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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배기 딸내미를 키우다 보니 한 4년 동안 동요는 지겹도록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창작동요제 노래가 꽤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창작동요제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1. MBC 창작동요제의 시작


창작동요제 하면 사실 MBC창작동요제를 일컫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MBC창작동요제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이다. 


MBC창작동요제의 시작은 1983년이다. 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안정기에 오르고, '정치 빼곤 맘껏 놀아봐'라는 3S 정책이 시작되면서 프로스포츠가 출범할 때와 궤를 같이한다. 1983년 5월 5일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제1회 MBC창작동요제가 열렸다. 최우수(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50만 원과 문교부 장관상이 주어졌다. 솔직히 당시 방송영상을 보면 기획자들도 큰 기대를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어린이날에 '애들도 애들 정서에 맞게 볼 게 있어야지'라는 측면에서 간신히 구색을 맞춰서 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MBC창작동요제는 1회부터 대박 픽을 뽑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에서 올라온 이수지 양이 부른 최우수상작 <새싹들이다>가 대박을 친 것이다. 



1회의 성공에 놀라서일까? 2회부터 창작동요제(귀찮으니 MBC빼고 그냥 창작동요제라고 하겠다)는 무조건 생방으로 바뀌고, 심사위원도 점차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2회에서도 역시 동요사에 남을 명곡인 <노을>이 최우수상을 타면서 창작동요제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2. MBC창작동요제의 전성기


3회 대회부터 장소를 변경했다. 이건희 옹의(지금 살아는 계시는지) 냄새가 물씬 묻어나는 호암아트홀에서 성대하게 개최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간도 5월 5일 어린이날 저녁 6시 황금시간대에 최대 2시간에 걸쳐 생중계하는 파격 편성을 보였다. 사회자의 '급'도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아나운서에 이수만, 이문세, 최수종, 이휘재 등 1980~9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진행을 맡았다. 이런 기조는 창작동요제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전폭적인 지원에 부응하듯 창작동요제에서는 대박 곡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명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내 귀에 익숙한 노래로는 종이접기(4회 대상), 연날리기(7회 대상) 같은 노래가 있다. 들어보면 '아'하고 알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시 어린이들의 가창력도 상당했다. 지금처럼 노래방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생목으로 노래를 불러서 그런가 발성이 매우 안정적이다. 물론 긴장해서 흐트러지는 어린이도 있지만. 아래 영상은 전혜윤 양이 부른 8회 창작동요제 대상곡 <봄>이다. 굉장히 안정적인 가창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성대가 큰 어른 보다 상대적으로 고음역대룰 쉽게 낼 수 있다는 특징 덕도 봤을 듯하다. 2010년 마지막 창작동요제 때 사회자로 나온 가수 아이유의 경우, 나름 아이돌 중에서는 가창력이 있다고 하지만 예상보다 높은 어린이들의 고음에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창작동요제의 '최전성기'를 언제로 꼽을 수 있을지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당시 지금처럼 정교한 시청률 집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짐작이라도 해보자면 1991년 제9회 창작동요제가 최고 전성기 아닐까 싶다. 당시 인기상과 금상을 받은 노래는 지금도 창작동요제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아기 염소>다. 무려 아기 염소를 누르고 대상을 차지한 노래는 <하늘나라 동화>다. 참고로 이 두 노래는 2003년 MBC에서 창작동요제 20주년을 기념한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한국인이 즐겨부르는 동요' 1위(하늘나라 동화), 3위(아기염소)를 차지했다. 




아기 염소를 부른 이 아이는 훗날 자라서 박은주 MBC 아나운서가 된다. (당시 사회자는 김은주 MBC 아나운서다.) 지금은 아나운서 스쿨 강사를 하고 있다. 대상작 <하늘나라 동화>를 부른 국은선 씨는 해외에서 소프라노를 전공한 성악인이 됐다. 제1회 창작동요제 최우수상 <새싹들이다>를 부른 이수지 씨는 주부로 살고 있다고 들었다. 


창작동요제는 사회자뿐 아니라 심사위원단의 면면도 화려했다. 우리가 알 만한 이름만 따져봐도 2회 엄정행, 11회 조용필, 12회 김창완, 13회 최불암, 15회 임웅균(성악가)·손숙 등 당대 문예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을 꼭 한두 명씩 초청했다. 심사위원 명단 중에는 노랫말 전문 심사위원이 늘 1명은 있었다. 그래서인지 창작동요제 노랫말은 참 예뻤다. 거의 한자와 영어를 쓰지 않고 순 우리말로 가사를 만들었다. 




3. 창작동요제의 쇠퇴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창작동요제는 점차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 그 기점은 바로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서태지 이후 전혀 대중가요에 관심을 안 가지던 시골 친구들도 대중가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예상됐던 일이다.


