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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아론(興亞論), 팔굉일우(八紘一宇),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서양을 쫓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전략 대신, 아시아를 규합해 서구 제국주의와 싸우겠다는 전략을 들고 나온다. 이제 일본은 전 세계의 ‘문제아’가 되었고, 당장 미국의 눈초리가 달라졌다.


국제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험악해져 갔다. 일본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을 ‘전쟁’이라는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일본 해군은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는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1934년 런던군축조약을 파기했으며, 세계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 시리즈 건조에 착수한다.


해군이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전력 확충에 들어가는 사이, 육군은 ‘중국침략’의 포석을 놓기 시작했다. 1935년 일본 육군은 만주국의 군사적 안전을 위해 중국에게 몇 가지를 요구한다.


“만주의 평화를 위해서 중국과는 상호 이해 아래 서로간의 입장 차를 좁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한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사항이다.”


그 ‘요구’는 주권국가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요구사항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 만리장성 이남 지역의 비무장화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의 군 주둔 금지조항'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중국이란 주권국가의 영토에 만주라는 괴뢰정부를 만든 것도 모자라 만리장성 이남 지역을 비무장화 시켜 서로간의 ‘평화’를 찾자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주권침해다.


둘째, 반일운동의 금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들이 침략해 멀쩡한 중국 영토에 괴뢰정부를 만들었음에도 자신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금지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셋째,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


1935년 11월, 일본 육군은 화북 지역에(퉁저우를 수도로 했다) ‘기동방공자치정부(冀東防共自治政府)’라는 또 다른 괴뢰국을 세운다. 허베이 지방의 중국 제22군의 관리자였던 은여경(殷汝耕)이 자신의 담당 지역을 뚝 떼어 자치정부를 세우고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독립 즉시 일본과 경제 군사 조약을 맺은 것을 보면 이게 괴뢰국가란 걸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만주의 안정을 위해 탄구 평화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세운 만주국과 중국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만주국의 군사적 안정을 유지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괴뢰정부’를 하나 더 만들어버린 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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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방공자치정부(冀東防共自治政府) 청사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이 어째서 일본의 침략을 용인했냐는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일본을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당시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장개석은 봉천의 장학량(張學良)에게 급하게 명령을 내린다.


‘부저항(不抵抗) 전술’


한 마디로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말고 동북군(東北軍)을 철수 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중화민국의 합법적 정부를 자처했지만, 통치권이 미치는 곳은 고작 장강(양자강) 하류 지역이었다. 남경(南京)을 수도로 했다는 것만 봐도 국민당 정부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군이 손 놓고 앉아 있었던 건 아니었다. 중일전쟁 발발 전(前) 장개석은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장비, 훈련, 편제에서 떨어지는 중국군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일군의 장비로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식 사단 편제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려고 했다(프로이센 이래로 독일병정의 실력과 이미지는 전 세계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부대가 ‘독일식 사단(德械師)’이다. 독일군이 쓰는 장비를 들고, 독일식 훈련을 받은 병사를, 독일식 편제로 묶은 부대로, 사람만 중국인일 뿐 독일군을 100% 받아들인 부대였다. 우리 기억 속에 있는 중일전쟁, 국공내전 당시의 국민당군은 ‘오합지졸’로 남아있지만(당나라 군대란 말이 더 적확하겠지만), 이 독일식 사단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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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사단인 88사단의 병사들


1937년 7월 7일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전면전을 선포하고, 7월이 끝나기 전에 베이징과 텐진(天津)시를 함락시킨다. 8월에는 중국 최대의 도시였던 상하이를 공격한다(제2차 상하이 사변, 상하이 전투라 불린다). 이때까지의 일본군 수뇌부들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중국대륙을 3개월 이내에 완전히 장악하겠다.”


