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너부리 추천0 비추천0



좀 생뚱맞긴 하지만 성탄절이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교회 고등부에서 성탄 연극을 준비한다. 그런데 한 아이가 문제가 됐다. 착하기 그지없지만 약간 지능이 떨어져서 조금 긴 대사를 맡겼다간 고스란히 연극을 망칠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고심 끝에 그 아이에게 딱 맞는 배역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여관 주인’이었다. 만삭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에게 매몰차게 “방 없어요."만 외치면 되는 역이었다.




마리아를 부둥켜안은 요셉이 애타게 여관 문을 두드렸을 때 여관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없어요!” “추위만 피할 수 있으면 됩니다.” "방 없어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가진 것 다 드리겠습니다." "방 없어요!" "마구간이라도 좋습니다. 길에서 아이를 낳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야흐로 여관 주인은 "방 없다니까." 라고 일갈한 후 문을 쾅 닫으면 되는 판인데 갑자기 대사가 끊겼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요셉은 대본에 없는 호소를 더욱 구슬프게 울먹이며 늘어놓았다. 한참 동안 요셉을 바라보던 여관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울음이 듬뿍 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빈방 있어요. 들어와요. 후울쩍."



작년 성탄절은 이미 까마득하고, 음력 12월 25일로부터도 스무날 넘게 흐른 마당에 성탄절 연극 이야기를 굳이 끄집어내는 것은 현실과 연극을 헛갈리는 통에 연극을 망쳤으되 그 어떤 공연보다도 더 크고 값진 감동을 선사했던 ‘여관주인’ 아이와 얼핏 겹쳐지는 후배 PD의 사연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몇 달 전 녀석은 온 가족의 구박 속에 집을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할머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집에서 재워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걸로 알아라."는 며느리의 호령에 할머니는 아파트 놀이터를 전전하기 일쑤였고 빗방울이 떨어져 집으로 들어갔다가 "누가 좋아한다고 집에 들어오느냐?"는 날선 질문에 등을 떠밀리기도 했다. 나이 89세의 할머니는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후배 PD의 임무는 이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일 만큼 가엾은 모습을 영상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즉 어디까지나 그는 손에 든 몰래카메라의 뷰파인더 안에 할머니의 모습을 잡아 둔 채, 할머니의 고통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우직하기로 정평이 있는 녀석답게 후배 PD는 할머니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고 대화하며 할머니의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가쁜 숨결을 낱낱이 담아냈다. 이윽고 거리를 헤매던 할머니가 체력이 다하여 주저앉아 버렸을 때는 무척 냉정하게 할머니의 지친 몸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할머니에게 다가섰다. "힘들어 보이시는데 제가 도와 드릴까요?"




적절한 개입이다. 부축해 드리면서 "왜 가만히 보고 있느냐?"는 시청자들의 힐난을 모면하되 할머니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애석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가방 카메라를 들고 바싹 접근한 그가 수행해야 할 지상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배가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제가 업어서 모셔다 드릴까요?"



나는 다른 PD가 그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줄 알았다. 제작진이 든든하게 할머니를 업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아름다운 그림이 등장할 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없었다. 끙차 소리와 함께 할머니는 후배가 들고 있던 가방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에서 사라졌다. 할머니의 지팡이가 후배의 다리 앞에서 덜렁거렸고 후배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땅바닥을 두들길 뿐이었다. 어느 새 녀석은 촬영 따위 걷어치우고 할머니를 업어드리는데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내가 영문을 캐물었을 때 녀석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제 할머니 같아서요. 그냥 이 그림 못 쓴다고 생각하고......"




피사체를 외면한 카메라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녀석이 "못 쓴다고 생각한" 그림은 여과없이 방송을 탔다. 투덕투덕 로버트처럼 움직이던 녀석의 둔중한 다리는 세상 없는 카메라 감독이 촬영한 영상보다도 더 아름다웠고, 맥없이 흔들리던 할머니의 지팡이는 다른 어떤 비참한 모습보다도 할머니의 애처로움을 잘 드러내 주고 있었으며, 못내 미안했던 할머니가 내려 달라고 하자 "아니에요 끝까지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되받던 그의 오디오는 그 어떤 성우의 나레이션보다도 찰지고 매끄럽게 귀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못 쓰는" 그림 아닌 프로그램 역사를 통틀어 손꼽힐만한 명장면을 뽑아냈다. 눈앞에서 울먹이는 요셉을 긍휼히 여긴 나머지 깜박 처지를 망각해 버린 어느 소년의 따뜻한 실수처럼, 시청자들은 물론 잘난체하며 후배들의 카메라 앵글에 흰눈을 뜨고 앉았던 선배 모두에게 적잖은 감동과 뿌듯함을 선사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