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이라 써놓고 테러빙자법으로 읽히는 법)에 대한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아마도 3월 10일, 이번 임시국회의 회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덜 아시다시피 김광진 의원과 은수미 의원이 기록을 다시 세워가며 초인적인 모습을 보이며 화제가 되고, 기본 5시간이 넘는 이어지는 발언들 속에 야권 지지자들의 응원을 받는 중이다. 

한편, 청와대-정부-여당-여권지지자들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한결 같다. 한마디로 ‘19대 국회에서 뭐한 것도 없으면서 마지막까지 결국 아무것도 안 하려 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19대 국회는 역대 국회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성과가 없었다. 2월 임시국회를 통해 빠르게 법안들을 처리해보려고 했으나, 이 중 테러방지법이 합의를 이끌지 못한 채 정의화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 되면서 야당이 필리버스터에 돌입했다. 결국 3월 10일 이전에 다른 법안들도 처리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다른 법안들이 처리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일인지 패키지로 잘된 일인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 다만 청와대-정부-여당-여권지지자들이 이를 못마땅해 하는 것은 확실하다. 

테러방지법 자체에 대한 얘기는 이미 다른 기사에서 다뤄진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법안의 질적인 부분은 건너뛰고, 외적인 부분을 디벼보고자 한다. 테러방지법 직권상정과 그에 대한 필리버스터, 이 굵직한 사건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정리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체 흐름을 잡을 수 있다면 뒤이어질 너저분한 정치공세와 그에 대한 보도들에서 받을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 있으리라. 

1. 선거전 중독자들의 금단현상

안녕하세요 아무개입니다. 저는 선거전 중독자입니다.

이 나라의 정치판은 선거를 위해 돌아간다. 소수의 정상적인 정치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선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착을 보인다. 특히 여권은 전통적으로 그 증세가 심각하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국가 기밀을 공개적으로 누설하기도 하고, 국가권력기관을 선거여론에 직접 활용하기도 했다. 

이 정도가 중독증상의 상한선이 아닐까 싶었던 예상은 2016년 연이어 가차없이 깨지는 중이다. 추석에 성룡 영화를 상영하듯 한치 오차 없는 상관관계를 지니는 선거-북풍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뼈를 내주고도 살도 못 취하는 격의 ‘고도의 정치행위’를 냅다 질러 탄식을 자아낸다. 이마저도 부족했다는 듯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다짐으로 사드 카드를 꺼냄으로써 남북관계와 한중관계를 한큐에 경색시키기도 하였다. 선거전 중독증상이 중증 수준을 넘어가고 있다.

선거전 중독증상이 여권만의 특징은 아니라는 듯 몇몇 야권 정치인들도 사실관계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발언으로 이목을 끈다든가, 일단 둘 다 다 모르겠으니 까고 보는 초짜적 발상으로 선거전 중독 꿈나무의 면모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노골적이고 악화된 수준의 중독증상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선거 금단증상이라 하겠다. 총선은 4년에 한 번이고,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듯이, 총선 직전이야말로 금단증상이 가장 심각한 시기다. 안 그래도 중독이 심각한 환자들에게 시기적으로까지 그 증상이 과열될 수 밖에 없는 시국.

다른 은하계서 생명체가 발견됐다고 해도 선거에 활용할 이런 중환자들이 테러방지법이라고 해서 선거와 연관 짓지 않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일단 선거라는 요소는 기본 베이스로 깔고 들어간다. 이 바탕에서 그 시작을 살펴보자. 

2. 국가비상사태와 직권상정

2월 16일 대통령 국정연설 후

(출처: 뉴시스)

대한민국에는 ‘국가테러대책회의’라는 조직이 존재하지만 임기 중 한 번도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테러방지법의 처리를 정부의 숙원처럼 거듭 촉구하고, ‘국가비상사태’라며 국회의장이 직권상정까지 감행하는,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은 익히 알고 있을 터이다. 아들내미가 모친의 지갑에서 20만원을 몰래 꺼내가려다 걸려 놓고서는 ‘너무 배가 고파서 굶어 죽을 것만 같아 급히 돈을 꺼내어 먹을 걸 사러 간 거였다’고 핑계를 댔으나, 냉장고에는 잡채, 불고기, 만두 등이 있었고, 아들내미는 그 냉장고를 열어보지도 않았던 것과 비슷한 상황.

배가 고파 굶어 죽을 지경이면 일단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기 마련이거늘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조차 몰랐다는 점, 급히 뭘 먹으려고 돈에 손을 댄 것 치고는 액수가 너무 과하다는 점, 몇 달 전부터 새로 나온 20만 원 상당의 조던 시리즈 농구화를 사달라고 졸랐었던 전례로 보아 불순한 의도가 포착된 점 등에서 아들의 ‘진짜 배가 고팠다’는 말을 믿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과 관련해 ‘지금이 비상사태가 맞냐 아니냐’의 논쟁은 애초에 재고의 여지가 없다. 비상은 무슨.