그러던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에서 전혀 다른 ‘중국군’을 만난다. 독일식 장비와 훈련을 받은 ‘제88사단’이었다. 88사단은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장악하겠다는 일본군을 상하이에서 3개월 동안이나 머무르게 했다. 8월에 시작된 전투의 승패 향방은 11월에야 결판지을 수 있었다. 상하이에 상륙한 일본군 앞에는 88사단이 건설한 벙커 밭이 기다리고 있었고, 88사단은 벙커와 참호선을 베개 삼아 착실하게 일본군을 죽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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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의 기관총 진지


88사단의 분전은 일선의 일본군 병사들뿐만 아니라 일본군 수뇌부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굴욕감을 안겨줬다. 일본군은 총 한방만 쏘면 모래알처럼 흩어지던 당나라 군대가 아니라 ‘진짜 중국군’을 상대로 한 최초의 전투에서 약 8만 명의 사상자를 내야 했다. 물론 중국군 사상자 수는 일본군 사상자 수의 두 배나 됐지만, 개돼지 취급을 했던 중국군이 압도적인 장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탱크의 경우 300:16, 항공기의 경우는 500:200), 이만한 사상자를 냈다는 건 일본군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분노와 굴욕감은 이후 ‘난징 대학살’의 원인이 됐다.


장개석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독일식 사단은 중일전쟁 발발 직전 겨우(!) 8개뿐이었다. 장개석은 이런 독일식 사단이 60개는 있어야 일본과 전쟁을 해볼만 하다고 판단해 군비확충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 금쪽같은 부대(장개석은 이들을 자신의 직속부대로 편제했다)가 이름값을 한 덕분에 일본군은 점점 늪으로 빠져든다.


이 대목에서 ‘중일전쟁의 실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중일 전쟁은,


“부패한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에게 패배하는 사이, 모택동이 이끄는 팔로군이 끈질기게 일본군을 물어뜯은 전쟁”


이라고 각인 돼 있다. 중국 공산당은 팔로군이 일본군의 90%를 상대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진실은 얼마 전 있었던 ‘중국 인민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알 수 있다. 중국은 대만에 있는 국민당군 참전 용사들을 데려와 열병식에 참석시켰다. 국공합작의 역사를 인정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이들을 초청했다고 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이 실제 역사를 시인했다고 봐야 한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모택동은 공산당 고위간부들을 소집해 향후 전쟁에 관한 방침을 정하는 비밀회의를 개최한다. 이때 그들이 결정한 전략이란,   


“일본과의 항쟁은 우리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는 70%를 역량 확대에, 20%를 국민당과의 투쟁에, 10%를 일본과의 투쟁에 사용해야 한다.”


였다.


중일전쟁을 온몸으로 받아낸 건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이었다. 8년 1개월의 전쟁 기간 동안 국민당군은 321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일설에는 그 두 배란 말도 있다), 206명의 장성급 지휘관들을 잃어야 했다. 그 사이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간혹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역할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명백한 실수다. 일본은 한때 중국 전선에만 80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맞붙은 전투만 해도 수차례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망자 숫자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에서만 민간인을 포함해 약 2천 만의 사상자가 났고, 일본군 전사자만 100만 명이 넘었다. 부상자 숫자도 110만 명이 넘었는데, 만약 이 병력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다른 연합국 전선으로 향했다면 그들이 겪었을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그리고 두 ‘미친놈’


