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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용소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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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지난 대선 때, 유시민 작가는 이재명 후보에게 이 책을 추천하며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했다.

 

“인간이 비참함을 견디는 방법”

 

 

5,000만 명을 굴라크에 처넣은 스탈린의 공포정치 

 

1848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칼 마르크스의 변혁 이론이 69년 후 실제로 러시아라는 거대하고 낙후된 나라의 체제를 바꾸었다. 1917년 2월, 러시아는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가능한 것인지, 인류 역사 내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던 불평등과 억압은 과연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드디어 중대한 실험이 현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제정 러시아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혁명을 주도했던 레닌은 사망했다.

 

조지아 출신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이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사회주의 이상의 실현이라는 거대한 실험은 출발부터 실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혁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혁명의 배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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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레닌(좌)과 스탈린(우)

 

스탈린의 목표는 사회주의의 정착이 아니라 자신의 절대권력 확립이었으며 그가 손에 쥔 무기는 민중의 지지가 아니라 공포였다. 그는 ‘대숙청’의 이름으로 9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비밀경찰 ‘NKVD(소련 내무인민위원회)’와 강제노동수용소 ‘굴라크’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이 겁 많고 변덕스러운 ‘조지아의 인간백정’ 치하에서 무려 5,000만 명가량의 러시아 민중들이 굴라크로 끌려가야 했다. 

 

굴라크는 주로 ‘시베리아’ 같은 극악의 환경 조건을 가진 지역에 만들어져 자원 채취, 지역 개발 사업 등의 노동에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투입했다. 수감자들은 한 끼 200g 정도의 빵과 무엇을 끓였는지 모를 국 한 사발 정도만을 제공받으며 중노동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병들거나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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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며 ‘수용소의 하루’를 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실제로 1945-1953년 굴라크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수용소의 하루’는 이때의 생활을 소재로 쓴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반역죄로 강제노동수용소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사실 그의 진짜 죄는 반역이 아니고 주변머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독소 전쟁에 투입된 다른 러시아 농민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탄약도 없는 총을 들고 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이 순박한 러시아인은 모든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죽은 말의 말발굽을 칼로 깎아 각질 부분을 물에 불려 먹으며 버티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틀 만에 운 좋게 탈출했고, 소련군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저 길을 잃었다고 했으면 됐을 것을...... 안타깝게도 주변머리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10년간의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제 팔 년을 채웠다. 

 

“자네한테 내린 이십오 년의 형기를 자꾸 세려고 하지 마! 이십오 년을 살지 어떨지는 아무도 몰라. 확실한 건 내가 꼬박 팔 년을 살았다는 것뿐이야!”

 

 

아침 : 아팠지만, 그다지 운이 없진 않은 기분

 

“이봐,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의 법칙이라는 거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가는 놈이 있다면(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는 놈들이고,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놈들, 그리고 정보부원들을 찾아다니는 놈들이야.”

 

새벽 다섯 시,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슈호프는 잠에서 깼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수용소의 하루가 또 시작된 것이다. 수용소 생활 때문에 걸린 영양실조로 슈호프는 나이 마흔에 벌써 이빨들이 반이 빠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추위였다. 추위는 죽음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용소는 추위 때문에 온도계의 수은주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바람막이를 설치해야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또한 영하 사십일 도 아래로 떨어져야만 비로소 작업이 중단되는 곳이다. 슈호프는 쓰레기로 버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헌 담요, 덧옷 발싸개 등을 정성스레 몸에 걸쳤다. 다 낡아빠진 것이지만 그것들이 그의 목숨을 유지시켜줄 것이었다. 

 

그는 꾀병을 부려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몸이 너무 좋지 않았다. 꼭 의무실에 가야 했다.

 

혹한이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슈호프를 엄습해서 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온은 영하 이십칠 도였고, 슈호프는 열이 삼십칠 점 이 도였다. 자, 이젠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

 

살려면 이겨내야 했다. 슈호프는 몸 상태 때문에 늦게 일어난 죄로 아침을 먹기 전 간수실 물청소를 해야 했다. 덕분에 유일한 장점인 따뜻함마저 사라진 야채 수프 속의 썩은 생선을 뼈와 대가리까지 꼭꼭 씹어 먹고 의무실로 갔다. 

