 얼을 대구 땅에 되살릴 각오였는데. 그 맹랑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걸까. 이깟 3만원 따위 다시 벌어서 지갑에 넣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 근데 두 번 다시 지갑에 돈을 넣을 수 없으면?


 



3. 일주일


 


삶의 무게를 실감하기 위해 꼭 세계여행을 떠나거나 무슨 기상천외하고 어마어마한 체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3만원으로 일주일을 살아 보기로 했다. 지갑에 3만원을 넣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지갑에 이 이상 돈을 넣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걸로 준비는 다 된거다. 돈을 더 넣고 싶다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누구나 좀더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다. 한 주가 지날때 까지 10원 한 푼 더 넣지 않는다.


 



 


세상이 달라보였다.


 


하루 5천원을 쓸 수 없게되자 100원이 그렇게 커 보일 수 없었다. 학교까지 왕복 차비가 2200원이냐 2400원이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가까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중교통의 적정비용에 대해 논문을 쓸만큼 고민해 보았다. 오락실 한 창 다닐 땐 연습용으로 껌처럼 날리던(껌이 한 때 100원 이긴 했지) 100원이었는데.


 


천원의 지출은 그날 하루 가장 중요한 선택 가운데 하나다. 쫄면을 먹을 것이냐 정식을 먹을 것이냐. 술? 미치지 않고서야 ㅡㅡ;. 두 시간 놀려고 천원짜리를 세 장이나(나도 모르게 3천원을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뺏길 순 없는 문제였다.


 


고등학교때부터 여자친구란걸 사귀는 아해들이 종종 100일이라면서 나에게 100원을 요구하곤 했었다. 지들끼리 좋아서 지들끼리 사귀는데 내가 왜 결혼세도 아니고 이런 쓸데없는 세금을 걷혀야 하는건지 여자친구 없이 살던 나는 그걸 참 고깝게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은 나에게 100원을 받아갈 자격이 있었다. 3만원 중에 100원은 큰 돈이다. 3만원 있는 인생에서 그 나이에 누군가 다른 사람, 그것도 다른 별에서 온 이성과 100일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다면 그것은 정녕 위대한 일이었다. 내 주머니에서 돈을 받아갈 만 하지.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제위 가운데 누군가와 100일 이상 사귀어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무조건 그 분께 감사해도 된다. 감사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우리네 삶 가운데 소중한 1/300을 가져갔다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천 일. 오차 포함해서 대충 3년이란 시간은 진짜로 큰 일을 할 수도 있고 어이없는 허송세월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공부를 하나 제대로 해 볼려면 어학이든 뭐든 3년을 하면 대충은 길이 보인다. 그 천 일을 기준으로 향후 5년 정도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란 말이지. 그냥 놀자고 하면 얼마든지 놀 수 있다. 그깟 천 원, 빵 두 개 사 먹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마지막 날에 동전 몇 개가 수중에 남아 있었던 건, 어린 시절부터 쓸데없이 절약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걸로 여생을 정리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하다 못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던가.


 



4. Art of Life


 


엑스저팬의 요시키가 저런 제목의 곡을 썼을 때, 그의 나이 대략 35세 전후 였다고 한다. 70살까지 산다고 치고 자기 인생의 절반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썼다나. 30분짜리 싱글 한 곡. 그의 곡을 듣는 일에 내 인생 가운데 반 년 정도는 쓴 거 같은데, 난 음악으로 표현해서 20분이 넘을 만한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을까.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기념일 계산기를 띄우면 누구나 간단하게 이런 저런 계산을 할 수 있다. 태어나서 첫 연인을 사귈 때 까지 걸린 시간.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날들. 그 사람과 헤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나. 기타등등 기타등등.


 


고등학교를 졸업해 무난하게 대학에 진학하신 독자제위라면 대충 태어난지 6,7천일 정도가 지났을 거다. 그리고 서른을 바라볼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1만일에 근접한 숫자가 나올 터이고. 1만일. 다섯자리 수. 세자릿 수에서 네자릿 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갔고, 여섯자리 수는 네 번 정도 부활하지 않는 이상 무리일 듯 하니, 이걸로 우리 삶의 ‘다음 자릿수’는 아마 마지막이 될 것이다. 기념삼아 누군가와 근사하게 밥이라도 한 끼 먹는것도 좋겠지.


 


내 삶이라는 지갑에서 아직 7천원 정도 밖에 지출하지 않았을 때 저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새롭게 만원을 지불하고 잔돈을 받을 날이 다가왔다. 난 저 만원을 어디에다 썼을까. 내 삶. 내 사랑. 나의 꿈. 그 만원을 지불해 무엇을 샀고 무엇이 남았나. 어디에 가서 벌어 올 수도 없는 내 소중한 하루 하루 였는데.


 



 


새벽에 글을 두드리다 보니 벌써 이 시간이다. 새로운 1원의 소비가 시작된 시간. 나 아닌 그 누구도 이 1원을 안 쓰고 지나치는 방법도, 언젠가 필요한 날을 위해 저축해 두는 방법도, 혹은 1원을 2원으로 늘리는 비결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결국 또 1원을 쓸 수 밖에 없고, 기왕 쓰는거 값지게 쓰자고 또 조금 발버둥 쳐 볼 뿐이지.


 


기왕에 써야하는 거라면, 값지게, 재미있게. 바라는 건 오직 그것 뿐이다. 언젠가 내 수중에 지불할 돈이 다 떨어져 버린 그 날, 낭비를 했다고 후회하는 데 또 쓸데없는 시간을 쓰는 일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