1929년 10월 미국에서 불어 닥친 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은 ‘꽤’ 심각했다. 경제위기는 곧 사회불안으로 이어졌고 천황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홍역을 한 번 겪은 일본 수뇌부들로서는 흔들리는 일본을 좌시할 순 없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게 만주였다. 완전한 전쟁 경제로의 이행이었다.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일본 국민들을 전시동원 체제로 몰아넣어 사회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가 헌병의 통제 하에 일본을 통치하는 ‘켄페이(憲兵. 헌병) 통치’였다. 일본은 헌병과 고등경찰, 특별고등경찰들과 같은 정치경찰들을 경쟁시키며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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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특별고등경찰이나 고등경찰이 헌병대와 경쟁을 했다는 건 헌병대에게 실례다. 일본 헌병은 헌병으로서의 역할에 더해 방첩기관과 정치경찰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독일의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인 아프베어(abwehr)와 이탈리아의 SIM과 정식으로 연계해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헌병은 단순히 국내 치안을 유지하고 군 병력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기관으로서의 역할과 방첩기관, 정치사찰의 최전선에서 일본을 통제했었다. 이런 일본 헌병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영어 단어 ‘켐페이타이(Kempeitai)’다. 얼마나 악명을 떨쳤으면(국제적으로 ‘인정’ 받을 정도로) 고유명사가 등장했을까? (이 시기 조선총독부가 ‘무단통치’를 했다고 교과서에 나오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만주를 통해 상품판매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확보했고, 이를 발판으로 소련‧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소련과의 전쟁? 말이 될 법한 소리인가?”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도 납득이 안 가는 소리일 것이다(전 세계 1, 2, 3위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와 동시에 싸우겠다는 소리인데, 그 생각은 당시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소련과의 ‘충돌’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예상이 아니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1935년, 일본군은 만주사변의 기획자인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이때는 요직이었던 육군 참모부 작전부장으로 영전했다)인 이시하라 간지(石原 莞爾)를 중심으로 1941년까지 대소련전 준비를 할 수 있는 군수산업 개편 계획과 군비 증강 계획을 짜고 있었다.


미친 짓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당시 기준으로도 확실히 미친 짓이었다. 이 미친 짓의 배후에는 ‘미친놈’이 있었다.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고 나선 미친놈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였다면, 소련과 전쟁을 하겠다고 나선 미친놈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였다. (일본에겐 정말 다행이었던 건 이 두 ‘미친놈’들이 서로 앙숙이었다는 점이다. 태평양 전쟁 직후 있었던 도쿄 전범재판에서 이시하라 간지는 전범재판 ‘증인’으로 참석해 도조의 사형 선고를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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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도조 히데키가 ‘대동아공영권’의 실천자로 나서려 할 때 이시하라 간지는 ‘동아연맹’이란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 중국, 그리고 아시아 각국이 ‘동아연맹’이란 연맹체를 구성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 우선 소련을 패배시킨 후, 서양 각국의 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출해 이들을 ‘해방’시키고, 이를 토대로 미국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한다.”


당시 국제정세와 일본의 국력을 고려해 본다면 제대로 미친 것이다. 이시하라 간지는 동아연맹의 성립을 위해서는 중국과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만주사변의 주모자가 말이다).


“중국과의 전쟁은 장차 있을 소련과의 전쟁에서 방해가 될 뿐이다.”


언제부터 소련이 그렇게 만만했던 걸까? 이시하라는 전선을 확대하려는 부하들에게 확전불가론을 설파하며 육군 수뇌부와 싸웠다. 중국보다는 소련이었다. 이런 그의 주장과 몇 가지 돌발행동(관동군 참모들은 밥값을 못한다며 월급삭감을 요구했었다) 때문에 눈 밖에 났던 그는, 결국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와 크게 싸운다. 그리하여 그는 본국으로 좌천되어 한직을 떠돈다. 


그러나 ‘동아연맹’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이시하라 간지는 이에 관련된 글을 쓰고, 강연회를 다니면서,


“중국과의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주의자 같은 주장을 계속한다(목적은 다르지만, 결과만 보면 ‘평화’다). 한참 중국 대륙으로 뻗어(?) 나가던 일본군 앞에서 현역 일본군 중장이 계속해 이런 발언을 토해내니 일본 군부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나름 일본 육군의 실력자였던 그였기에 섣불리 그를 처단하자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의 오랜 앙숙이었던 도조 히데키를 빼고.


한때는 서로 노려볼 수 있는 거리였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도조 히데키는 수상의 반열에까지 올라선다. 그런 그를 보며 이시하라는,


“도조 히데키는 국가의 적이다!”


라고 비난을 했다. 이시하라에게 짧고 강한 ‘응징’이 떨어졌다.


‘강제예편’


덕분에 일본은 한 명의 ‘미친놈’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일본인에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회,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