어거지가 분명한 사안에 대한 논쟁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대신 이 직권상정의 전후사정을 보자. ‘진박’이라는 유치한 키워드가 화제인 이 시기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거듭 법안들의 명칭을 거론하며 처리를 촉구한 직후, 분명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라 직권상정을 못한다’던 여당소속 의원이자 국회의장이 2개월 만에 ‘국가비상사태다’라며 말을 바꿨다. 그 사이 일어난 안보관련 사건은 단 하나, 북한의 로켓 발사. 정의화 국회의장 입장에서 ‘그 때는 비상사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비상사태가 맞다’는 논리에 구차하나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북한 로켓발사 뿐이다. 

물론 북한의 로켓 발사를 가벼이 넘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따금씩 일반 외신보다도 뒤떨어지는 국정원의 정보력이 영장 없이 개인의 통신이용정보를 마음껏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국정원이 인터넷 게시물을 긴급히 삭제할 수 있으면 북한의 안보위협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몽상가도 없다. 

북한의 이러한 안보위협을 ‘테러’라고 지칭하는 것도 정치나 외교적 용어 사용이라기 보다는 문학적 허용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만,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반국가단체이므로 테러가 맞음’이라는 논리를 통해 가까스로 단어오용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웃기는 건 한반도에서의 ‘테러’를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넓은 의미로써 북한의 군사적 안보위협까지 아우르도록 의미를 확장한 반면, 테러방지법안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테러’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뭐, 지금 계속 시리즈로 웃기고들 계시니 이게 왜 웃긴 건지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어설픈 연결고리를 통해 북한의 로켓발사를 테러라는 범주로 끌고 오긴 해냈다만, 문제는 허구헌 날 선거만 되면 이어지는 북풍 때문에 대중들이 그닥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대중 정서가 후끈 달아오르지 않아 직권상정을 해야만 하는 국회의장이 느낄 부담감을 우려해서인지 정부에서는 친히 개성공단을 폐쇄시킨다. 뿐만 아니라 사드 논의까지 곁들이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개성공단 폐쇄가 과연 북한에 타격을 주는 것인지 우리에게 타격을 주는 것인지, 사드 논의가 합리적인 대응인지에 대한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다. 개성공단과 관련된 기업들이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주가가 폭락했지만, 대중들로 하여금 ‘ㅅㅂ 조때따’는 느낌을 강려크하게 갖게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흐름은 이렇다.

1) 북한의 로켓 발사

2) (이 사안과 테러방지법은 거의 상관이 없지만) 북한은 반국가단체이므로 이건 테러임

3) (비상이라 할만 한 직접적인 군사행위는 아니지만) 개성공단과 사드로 순식간에 상황을 악화시킴

4) 졸라 비상사태임

5) 직권상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음 

축구 하다 태클에 넘어져 발목이 삔 선수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펄쩍펄쩍 뛴다. 그 덕에 스스로의 갈비뼈를 부러뜨렸는데, 그 선수가 ‘갈비뼈가 부러져 폐나 심장을 찌르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목숨 걸린 듯이 호들갑을 떠는듯한 상황이다. 그렇게 테러방지법은 직권상정이 됐다. 

그렇다. 애초에 말이 되는 구석을 찾으려고 하는 게 헛짓이다. 

3. 청와대의 사정

청와대의 입장은 한결같다. 민생을 위한 현안들이 즐비해있는데 이번 국회는 도대체 뭘하냐는 식의 ‘격노’. 대통령의 격노가 유행이 된 게 대충 언제부터 인지는 다들 아시는 바, 격노가 선거 중독의 또 다른 증상이 아닌가 싶은 의혹은 둘째 치겠다. 중요한 건 전임 가카와 현 가카의 격노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MB의 격노는 보통 그 격노의 대상에게 뭔가 할 것임을 예고했다. 누구에게 격노를 해놓고 사실은 챙겨줄 걸 다 챙겨주는 식의 연막용으로 쓰기도 하고, 격노를 한 후 국정원과 검찰의 토탈 패키지를 통해 시원하게 엿을 먹이는 정직한 예고로도 쓰였다. 어느 쪽이든 MB의 격노는 그 대상과 본인 간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현 가카는 다르다. 현 가카의 격노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그 격노의 대상도 아닌, 본인의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의 성격을 지닌다. 워낙 부친을 신격화하는 지지자들이다 보니 가카가 격노하면 본인들도 그 대상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참으로 편리한 텔레파시 네트워크 인프라가 있다. 또한 가카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에 어떤 집단에서도 열외가 된다. 그러므로 가카가 국회에 대해 격노하면, 지지자들은 국회 전반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리고 개혁의지를 갖는다. 심지어 가카 스스로가 수장인 정부에 대해 격노를 하면 지지자들은 알아서 가카를 제외한 정부부처 소속인원들에 대해 분노한다. 그 발언이 탄핵 감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절대 곁들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청와대의 이러한 한결 같은 국회비판은 동시에 2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우선은 앞서 말한 대로 지지자들에 대한 메시지 전달이다. ‘19대 놈팽이들이 다 말아먹고 있음’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본인의 바람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현 의원들에 대한 반감을 증가시킨다. 물론 지지자들에게 있어서 야당 의원들은 그냥 ‘없는 존재’이므로 반감은 여당 소속 의원들에 국한된다. 

