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5. 26. 화요일

beautician









‘제임스 갠돌피니(James Gandolfini)’라는 헐리웃 배우가 있었습니다.



k-bigpic.jpg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그는 사뭇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가졌음에도 표정과 덩치 덕분인지 늘 마피아 같은 악역으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에게 최고의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것 역시 HBO에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마피아 시리즈물 <The Sopranos>의 마피아 보스 역할이었습니다.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지만 이태리 혈통이었던 그에게 마피아 문화는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게 중후한 연기를 펼치던 그는 안타깝게도 2013년 6월 로마를 방문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1961년생이었던 제임스 갠돌피니는 30대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고, 1993년 영화 <The Ramance>에서 여성을 구타하는 악역으로 등장하며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를 스타덤에 올린 영화는 1994년 한국에서는 <터미널 스피드>라는 이름으로 개봉됐던 <Terminal Velocity>입니다.


갠돌피니는 영화 초반에 신경질적으로 초조해 하는 겁 많은 보험조사원으로 등장해, 주인공 찰리 쉰이 연루된 낙하산 추락사고를 조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주인공인 나스타샤 킨스키를 죽이기 위해 찾아온 잔혹한 러시아 악당이지요. 갠돌피니는 영화 후반부에 악당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갠돌피니는 벤 핑크워터(Ben Pinkwater)라는 절대 악당일 수 없는 예쁜 이름으로 나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인생을 배우는 것은 좀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케빈 스페이시가 그랬던 것처럼 갠돌피니는 극중 반전을 통해 첫인상과 겉모습, 그 말과 행동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진실입니다. 보이는 모습, 들리는 이야기만이 그 전부를, 그 진실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미드 <X-File>의 포스터 카피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진실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뿐, 그 진면목은 늘 숨어있기 마련이니까요. 심지어 그 맨얼굴을 드러낸 후에도 다시 그 모습을 덮어버리고 사람들 뇌리에서 잊히기 위해 온갖 노력과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촉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연예인들의 결혼설, 열애설, 결별설이 신문지상을 뒤덮을 때마다 뭔가 중요한 것이 덮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할 것입니다.


물론 evasion, 즉, 회피의 백미는 그 화려함에 있습니다.



20121208032039_24_1.jpg



전투기들은 꼬리까지 따라잡은 열추적 지대공미사일을 뿌리치기 위해 창공에 수많은 백린 디코이(편집자 주- decoy, 유인탄)들을 흩뿌리며, 몸부림을 치고, 잠수함을 감지한 함대가 서로 부딪히기라도 할 듯 미친 듯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엄청난 회피기동을 하는 동안 구축함들이 투하한 폭뢰들이 높은 물기둥도 일으키고요.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최근에 보았던 화려한 백린 디코이와 가공할 폭뢰 물기둥 쇼들은 세월호 정국을 비교적 완강히 돌파해 나갈 수 있도록 했던 유병언 일가의 추격과 유병언 백골의 출현이었고,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서 터져 나온 성완종 사면책임론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근대사에서 가장 빛을 발했던 정치적 회피기동의 예로, 1980년 광주사태 당시 투입되었던 공수부대들의 만행을 간첩들과 북한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호도했던 당시 정권과 언론들의 무식하고도 무모한 협잡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30121021150644(0).JPG



또 다른 예로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파렴치한 정권이 명지대생 강경대 씨를 때려죽이면서 촉발된 전국적 반정부시위와 분신투쟁정국에서, 마지막으로 분신했던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유서를 조작·대필했다며 그 친구 강기훈 씨를 기소했던 일이죠. 오히려 정부에서 운동권을 친구의 자살을 유도하고 이용하는 파렴치한 진영으로 몰아세우며 그 사태를 돌파했었습니다. 강기훈 씨는 25년이 지난 후에야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아냈지만, 그의 유린당한 인생은 보상받을 길이 없고, 가해자였던 당시 정권과 아직도 현직에서 서슬 퍼런 위세를 떨치는 사법부 관계자들은 여전히 사과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6.25 때의 노근리 사건이나 일제의 위안부 문제 같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무작정 부인하고 덮으려는 무식한 방법보다 디코이를 흩뿌려 시선과 관심을 분산시키는 방법은 그 기술적 측면에서 가산점을 줘야 할 것입니다. 물론 좋은 시도였지만 본체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아 아직도 미사일이 따라 붙고 있는 사안들은 착지실패로 간주해 분명히 감점이 붙을 것이고요.


그렇다면 최근 정권들을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회피기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최고의 가산점을 받을만한 사건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사건일 것입니다. 당시 국정원장 원세훈이 법정구속되고 전 사이버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연제욱 소장, 옥도경 준장 등 기라성 같은 군장성들이 같은 혐의로 기소당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를 받아 기정사실화 되어버린 사안이 어떻게 ‘성공적 회피기동’일 수 있냐고요? 그건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혐의가 ‘댓글활동’으로만 한정되었던 것 같다는 인상을 확고하게 심어놓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분명 성공한 작전이었습니다.



