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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


딴지일보 편집부의 출근 시간은 10시다. 널럴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만 시간은 늘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던가. 애초에 10시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니치라는 멀고 먼 영국 땅의 천문대를 기준으로 9시간 빠르게 셈하기 시작해 정해진 것이다. 그러니 9시인지 10시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딴지그룹 내에서는 가장 빠른 출근 시간이란 게 중요하다. 


왜 다른 언론사들의 출근시간과 비교하지 않느냐고? 비교를 위해서는 기준을 잘 잡아야 한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는 경도 0의 좌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 시간의 기준점으로 유효하다. 언론사 출근시간도 마찬가지다. 민족정론지로 공인 받은 이곳 딴지가 아니라면 그 어느 언론사가 출근 시간의 기준을 제시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해서 10시라는 출근시간에 이질감을 느끼셨다면 '딴지일보가 다른 데보다 늦게 출근하네'가 아니라 '다른 데가 딴지일보보다 뺑이 돌리네'라고 발상을 전환하셔야 옳겠다. 이는 새벽, 오전, 오후 교대로 사람을 돌려도 본지의 위상을 따라오지 못하는 조선, 동아, 중앙 등의 현실만 봐도 자명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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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본지의 황색성을 따라잡고자 새벽마다 올려대던 중앙일보의 트윗. 

요즘은 이런 트윗이 뜸해졌다. 새벽조 근무환경이 좋지 못한 게 아닌가 의심된다.


아무리 특별하고 모범적이라 한들, 이제는 일상이라 할 수 있는 출근 시간 10시. 이에 대해 장광썰을 풀어댄 이유는 어제(2016년 1월 19일) 10시에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출근 시간이라기 보다 출근하고 자리에 앉아 언제나처럼 딴지일보 수뇌부의 명석한 두뇌로 어제 벌어진 지구 상 대소사의 파급효과를 예측하고 본지의 개입 여부를 의사 결정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려는 차 (물론 중간중간 자게를 하며 월급 루팡짓사이트 이용자들의 관심사를 공유해 참된 소통의 모범을 보이던 차) 아래 게시물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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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jpg' - 8할이발줌🎗




2. 승


그렇다. 우리의 설현. 그녀가 새 광고를 찍었다는 소식을 담고 있는 게시물이었다. 그 최종 결과물은 아래와 같았다. 


SKT-SOL-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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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평소 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한 나의 두뇌는 놀라운 속도로 이 두 장의 사진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전망하기 시작했다. 


어린 여성 아이돌을 혹한과 바닷가 칼바람 앞에 노출시킨 광고제작사의 만행으로 인해 소라넷 이후로 잦아드는가 싶던 여혐 이슈가 다시 점화되고 메갈리아와 일베 간의 전면전을 촉발시켜 전세계 디도스 트래픽이 대한민국으로 집중되도록 만들면서 IT산업 지형의 변화를 야기시키지는 않을지. 아니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값싼 노동력을 동원해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한 해당 휴대폰의 만듦새로 보아 해당 광고가 제조국으로 역수출될 가능성도 높아보이는 바, 래쉬가드라는 빌어먹을 유행을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키며 기나긴 비치 패션의 암흑기를 도래케 하진 않을지.


여러 시나리오를 뽑아보고는 각각의 실현 가능성까지 계산을 마치려던 찰나, 갑자기 우측 하단에 자리 잡은 휴대폰 자체가 얼마나 화제성을 불러 일으킬만한 제품인지를 계산에 넣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음을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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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장의 사진은 skt의 새 중저가폰 sol(왼쪽)을 광고하기 위한 것.

루나(오른쪽)의 후속작이지만 AP는 전작의 스냅드래곤 801보다 낮은 사양의

스냅드래곤 615가 쓰였으며 램도 3GB에서 2GB로 줄었다고 한다.


아니, 전작보다 더 스펙이 낮아진 폰을 광고하는 데에 우리의 설현을 불러내어 국제 정세를 안개 속으로 밀어넣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추워 디지겠는데 그녀를 저런 복장으로 해변에 세운 것도, 기왕 찍는 거 과감하게 비키니 탑으로 가지 않고 래쉬가드로 애매하게 타협본 것도 다 저 휴대폰이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증오가 깊어지면 상대를 부정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하던가. 나도 모르게, 위 이미지에서 저 폰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3. 전전전전전...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고 말씀하신 분이 있다. 많은 이들이 '우주'를 'space'의 의미로 이해하고 비웃었지만 평소 그 분의 혀가 다른 이 보다 중후하여 대본 없이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우주라는 단어의 뜻을 space로 한정시키기보다는 '삼라만상을 포함하는 모든 것'으로 확장시켜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당연히 그 우주 안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인간 자체가 소우주라고 불리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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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 사진 이거 핸드폰 지울 수 있는 분 있나여 ㄷㄷㄷㄷ' -그런디


우주에 맹세컨데 나는 게시판 이용자들을 향해 위와 같은 게시물을 올려달라 청탁한 바가 없으며 저 휴대폰을 지워야 한다며 선동을 꾀한 바도 없다. 


