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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과 전문의이고 세부분야는 심장질환입니다. 당연히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리봉동 닥터P님의 글을 읽고, 짧은 식견으로나마 반론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 이 글에서 칭하는 '의학'은 서양의학을 의미합니다.

** 본 글을 보시기 전에 가리봉동 닥터P님의 [의학잡담]한의사 의료기 논쟁, 나도 썰 한번 풀어본다 를 꼭 먼저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1. 한의학은 과학(科學, Science)이 아니라 철학(哲學, philosophy)이다.


본인이 십수 년 전 의과대학 본과 1학년 때에 수강한 강의 중에 하나가 '한의학 개론'이었습니다. 한의학과 교수님께서 한의학의 기초와 전반을 겉핥기식으로 진행하는 강의였는데, 비록 겉핥기식이긴 하지만 한의학의 핵심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던 과목이었지요. 그 교수님의 말씀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엔 과학이 뭔지 철학이 뭔지 구체적이고 명확한 개념 정립은 안 되어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명제에 대하여 납득 하지 못할 님들도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때 그 교수님이 한의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계신지 모르고 그 분의 강의 내용이 모든 한의학계에서 공통으로 인정받는 정설이 아닐 수도 있기에, 본 필자 역시 그 명제를 100퍼센트 그대로 믿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그 교수님께서 이 명제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면 되는 것이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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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가구가 아니고,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다.


이 명제에 포함된 과학의 개념은 '체계적ㆍ이론적인 지식의 체계'로서의 과학(넓은 의미의 과학)이 아니라 '인류가 경험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하여 실험을 통해 얻어낸 지식'으로서의 과학(좁은 의미의 과학)입니다. 따라서 다분히 귀납적인 연구 방법을 취하고 있는 학문 체계를 '과학'으로 칭하였던 것인데, 이에 반하여 철학의 개념은 연역적인 연구 방법을 취하는 학문 체계를 뜻합니다. 이 명제를 풀어서 설명하면, 의학은 주로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끌어내는 귀납적 연구 방법을 취하는 데에 반하여 한의학은 '음양오행'이라는 대 원리에서 연역적으로 다른 이론을 끌어내는 방법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에서 연역적 사고가 없는 것이 아니고 한의학에서도 귀납적 사고가 전혀 없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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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법 vs 연역법


이러한 연구 방법론의 차이로 인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의학은 (한의학과 비교하여)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내과 의사들이 가장 많이 보는 텍스트인 "Harrison's Principle of Internal Medicine"이라는 책의 서문에 있는 유명한 문장이 "Medicine is an ever-changing science."라는 문장입니다. 말 그대로 의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학이라는 것이지요. 질환이 발생하는 기전과 진단법, 그리고 치료법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연구 결과에 의하여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고 심지어는 기존의 지식이 부정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의학 교과서는 2~4년마다 새로운 버전이 출판되고 그때마다 해당과 의사들은 매번 교과서를 새로 사서 봐야 하며 끊임없이 보수 교육을 통해서 업데이트된 지식을 습득해야 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 의사는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경험 많은 의사들이 항상 명의가 아닐 수 있고, 임상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의사라고 해도 지식이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명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한의학은 애초에 연역적인 방법으로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학문이기에, 음양오행과 같은 '대원리'가 새롭게 도입되지 않는 한 지평이 확대되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에서 귀납적인 연구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이 조금씩 추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의학보다 그 속도가 빠르지 않고 지평이 확대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뭐 한의사 샘들이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으나, 본인 생각으로는 이거 진짜 맞다고 봅니다) '동의보감'은 언제나 '동의보감'일 뿐 '동의보감 18th edition'은 없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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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 무려 19판.ㄷㄷㄷ 