%EC%9B%90%EC%84%B8%ED%9B%88.jpg



잘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국정원의 기본 업무와 기능은 무엇일까요? 영화 <킹스맨>이나 <베를린>에서 보듯 정보기관의 업무란 기본적으로 ‘정보수집’과 ‘공작’입니다. 사이버공간에 남긴 무수한 댓글은 개인의 일탈이라는 턱도 없는 변명은 못들은 걸로 치고, 그렇게 수많은 관련 사이트들의 동향과 추이를 사명감을 가지고 철저히 감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깨달은 ‘숨겨진 능력’ 같은 것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원세훈의 선거법위반 법정구속이 시사하는 바는 그가 국정원장으로서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박근혜가 당선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정보와 첩보를 축적하고 있는 정보기관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공작수행을 할 수 있겠죠. 근데 굳건한 의지를 가진 어떤 요직의 인사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정말 양심적이고 인간적으로 ‘우린 공작 이런 거 하지 말고 오로지 댓글이나 열심히 달면서 나름대로 정권창출에 이바지합시다’라고 했을까요? 그건 순진한 생각이죠.


한편 사이버사령부의 기능은 상식적으로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군전산망을 보호·방어하고, 산하부대나 관련단체 혹은 개인의 인터넷활동을 추적·감시하고, 필요하다면 적의 전산망을 해킹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댓글을 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해 정말 대선개입을 댓글로만 했다면 사이버사령부에 컴퓨터공학 전공자나 IT, 프로그램 전공자들이 아닌, 국문학과 출신들을 대거 데려왔겠죠.



23276_45521_4831.jpg 

(출처- 시사in)



그런데 2014년에 나왔던 연제욱과 옥도경 전임사령관들의 혐의와 그 판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원세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당시 대선결과에 영향을 끼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부대를 운영했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반증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이버 감시와 해킹이 가능한, 그것도 일반 단체도 아닌 군부대를 거느린 장군들이 부하들에게 댓글이나 달라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선에 간여했을까요? 선관위 서버를 해킹하면 결과도 얼마든지 조작해 원하는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분명한 방법과 목표가 있고, 딴지일보 같이 불온한 단체들을 만나 맘만 먹으면 해킹해서 서버를 다운시킬 수 있는 능력도 가졌고, 날고기는 유능한 장군들이 지휘하던 정예부대가 오로지 댓글이나 달았겠냐는 말입니다.


국정원이나 사이버사령부가 그 위치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책임자의 직위와 충정으로 보나, 댓글보다 훨씬 더한 것을 얼마든지 하고도 남았으리란 정황이 보이는데 사법부는 그들의 대선개입을 ‘댓글활동’에만 한정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유죄나 그 비스무리한 것으로 판결을 내리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2012년 대선 당시 공작·감시·첩보수집·해킹 등 모든 가용한 방법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오직 댓글로만 대선개입을 한 것으로 모든 국민이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수장들이 비교적 유죄 또는 그에 가까운 판결을 받음으로써 기정사실화 해버리고만 것입니다.


철저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보수진영에선 여전히 절대 인정하지 않을 일이지만, 위에서와 같이 그간 사법부의 일련의 판결에 따르면 최소한 이명박 정권의 정보기관과 일부 군부대가 대선에 개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로, 사법처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고작 ‘댓글’이라는 시덥잖은 방법을 통한 것이니 그게 불법이라곤 하나 박근혜 당선에 과연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까요? 비록 그로 인해 ‘댓통령’이란 오명을 임기 내내 달고 다니게 되었지만, ‘고작 그 정도의 댓글로 인해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걸 정권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 선거법위반 조사와 사법처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말이죠.


하지만 사활이 달린 문제를 대충대충 설렁설렁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을 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국정원장과 사이버부대 사령관들 역시 모르긴 몰라도 머리에 쥐가 나도록 모든 애국심을 짜내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국정원장도 되고 견장에 별도 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최선은 분명 댓글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당시 대선개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동원할 수 있는 기관이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만이 아니었을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당시 정권 전체가 최대출력으로 가동하며 박근혜의 대선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력을 다했고 결국 그 소기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후에 댓글조작 부분 하나를 고육지책으로 떼어 주면서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을 덮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유추일지 모릅니다.


댓글사건을 들켜버린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바보 같은 모습은 갠돌피니가 연기한 <터미널스피드>의 보험조사원 벤 핑크워터처럼 바보스럽고 어수룩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가 반전을 통해 악당의 진면목을 보였던 것처럼 그 바보스럽고 어수룩한 표정 뒤엔 국민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바보로 만들어버리고 킬킬거리는 사악한 미소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언젠가 이 모든 일들의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올까요? 그게 그리 쉽지 않을 것이란 측면에서,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9.8점 드리겠습니다






beautician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