내 전공인 역사 얘기로 잠시 돌리자면 1950년대 후반부터 동요보급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 어린이들의 마음을 달래주자. 뭐 대강 이런 취지로 시작했고, 또 한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말 잘듣는(데모질 안 하는)' 아이로 만들고 싶은 독재정권의 욕심도 함께 있었으리라. 


아무튼 가곡을 편곡해서 보급하거나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같은 정권의 의도가 물씬 느껴지는 동요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텔레비전이었다. TV 시대가 오면, 특히 컬러 TV 시대가 오면 아이들은 화려한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대중문화에 편입돼 버릴 테고 동요는 죽을 것이다. 이런 우려가 1970년대부터 나왔다.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는 창작동요제가 멋지게 '방어'를 해줬지만 이젠 그 한계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다고 단번에 창작동요제의 위상이 추락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여전히 전국에서 200~300팀 예심을 통해 치열한 경쟁 끝에 본선에 올라왔으며, 황금시간대 생중계되는 등 표면적으로는 위상이 여전했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동요도 계속 쏟아져 나왔다. 


13회 창작동요제 인기상 수상작 <예쁜 아기곰> 


(찾아보니 영상이 없음)


14회 창작동요제 은상 수상작 <아기 다람쥐 또미>



14회 창작동요제 대상 수상작 <네 잎 클로버>



개인적으로 가장 '잔인한' 동요라고 생각되는 <아빠 힘내세요>도 창작동요제 출신이다. 1997년 5월 5일 15회 창작동요제에서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15개 팀 중에 반은 상을 받고 반은 못 받는다). 그런데 곧이어 터진 IMF 외환위기 이후 CF송으로 이름을 날리며 부활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미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에 초등학생도 완전히 편입된 상태였고, 유선·케이블방송·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볼거리도 많아졌다. 창작동요제 수상곡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방송을 타는 일도 극히 적어졌다. 또한 이선희나 조용필 같이 동요에 관심을 둔 가수들의 활동도 적어졌다. 2001년 19회 창작동요제 때는 건희 옹의 품을 벗어나 다시 1회 창작동요제가 열렸던 '소박한'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으로 장소가 옮겨졌으며, 2002년부터는 서울을 벗어나 지역이나 대학교에서 대회를 열었다. 창작동요제 쇠퇴기에 그나마 이름을 알린 곡이 있다면 2007년(25회) <참 좋은 말>이 있을 것이다. 김해 경운초등학교 1학년인 강윤 양이 불렀다. 



2006년(24회)에는 금강산 온정각 야외무대에서 창작동요제가 열렸다. 당시 대상 팀은 한반도기를 율동으로 흔들며 통일을 노래했다. 아마 지금 이랬다면 종북 논란으로 나라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불과 10년 전에 우리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24회 창작동요제 대상 수상작 <그날을 위해>



2008년(26회) 때부터는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열려 더욱 입지가 좁아졌으며 이미 24회 때부터 녹화중계로 전환됐고 본선에 올라오는 팀도 10개 팀으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방송시간도 1시간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심사위원들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0년 28회 창작동요제를 끝으로 숱한 추억을 뒤로하고 MBC창작동요제는 막을 내렸다. 물론 KBS에서는 자체적으로 창작동요제를 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는 울산MBC에서 진행하는 '서덕출 창작동요제'를 전국에 송출하면서 창작동요제의 명맥은 어렵사리 이어지고 있다.




4. 아마추어리즘의 몰락


내가 문화 전공이 아니라서 뭐라 정확하게 짚을 재주는 없지만, 창작동요제와 비슷한 궤적을 그린 것이 있다. MBC강변가요제, MBC대학가요제가 그것이다. 1980~1990년대 초반까지는 상당한 영향력과 인기를 누렸지만 역시 아이돌 시대가 열리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는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며 강변가요제는 2001년 막을 내렸고, 대학가요제도 2012년 사실상 폐지됐다. 


이런 표현이 적확할 지 모르겠지만 '기획사 시스템을 업지 않고 이제 아마추어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음악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경로가 차단'된 것이라 생각된다. 가끔 슈퍼스타K 같은 등용문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철저히 기획사 틀 안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창작동요제는 이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동요가 가지는 위상과 영향력은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늘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미 3~4살 때 동요를 거의 마스터 한 우리 딸내미를 볼 때, 초등학교 2~3학년만 되어도 동요를 듣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에 근 20여 곡 넘게 창작동요제 출신 곡이 수록돼 있지만 수업시간 외에는 흥얼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창작동요제는 '추억'이다. 지나간 과거는 다시 오지 않는다. 더구나 동요가 사람들의 입에 정기적으로 오르내릴 일도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거대한 공습에 맞서 잠시 동안이라도 우리 아이들의 정서를 지켜온 창작동요제의 가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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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