한편, 가리봉동 닥터P께서 과민성 대장증후군의 한약재 연구와 관련해서 제시한 실험-대조군 연구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런 게 한의학을 하는 방식입니다. 적어도 한의사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한의학의 개념도 그렇습니다."라고 주장하셨는데, 이건 스스로 한의학의 학문체계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발언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정확히 말해 한의학의 연구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의학계에서 의학 연구 방법을 차용한 것이라 표현해야지요. 그렇다고 본인이 한의학계에서 의학 연구 방법을 차용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학문은 연역-귀납 연구가 반복되고 돌고 돌면서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근데 말이죠. 한의사 샘들이 일부 질환에서 의학 연구 방법을 차용한다고 해서, 다양한 질환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환을 분류하는 체계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2. 한의학의 질환 분류 체계와 의학의 질환 분류 체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열분들 '수족탄탄(手足癱瘓)'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으신가요? 한의학의 질환 명인데 '한쪽 또는 양쪽의 손발이 마비된 상태'를 의미하고 쉬운 말로 이른바 중풍이라고도 하고, 단일한 질환군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한방 치료는 여러 환자들이 비슷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수족탄탄에 상응하는 '의학'의 질환은 뇌졸중(Stroke)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발생 기전에 따라 '뇌경색'과 '뇌출혈'로 나누어집니다. 쉽게 설명한다면, 뇌경색은 뇌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병이고 뇌출혈은 뇌혈관이 터져서 생기는 병으로, 발생 기전이 완전히 다르고 치료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지요. 이에 반해서 한의학적 뇌졸중인 수족탄탄은 원인이 뇌출혈이건 뇌경색이건 진단명이 같고, 치료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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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의학은 질환을 발생 기전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증상군'에 따라서 질환을 분류하고 있고 의학은 질환을 발생 기전에 따라서 분류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한의학'의 질환과 '의학'의 질환이 일대일로 상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수밖에 없어요. 간혹 지금까지 한의학적 분류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에 의학의 질환 명칭을 빌려 올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한의학의 기본 원리에 맞지는 않는 것이지요. 과민성 대장 증후군, 역류성 식도염 등 이런 질환들은 애초에 한의학적인 질환 명이 아닌 겁니다. 


* 예로 든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란 병은 의학 분야에서도 연구학기가 쉽지 않은 질환이고 질환의 기전도 복잡하고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치료도 대증요법(증상만 치료)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기에 한의학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으리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질환들은 실제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질환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르고 질환을 분류하는 체계도 다른 판국에, 진단하는 검사법만을 차용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3. 역류성 식도염? 진짜루?


가리봉동 닥터P님께서 역류성 식도염을 예로 드셨는데, 솔직히 한의사 샘들에 대해 가장 우려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이 질환입니다. 역류성 식도염의 증상은 님께서 소개한 것처럼 '흉골 뒤에 타는 듯한 증상'입니다. 의학에서는 'heart burn'이라고 표현하는데, 근데 이거 협심증 증상과 분간이 안 돼요. 이러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만나게 되면 내과 의사인 나는 일단은 자세한 문진을 한 뒤에 심전도, 운동부하 심전도 검사, 심근관류 SPECT 등의 검사를 해서 '안정형 협심증'이라는 질환을 충분히 배제한 후에 상부위장관 내시경을 할 겁니다. (24시간 pH 검사는 연구 목적이 아니면, 요즘 거의 안 하는 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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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 저한테 협심증 진단받고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받은 환자 한 분의 경우 몇 달 동안 한의원에서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얘기 듣고 한약 드시다가 진단이 늦어진 케이스였지요. 혹자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한의사가 내시경 검사를 해서 역류성 식도염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줘야쥐!"


근데 말이에요. 노인 분들이나, 술, 커피 많이 마시는 젊은 사람들 내시경 검사 해보면 위염, 식도염 소견이 엄청 자주 나타나는데 대개는 증상도 별로 없어요. 비슷한 염증 소견인데 어떤 환자는 증상이 있고, 또 어떤 환자는 증상이 없는 경우도 있구요. 내시경 소견만 가지고 속 쓰린 증상의 원인이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확진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환자가 내시경 검사상 식도염 소견이 있다고 해도 흉통의 원인이 식도염이라 확신하거나 협심증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심지어는 역류성 식도염과 협심증이 공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듯 어떠한 검사의 결과를 해석(interpretation)하는 것은 단순한 게 아닙니다. 그 검사 결과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고 다른 추가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질환을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검사 결과를 해석하는 것도 포괄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죠. '의학'의 체계에서 훌륭한 의사는 환자의 한 가지 증상을 보고 족집게처럼 한 가지 질환만을 집어내는 의사가 아니라, 한 가지 증상을 접했을 때 가장 가능성 높은 질환 한 가지를 선택하고 그 외에 감별해야 할 질환을 많이 생각해내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입니다. 검사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질환을 한가지로 좁혀나가는 수단인 것이지요. 


요약한다면, 한의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의학의 영역에 속하는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질환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포괄적 검사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며, 검사 결과를 해석(interpretation)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과 전문의 된 지 5년 째인 본 필자도 입원한 제 환자들 검사 결과를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하물며 '의학 교과서' 들춰보면서 '의학 질환'을 책으로만 공부한 한의사 샘들께서 과연... 


잘 하실 수 있을까요?


한의학적으로 환자에게 접근했다면 한의학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계를 인정하고 '의학'의 영역으로 환자를 온전히 맡겨 주시길. 아니면 최소한 의견이라도 구하시던가.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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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esperan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