 

그러나 작업면제는 글렀다. 작업 면제는 최대 하루 두 사람에게만 허용되었고 그 둘은 이미 선정된 후였다. 그리고 몸의 열은 사십 도를 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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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中

 

그러나 슈호프는 오늘 운이 그다지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작업반장인 ‘추린’의 수완 덕분에 몸을 녹일 수조차 없는 ‘사회주의 생활단지’ 작업이 ‘벽돌쌓기’ 작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반장은 절인 돼지비계 1키로그램 정도는 뇌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부반장 ‘파블로’가 막사에서 지급받지 못한 자신의 아침 식사 빵을 챙겨줬다. 운이 그다지 나쁘진 않다고 달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슈호프는 빵을 반으로 잘라 한 조각은 점심 식사 때 먹을 요량으로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조각은 자신의 톱밥 매트 속에 소중히 넣고 실로 꿰맸다. 이러면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는 23명의 반원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향했다.

 

 

점심 : 한 그릇 더 얻은 귀리죽의 행복

 

수용소의 규칙은 사람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는 물건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 추위에 수용소의 경호병들은 기어코 작업 나가는 수감자들의 옷을 벗기고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수용소 밖에 있는 작업장으로 가기 때문에 옷 속에 자유민들을 통해 몰래 보낼 편지 같은 것들을 찾는다는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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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슈호프는 속옷까지 스며든 한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등짝이 시려 머릿속은 온통 묵직한 담요만 떠올랐다. 그러나 또다시 참아야 했다. 수색에 항의하던 같은 반원 ‘부이노프스키’는 ‘중영창 열흘’의 징계를 받지 않았던가. 물론 징계는 저녁에 집행된다. 하루종일 부려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 할당을 받기 위해 반장을 기다리는 동안 슈호프는 가슴 주머니에 넣어 뒀던 아침 식사 빵을 조금씩 뜯어 먹었다. 아끼고 아껴 조금씩 먹었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갇혀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죄수들은 생각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슈호프는 이제 마누라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며 ‘내년 계획’ 또는 ‘가족 생계 걱정’ 등이 아주 사라져버렸다. 가끔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고향에서 배불리 먹던 일이었다.

 

프라이팬에 구운 감자를 몇 개씩이나 먹어 치우던 일이며, 야채를 넣어 끓인 죽을 냄비째 먹던 일,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제법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먹었던 때도 있었고, 게다가 배가 터지도록 우유를 마셔대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벽돌을 쌓기 위한 작업 준비를 하는 동안 그럭저럭 오전이 지나갔다. 군복무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루하루 생각 없이 시키는 것을 하다 보면 하루가 참 빠르게 지나간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는 빨라도 전체 복무기간은 느리게 느리게 지나간다는 것이다. 제대하는 날은 꿈속에서나 존재하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수용소의 생활이 그와 같았다.

 

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이 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닌 슈호프지만, 형기는 왜 그리 더디게 지나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난로 하나와 그 위에 놓인 큰 솥 하나가 전부인 작업장 식당에는 모두 열한 개 반이 배정되었고 한 번에 두 반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더구나 그릇은 오십 개가 미처 안 되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먹고 난 그릇을 재빨리 씻어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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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中

 

강추위 속에서 마냥 기다리지 않으려면 치열한 눈치 싸움과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더군다나 오늘 죽은 귀리죽이었다. 보통 풀죽이나 멀건 보리죽이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낟알도 제법 섞여 있는 귀리죽이었다. 먹고 나면 배가 제법 든든할 것이었다. 두 그릇을 먹을 수만 있다면......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었다.

 

슈호프가 속해 있는 제104반의 차례가 돌아오자 슈호프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허술하게 보이는 두 놈을 쫓아내고, 때로는 양해를 구해가며 죽그릇을 확보했다. 취사부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 바쁜 와중에 슈호프는 슬그머니 두 개의 죽그릇을 더 내밀었고 의심하는 취사부를 배짱으로 응대했다. 슈호프는 성공했다. 

