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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狂氣)의 시작




"...어떤 나라에게나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는 사활적인 문제가 있는데, 일본에게는 바로 만주문제가 일본인의 생사가 달려있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이다."



1933년 2월 24일 일본의 전권대표였던 마쓰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는 이 말을 남기고 국제연맹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다. 태평양 전쟁...아니,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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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탈퇴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이 연달아 국제연맹을 탈퇴했고, 국제연맹은 유명무실해 졌다. 국제연맹 회원국들은 일본을 비난하며 날 선 비판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어떤 실효성 있는 제재 조치를 내릴 수 없었기에 구호뿐으로 끝났을 뿐이다. 세계는 일본을 통해 국제연맹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확인하게 됐고, 이는 곧 국제연맹의 붕괴로 이어지게 됐다.


태생부터가 반쪽이었던 국제연맹은 결국 그 생명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어째서 세계 강국들이 일본의 돌출 행동을 용인 했는가?”



라는 의문이다. 국제연맹이야 허울뿐인 조직이라지만, 전통의 강호 영국과 새로운 강자 미국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힘이 빠졌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제법 헛기침을 하던 프랑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당시 세계는 대공황의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에, 자국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바빴다. 일본은 그렇게 공공의 적이 됐다. 그 동안의 일본은 '돌출행동'을 하는 말 안 듣는 사춘기 소년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인 '패륜아'의 모습으로 각인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과 일본을 바라보는 나라들 간의 '감정적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전 세계에서 '원숭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키 작은 동양인, 개항 이후 미친 듯이 서양의 문물을 흉내 내 베끼기 바빴던 존재.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이런 시선을 알고 있기에 '인종주의 철폐'를 외쳤다.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을 합병 했어도 전 세계는 일본을 '원숭이'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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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말미의 1944년까지도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일본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탈아입구(脱亜入欧)를 말하며, 서양을 쫓았고 그 덕분에 힘을 기르고, 그 힘을 증명해 보였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동양인'이었다. 지금도 인종차별의 잔재가 남아 있지만, 그 당시에 이건 하나의 '학문'이며, 거스를 수 없는 '진리'였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고 나서 유럽 사회는 충격 속에 휩싸였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원숭이를 조상으로 한 유인원이라는 사실. 인간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과학을 사회과학 쪽으로 차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사회적 다위니즘"



18~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기였다. 근대과학과 산업혁명의 힘을 획득한 서구열강들은 너나할 거 없이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문제는 그 명분과 정의였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약자를 수탈하는 그들의 행동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이때 나온 것이 다위니즘의 사회적 해석이었다.


“적자생존이다. 강자가 된 유럽의 백인들은 그 존재 자체가 우등한 인종이란 게 증명 됐다. 우월한 인종인 백인이 열등 인종인 황인과 흑인을 지배하고, 이들을 교화하는 건 사회적 책무이다.”


<종의 기원>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이다. 문제는 일본은 이런 사회적 다위니즘의 기준에서는 예외적인 돌연변이란 것이다. 동양인 주제에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근대의 힘을 획득해 서구 열강의 대표주자였던 러시아를 이겼다. 러-일 전쟁의 승리 이후 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들이 열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본 역시 자신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시아를 떠나 서양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아무리 애써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내세운 탈아입구의 논리가 근대화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그들만의 리그인 국제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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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피해의식의 상당부분은 스스로가 자초한 부분이지만, 어쨌든 일본은 자신의 길을 찾으려 했다. 아니,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서구권이 주축이 된 국제연맹과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일본은 언제나 소수였고(혼자였고), 경제, 군사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지만, 언제나 졸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이 지난 세기 수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온당한 것이고,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에 올라서는 건 어째서 반대하는 것인가?"


일본은 항변했지만, 이건 당연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독점적인 이권이 보장돼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텃세도 감내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은 열등인종으로 분류되던 동양인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만주사변 이후로 태평양 전쟁까지 일본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와 마주쳤다.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본이란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택했다.


국제사회의 '왕따'가 된 건 어쩌면 일본 스스로 자초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국제사회, 아니 서구열강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일본은 그들만의 새로운 논리를 들고 나오게 된다.