그저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위 사진들 이대로는 안 된다! 세계 평화를 지켜야 한다! 왜 지켜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더라도 전체 사진을 보면 세계 평화에 안 좋을 거라는, 그런 기운이 왔을 것이다. 최소한 어린 여성을 착취한 혹은 래쉬가드 따위를 입힌 주체라도 가려서 1차적으로 야기될 소모적인 분쟁에 우리의 설현에게 간접적 피해(광고주의 입금 지연이라든가...)가 갈 가능성이라도 차단해야 한다고.


그러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정도를 넘어 쌍방울을 다는 수준의 고난도 작업이 될 것임도 모두 알고 있을 터. 누가 선뜻 나설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20여 분의 정적이 흘렀고... 한 용자가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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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매트홈매트♪ 님의 작품


아...


이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나는 어째서 딴지일보 자유게시판 이용자들이 '무릎을 탁 쳤다'는 표현 대신 '부랄을 탁 쳤다'는 표현을 쓰는 걸까, 의아해하던 사람이었음을 고백한다. 해당 표현을 보면 


'위험하게 그걸 왜 쳐!' 


하면서 나도 모르게 신체 주요 기관을 보호하기 위해 사지를 웅크리는 동물적 본능에 잠식 당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너무도 신박하고 절묘해서 자신이 치는 게 무릎인지 부랄인지 알지도 못 하는 경지! 바로 이것이었다. 특히 휴대폰을 가려낸 이미지가 하필 제2롯데월드 쌓을 때나 동원될 법한 거대 건설중기라는 데에서 당 이용자가 던지는 메시지를 주목할 만했다. 


대한민국은 IT 강국임과 동시에 건설 강국이다. 이에 MB가카께서 정보통신부를 해체하시고 예산을 건설 쪽에 몰아주시는 등 두 산업간의 밸런스 조정에 심혈을 기울이신 바 있는 걸 모두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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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민들의 집값 상승 욕망을 이용해 덩치를 불린 산업이라 그런지 건설은 IT만큼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자연스레 건설업계는 음지화 되고 지하 경제로 편입되는 자본도 상당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 지하 경제의 규모가 커질 수록 고통 받는 것은 청년, 그 중에서도 여성이다. 위 이미지는 휴대폰의 자리에 건설의 메타포를 위치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성 착취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 그 근원을 생각해보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징의 복잡단성으로 인해 범인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한계는 극복될 필요가 있어보였다. 어려운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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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사진 핸드폰 삭제' - 유니세프


어떤 이는 머리를 부여 잡고 고민하다 지친 나머지 그냥 잘라 쓰자는 타협안을 제시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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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설현 사진' - VRay


어떤 이는 정석대로 휴대폰만 지우는 척, 해당 영역을 비워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바톤을 넘겼다. 


이렇게 '복잡 다단한 상징의 한계 극복'이라는 숙제는 세계 7대 수학난제 중 2002년 풀려버린 '푸앵카레 추측'의 공석을 채워 나머지 6개의 미해결 난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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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水 님의 작품


온통 새로운 상징만을 찾아내서 사람들을 웃기고자, 아니, 일깨워주고자 골몰하던 사람들에게 발상을 전환해보라, 일갈을 날리는 게시물이었다. 작품 밑에 '응답하라 1988'이라는 텍스트를 배치했다는 단서는 최근 종영된 인기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의미하는 바가 단지 그뿐일까?


어쩌면 우리 질문부터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누가' 나쁜 놈인가가 아니라 '언제'가 나쁜 짓을 하기 좋은 시기였나, 일지도 모른다. 


과거, 우리는 이토록 노골적인 여성혐오와 래쉬가드 따위를 경험하였던가? 쉽게 답할 수 없다. 물론, 래쉬가드는 입지 않았겠지만 88년은 치마 길이까지 재어가며 여성들의 아름다울 권리를 침해하던 군사정권이 수명을 다하나 싶던 차에 노태우가 덜컥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한 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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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여러 국민들이 느낀 좌절감, 특히 대선에서 진 김영삼이 느낀 좌절감으로 인해 훗날 3당 대통합이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새누리당이 정치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음은 굳이 상기시켜 드릴 필요도 없겠다. 


그렇게 한 유저에 의해 이루어진 발상의 전환은 더 큰 파도를 일으킨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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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세페♥별 님의 작품


'최신폰으로 교체했다'는 멘트와 함께 올린 위 작품, 모두가 생각하시는 그거 맞다. 시대 역행을 풍자하고 있는 거다. 