 

죽 두 그릇을 더 받았다. 슈호프는 기대감에 들떴다. 자기 덕분에 죽을 두 그릇이나 횡령했으니 최소한 한 그릇은 자기 몫으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슈호프는 일부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부반장 파블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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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호프의 생각은 적중했다. 부반장 파블로가 슈호프에게 죽 한 그릇을 더 배분했다. 그 순간 슈호프는 심장이 다 멈춰버릴 것 같았다. 슈호프는 거의 경건할 정도의 자세로 온 신경을 귀리죽 먹는 것에 집중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그리고 이때를 위해 오전에 남겨둔 빵 껍질을 꺼냈다. 그것으로 그릇 밑바닥과 옆구리를 싹싹 긁고 나서, 혀끝으로 핥은 다음 빵 껍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죽 그릇은 물로 씻은 것처럼 깨끗해졌다. 귀리죽이 주는 행복감이 기분 좋게 밀려왔다.

 

슈호프는 어릴 적에 말에게 귀리를 먹이고는 했다. 그때만 해도 슈호프 자신이 이런 몇 숟가락의 귀리죽에 어쩔 줄 모르고 행복에 겨워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죽을 수도 있는 노동을 하기 위해 끌려온 수용소 사람들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노동은 잠시나마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노동이란 어쩌면 그들의 인생이 존재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힘겨운 일에는 온몸의 근육이 동원되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 주고 노동의 성과물에 대한 자부심은 저절로 온 신경을 집중하게 한다. 보통 노동하는 사람들은 천대받지만 적어도 땀 흘려 일하는 동안만큼은 노동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이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게 한다. 

 

반장이 벽돌 쌓기를 맡았고 부반장이 모르타르를 맡았다. 슈호프는 반장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 밑에서 모르타르를 개어 2층으로 올려주면 반장네들이 그것으로 벽돌을 쌓는 것이다. 일은 힘들었고 벽돌을 가지런히 튼튼하게 쌓으려면 온 정신을 다 해 정성을 들여야 했다. 

 

특히 추위 때문에 모르타르가 얼어버리지 않도록 빠르게 빠르게 일을 해야 했다. 잠시 손이라도 녹이려 하다가는 금세 얼어버려 벽돌을 깨고 얼은 모르타르를 긁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철근을 용접하러 가는 녀석들이며, 수리공장 건물에 마루를 얹으려고 가는 죄수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빠른 속도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반장은 연신 아래를 향해 ‘모르타르!’ 하고 외쳐댔다. 슈호프도 덩달아 빨리 모르타르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이제 슈호프와 다른 벽돌공들은 추위를 잊었다. 고된 노동이 몸을 뜨겁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강추위 속에서도 몸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보온용 덧옷과 겉옷, 그리고 위아래 속옷까지 모두 땀에 젖었다. 강하게 부는 바람조차도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슈호프는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잿빛 안개 속으로 붉은빛이 점차 사그라져가고 있다. 오늘은 더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일을 해냈다.

 

 

저녁 : 아부한 대가로 얻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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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로 돌아가는 저녁 시간, 슈호프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오늘 주운 줄칼 토막을 들키지 않고 몰래 들여가는 것이었다. 잘 갈아서 작은 칼이라도 만들면 신발을 고치거나 바느질을 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고쳐주면 짭짤하게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다. 

 

만약 들킨다면 영창 생활 십여 일은 따놓은 당상이다. 슈호프는 영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수용소의 영창을 슈호프가 속한 104반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벽이 돌로 되어 있고 마루는 시멘트이며 창문은 없었다. 그 어떤 온기도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열흘! 이곳 중영창에서 열흘을 살고 나면, 이미 그의 건강은 평생을 두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십중팔구는 결핵에 걸려 다시는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중영창을 십오 일 살게 되면, 이미 그 기한이 끝나기도 전에 축축한 땅에 묻히고 없을 것이다.