"서양 중심의 국제 질서에 언제까지 끌려 다닐 순 없다. 아시아로 회귀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범아시아주의(Pan-Asianism), 흥아론(興亞論)의 재평가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시아 각국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호응을 얻은(우리나라의 김옥균도 포함된다) 이 이론은 일본 단독으로 서구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중국, 조선과 연대해 서양세력에 대항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脱亜論)의 대항마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편집자 주 - 탈아론은 "값싼 인종주의나 동정주의에 연연하지 말고, 서구 열강의 문명 제국과 벗하여 일본을 문명화하고 서구 열강의 방식에 따라 아시아를 침략하자"는 것인 반면, 흥아론은 "같은 문자를 쓰고 인종이 같은 아시아 민족이 일본을 맹주로 대동 단결하여 서구 열강을 아시아에서 물리쳐 부흥시키자"는 주장이다.


선샤인 지식노트, 2008. 4. 25.,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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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흥아론이 탈아론과 야합해 내놓은 자식이 그 유명한 『대동아 공영권』이다. 그리고 이 대동아 공영권을 떠받들던 사상이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팔굉일우(八紘一宇)다.


팔굉일우(八紘一宇)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사상으로써, 여기서 팔방(八紘)은 팔방의 세계. 즉, 전 세계를 뜻한다. 일우(一宇)는 하나의 집이란 뜻이다. 이를 합치면, 전 세계는 하나의 집이라는 나름 좋은 말인 듯하지만, 여기에 주어를 넣으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바로 ‘천황’이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총리의 시정 방침 연설을 들어보자.


"황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


천황을 위해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들자. 즉, 천황을 위해 세계정복을 하자는 뜻이 된다. 동시대의 히틀러와 쌍벽을 이루는 원대한 포부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같은 해 7월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기본 국책 요강’을 결정하는데,


"황국을 핵심으로 일본, 중국, 만주를 강고히 결합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한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이 팔굉일우 사상을 자세히 풀어보자면, 팔굉. 즉, 전 세계의 중심은 천황이고, 천황이 사는 일본이다. 그렇기에 일본 신민은 다른 국가의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즉, 원래 세상은 천황과 천황이 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과 같은 서구권이 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구원해 내야 하는 책무가 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이 논리의 결과는,


"아시아 제국은 일본의 질서 회복 노력에 감사해야 한다."


라는 황당한 결론까지 나아가게 된다. 일본이 내세운 전쟁논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생각이 사상을 만들고, 사상이 신념을 만들고 신념은 광기를 만들어 낸다.


1933년 국제연맹의 탈퇴 이후 일본은 잘못된 사상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이 잘못된 사상이 일본의 수뇌부들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제국의 지도하에 일본, 만주, 지나(중국) 3국의 제휴 공조를 통해 동양의 항구적 평화와 나아가 세계평화 증지에 공헌한다."


1933년 10월 수상(총리), 외상, 대장상, 육군상, 해군상의 5상(相)회의에서 나온 방침이다. 일본의 총리, 외무장관, 경제장관, 육군장관, 해군장관이 일본의 ‘파시즘’을 국가 정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세계로부터 왕따를 당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왕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그들이 말하는 제휴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행보는 바빠졌다.


"동아시아 문제는 서양 열강의 입장 및 사명과 다를 수 있다."


5상 회의 이후 반년이 지난 1934년 4월 17일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성명이다. 성명의 내용을 해석해 보자면, 동아시아에 대한 서구 열강의 개입과 간섭을 배제한다는 선언이었다. 국제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이는 아시아의 먼로주의다!"



먼로주의. 미국의 다섯 번째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주창한 이 외교정책은 한 마디로 말해 신세계(미국과 아메리카)에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며, 동시에 미국 역시 유럽의 기존 식민지나 정부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먼로주의는 미국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신생 국가로서 대외정책에 힘을 쏟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동시에 복잡다단한 유럽의 정치상황에 섣불리 개입했다가 국가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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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그렇게 고립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 먼로주의가 200여년 동안 지속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미국 외교 사상 가장 길게 지속된 외교입장이 먼로주의였다. 이렇게 보면, 국제정치학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먼로주의 덕분에 미국은 중남미의 외교적 사안에 끼어들게 됐고, 현재까지 남아메리카 문제에 간섭하게 되는 문화적, 역사적 토대가 돼 준다.


그런데, 이제 일본이 그 길을 걸으려 하는 것이다.


재미난 사실은 스스로 먼로주의를 주창했고, 제임스 먼로 이래로 고립주의를 고수했던 미국이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러-일 전쟁 전후로 해서 그때까지 미국은 만주와 중국을 계속 눈독 들여왔다. 그런데, 일본이 먼로주의를 흉내 내며 자신들의 진출을 막아 서려 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것이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회,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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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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