여기서 잠깐 최초의 1인이 다시 등장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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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매트홈매트♪ 님의 망작


아마도 건설업계를 겨냥했던 자신의 메세지와 다른 방향으로 대세가 기우는 데서 초조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2000년대 초반 등장한 개죽이는 시대의 어둠을 상징한다 보기엔 무리가 있고 개가 여성을 착취하는 주체 또한 될 수 없는 노릇이니 해석 가능한 바는 역시 미디어 자본이 프로그램 하나 쉽게 찍자고 할 때 많이 도입한다는 3B 코드겠다. 


미녀 Beauty, 동물 Beast, 아기 Baby


그러나 Baby가 빠져있어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우리의 설현이 서핑 보드 대신 귀여운 아이를 안고 있었다면 한 번 더 부랄을 탁 치며 미디어 자본의 안일함을 개탄했을지 모르지만, 이 게시물은 조용히 묻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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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다복창세번(미개즤) 님의 작품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위 작품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림판으로 지웠는데 티 안 나게 하려고 사진을 줄였다'는 첨언이 진실인지 훼이크인지, 만약 훼이크라면 우리가 지우려는 휴대폰이 없다면 설현은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뼈 아픈 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광고주가 없다면 모델도 없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이 비밀스런 메시지를 읽어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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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금몬❄️ 님의 작품


한 게시판 이용자는 위와 같이 일부러 티나게 휴대폰을 지움으로써 광고주를 부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 없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도발에 자극 받은 다른 이용자들은 


광고주의 흔적을 깨끗이 지울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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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 사진 핸드폰' -딴지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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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김에 설현 다른 사진도' -V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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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 핸드폰 지운거 이걸로 쓰세요~' -조카크레빠쓰18색이야


광고주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왜곡해보이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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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의 이미지에 묻혀버린 기업의 이미지를 통해 광고주의 한계를 표현해 보인 지지짓 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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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네이밍의 담배로 휴대폰 이미지를 대체하여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강조해 보인 💗뀽💋 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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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하나로 커리어가 망가진 특정 연예인을 배치함으로써 기업이라도 한 방에 훅 갈 수 있음을 시사해보인 끝순네 님의 작품


그리고 🎗잠금몬❄️이라는 이용자의 메시지에 동조해 광고주를 부정하려는 시도를 비웃는 무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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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보드 보다 잘 어울린다는 멘트로 결국 광고는 광고임을 지적한 재아♥아빠 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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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동일한 아이디어였으나 조금 늦게 올려 빛이 바랜 PETER/7D™ 님의 작품


삼분되기에 이르렀다. 




4. 결론은 설현


이 분열이 


비키니 대신 래쉬 가드를 입힌 데에 따른 증오 때문이었는지


추운 날씨에 다소 부족한 제품 때문에 어린 여자 아이돌의 노동력이 착취 당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 집어치우고 걍 설현이 예쁜데 괜히 옆에 꼽싸리 낀 물건이 있어서였는지 


는 어느덧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분명한 건 설현의 사진으로 인해 최초 국제 정세가 급변할 것임을 예견한 나의 우려가 딴지일보 게시판에서부터 현실화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 하나뿐.


그러나 분열의 때에도 냉철하게 상황을 주시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고자 일어서는 영웅들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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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세페♥별 님의 작품


'몬생긴 애가 있어서 같이 지웠다'는 말로 어그로는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딴지일보 게시판에 엄슴한 분열의 기운을 날리려 한 1인의 희생정신에 화답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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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냐옹^ 님의 작품


분열 후 인재 영입에 골몰하며 어려움을 겪는 한 야당의 리더를 보여줌으로써 분열의 끝이 험난함을 암시하고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작품까지 등장하니, 사람들은 조금씩 자중하며 국제 정세를 걱정하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사건은 그렇게 수습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결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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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유네 님의 작품


대화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시가 있다. 


한 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작자의 친일 행각은 차치하자. 어쨌든 우리는 이 한 장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던 게 아닐까 싶은 지금의 감상에 충실하고 싶으니까. 


나는 왜 그리 부정적이었던가. 국제 정세의 급변을 예방하고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될 요소를 부정하고 지워버리려만 했지, 그것을 통해 새로운 화합의 기운을 만들어 볼 생각은 왜 하지 않았던가. 


어려운 때가 지나면 광명이 온다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지구 어딘가, 내가 모르는 사람이 직면한 고통을 '아, 그거 어쩌면 발전을 위한 과정일지도 몰라'하고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사상 초유의 딴지 게시판 뽀샵 대전의 끝에 서 있던 설현이 너무 눈부셨다는 거. 그래서 평온을 느꼈다는 거. 살다보면 그거면 충분한 순간도 있다는 거. 


지금은 이 깨달음만 곱씹어볼까 한다. 





딴지일보 퍼그맨

트위터 : @ddanzipugman

Profile
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