 

수용소 입소를 위해 강추위 속에서 사백 명이 넘는 죄수들의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슈호프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기온은 더욱 떨어졌다. 달은 더 높이 떠올랐고 온통 새하얗게 눈에 덮인 밤은 한층 더 추워졌다. 저녁 시간은 수용소에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는 것이 최고였다. 전쟁처럼 치열한 과정 없이 저녁으로 제공되는 뜨거운 양배춧국을 마셔 얼린 몸을 녹일 수 있었고, 만약 소포라도 왔다면 앞줄에 서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를 받는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덜덜 떨면서 자신의 신체검사 차례가 올 때까지 온갖 욕을 해댔을 터이나 오늘은 줄칼을 숨기고 있던 때문인지 금세 슈호프의 차례가 된 것 같았다. 슈호프는 줄칼을 장갑 속에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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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 검사장의 우두머리가 빨리 끝마치고 싶었던지 경호병 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다음은 기계공장대 대기해!”

  

그러자 흰수염의 간수는 두 번씩이나 장갑을 쥐어보는 수고를 피하고, 한 손을 휘젓는 것이었다. 지나가라는 신호다. 그는 무사히 통과했다.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한 슈호프의 다음 목표는 조금이라도 빨리 ‘소포 인도소’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보내주는 소포를 받는 과정은 꽤나 까다로웠다. 소포를 검사하는 간수들은 소포를 뜯어 그 속의 내용물들을 일일이 검사했다. 혹여 과자나 소시지, 훈제 생선 같은 먹을거리들이 들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이 먼저 먹어보고 주었다. 만약 불평이라도 했다가는 금지된 품목이라며 안 주면 그만이었다. 

 

물론 무사히 소포를 받으면 일단 간수들에게 얼마간이라도 조금씩 나눠줘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저녁 식사 배식을 놓칠 수도 있었다.

 

슈호프는 소포 인도소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감옥 옆을 지나고 막사 사이를 지나 쏜살같이 달려갔다. 슈호프가 소포 인도소에 가는 이유는 자신의 소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슈호프에게는 올 소포가 없었다. 같은 반 반원인 ‘체자리’의 소포를 받아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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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곳을 경험해보지 못 한 사람들은 수용소야말로 안 좋은 의미이지만 평등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곳만큼 빈부격차가 두드러지는 곳도 없다. 체자리는 예술가였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감독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는 높은 사람에게 찍혀서 이곳으로 왔다. 

 

그에게는 소포가 자주 왔고 그는 소포 속 내용물들을 뇌물로 활용하여 추운 외부 작업에서도 빠졌다. 체자리는 모자도 수용소에서 지급하는 모자가 아닌 질 좋은 민간용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체자리는 대화도 아무하고나 하지 않았으며, 수용소에서 제공하는 쓰레기 같은 음식도 거의 손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소포의 힘이었다. 

 

슈호프가 체자리의 소포 줄을 대신 서 주는 것은 수고비조로 떨어지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소포가 오지 않았다면 뒷줄의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순번을 팔면 그만이었다. 슈호프의 예상대로 체자리의 소포는 와 있었고, 체자리는 저녁으로 제공되는 자기 몫의 양배춧국을 슈호프에게 주었다.

 

자기 반 반원들이 아직 식사 배급받지 못했기를 바라며 슈호프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슈호프의 바람대로 104반은 아직 배급을 받지 못했으나 식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저녁 양배춧국은 오직 하나, 뜨거운 맛으로 먹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추위에 시달린 터라 뜨거운 국물은 몸을 녹이고 잠을 청하는 데에는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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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앞에 줄 선 죄수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배급을 받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그 와중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로 막혀 있는 식당 계단참은 누군가를 위해 비켜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뒤쪽의 죄수들은 앞의 죄수들을 위쪽으로 마구 밀어댔고, 마치 고지전을 벌이듯 계단을 하나하나 점령해가며 식당 문을 향해 육박해갔다. 앞에 선 죄수들도 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들도 기회만 있으면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맥이 빠지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이 모든 것은 양배춧국 한 대접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한 그릇의 양배춧국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막사로 돌아온 슈호프의 눈에 체자리의 소포가 들어왔다. 슈호프는 번개 같은 눈과 예민한 후각으로 내용물들을 확인했다. 그것은 소시지, 연유, 훈제 생선, 염장한 돼지비계, 향기 좋은 건빵, 비스킷, 고형 설탕 덩어리, 크림, 궐련 그리고 살담배 등이었다. 물론 확인되지 않는 다른 것들도 있었다. 

 

체자리는 싱글벙글 미소를 띄우며 슈호프에게 양배춧국에 이어 그가 대신 타 온 자기 몫의 저녁 빵까지 가지라고 했다. 슈호프는 침대 속에 감춰둔 빵과 방금 체자리가 준 이백 그램의 빵을 생각하며 그 풍성함에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 

 

104반의 반장 추린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유능하고 성실한 군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부농이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쫓겨났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오전 신체검사에 항의하다 영창 10일을 명령받은 ‘부이노프스키’를 어떻게든 하룻밤이라도 막사에서 재우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런 그를 보며 슈호프는 취침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체자리의 소포자루를 안전하게 보관해 주겠다는 제의를 통해 다시 비스킷 두 개와 설탕 두 덩어리, 그리고 소시지 한 개를 추가로 받은 터였다. 

 

 

하루를 마치며

 

슈호프는 톱받 침대에 누워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젠 고향 쳄게뇨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과연 자기가 자유를 바라고 있긴 한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단지 살아야 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됐다. 남들이 오늘 죽을 때, 자신은 내일 죽는 것이 목표다. 나무 옷(관)을 입지 않고 이곳을 나가는 것이 목표다. 슈호프는 침대에 누워 체자리에게 얻은 소시지를 한입 물었다. 향긋한 고깃물, 진짜 고깃물이 입 안에 녹아든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였다. 아니 오히려 운이 좋은 하루였다. 비록 몸은 좋지 않았지만 늦게 일어났다고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허허벌판에서 일해야 하는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점심때는 취사반을 속여 귀리죽 한 그릇을 더 먹었고 반장과 나름 즐겁게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가져왔고 체자리로부터 얻은 것도 많았다. 슈호프는 때 묻은 얇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흡족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참한 인생을 견디는 방법

 

인생의 비극은 앞이 아닌 뒤로 다가온다. 그것은 소리 없이 나타나 예고 없이 나를 덮친다. 비극 앞에서 내 인생은 힘없이 무너진다. 희망 없는 절망의 삶이 무의미하게 반복되고 그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조차 힘에 버겁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느낄 때도 있을 수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가 겪어야 하는 수용소의 삶이 바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삶의 모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죄로 지배권력에 의해 내동댕이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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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비극이 스탈린 치하의 슈호프뿐만이 아닌 오늘날의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 자신할 수는 없다. 지배 권력이든 혹은 운이라고는 새끼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내 운명 때문이든 누구나 다가올 수 있는 비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만약 어느 날 내가 내 뜻이 아닌 남의 지시를 반복해서 따라야 살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죽그릇을 핥으면서라도 살아야 한다면, 나는 과연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견뎌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용소 내의 죄수들이 모두 새우등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반면에, 이 노인은 유독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니, 의자에 뭘 기대고 앉은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다.

 

그는 끝이 다 닳은 나무 수저로 건더기도 없는 국물을 단정한 모습으로 먹는다. 다른 죄수들처럼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딱딱한 빵을 먹고 있다.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딘가 당당한 빛이 있다.

 

수용소 내에서도 가장 오래 있었다는 노인의 식사 모습이다. 단 한 번의 특사도 없이, 오히려 십 년의 형기가 끝나면 또다시 십 년의 형기가 추가되어 지금까지 살았다는 노인의 모습이다. 단순한 묘사이지만 이 노인의 식사 모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동을 우리에게 준다. 어쩌면 이 감동이 우리가 찾고 있는 ‘비참한 인생을 견디는 방법’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인간다움’이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농부들은 지독한 흉년 속에서도 다음 해 봄에 뿌릴 씨앗을 먹지 않는다.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도 마지막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비참한 인생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임을 수십 년의 세월을 수용소에서 보내고 있는 저 꼿꼿한 노인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희망도 없다.”

 

이 말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청각장애자인 어머니와 가난에 힘겨워했고, 그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와 폐결핵까지 앓아야 했으나 끝내는 44세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의 충고이다. 카뮈의 충고를 음미하며 열 번째 인생 탐구를 마무리한다.

 

 

유시민 작가가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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