이 반감으로부터 2번째 기능이 파생된다. 이 기능은 현직 의원들 및 차기 총선 후보 물망에 오를 인사들에 대한 카리스마로 작용한다. 일단 19대에 낙선했거나 출마하지 않았던 인사들만 노나는 상황이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무능한 19대 놈팽이들에 대한 심판’의 이미지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직 의원들은 그 ‘19대 놈팽이들’의 범주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지닌다. 여당소속 현직 의원들 다수와 본인을 구분함으로써 가카의 옆에서 함께 손가락질하는 지위를 확보하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눈꼴사나운 ‘진박’ 논쟁과 신랄한 내부비판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청와대의 ‘격노’와 책상 스매싱은 지지자들에 대한 텔레파시 발사와 당내 의원 및 예비-예비후보들을 압박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 어떤 손해가 벌어지는지는 중요치 않다.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한다면 국회나 정부에 격노하면 되니까. 그렇게 격노하면 지지자들은 함께 격노할 거고, 국회나 정부는 열심히 눈치를 볼 거고, 임기는 알아서 끝나면서 ‘놈팽이들 사이에서 홀로 끝까지 잘해보려 한 지도자’로 남을 테니. 

4. 여당의 사정

이 판국에 여당인 새누리당의 반응은 언뜻 보기에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내부적인 갈등과 상호비판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테러방지법안 필리버스터에 대한 대응 또한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로 인해 몇몇 야권 지지자들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여당을 15일 간 묶어두면서 총선관련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하기도 한다. 항간에는 새누리당 자신들이 통과시킨 국회법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꼴을 고소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일리 있는 시각이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략 이런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압박을 하니 국회의장이 궁여지책으로 직권상정을 해버리고, 이에 야권에서 필리버스터를 시작하자 ‘아뿔싸 이런 카드가 있었구나’라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양새. 이 시나리오가 성립하려면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할 것을 새누리당 내에서 몰랐거나, 혹은 알았는데 필리버스터 및 그에 뒤따르는 정치적 손해를 예상하지 못했거나, 이 모든 걸 예상하긴 했는데 직권상정 여부에 대해 당내 갈등으로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직권상정에 이르렀어야 한다. 

3가지 옵션 모두 다소 현실성이 떨어진다. 국회의장이 완전한 독단으로 직권상정을 단행했다고 보기엔 당내 반응이 특별치 않고, 필리버스터 및 그 영향을 예상치 못했다고 하기엔 며칠째 너무 매끄럽고 잠잠하다. 당내 갈등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대놓고 서로 까대는 분위기상 아무런 특이사항도 없다. 그러므로 여권 지지자 입장에서 그다지 고소해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 조용한 상황을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상황’이라고 볼 근거는 부족하다는 얘기.

그에 반해 그 반대라는 증거는 좀 있다. 현행 국회법의 필리버스터 관련 조항에 의해, 3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성공하여 이번 임시국회 기한을 넘긴다 해도, 3월 말에 임시국회를 열면 필리버스터는 중단되고 바로 표결에 들어간다. 3월 임시국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테러방지법의 처리 또한 연기되겠지만, 이 경우 총선을 코앞에 두고 선거구 획정이 문제가 된다. 

2014년 일이라 가물가물하실 분들을 위해 선거구 획정 문제를 요약하자면, ‘기존의 선거구 획정이 사실상 위헌이므로, 2015년 12월 31일까지 국회에서 이를 개선하여 입법하도록 한 것’이다. 위헌인 기존 선거구를 그대로 사용하여 총선을 치를 수는 없으므로 총선은 반드시 개선 입법 이후에 이뤄져야 한다. 말하자면 통과돼선 안 되는 법안과 반드시 통과돼야만 하는 법안이 공존하는 셈이다. 테러방지법은 어차피 표결에 부쳐질 것이고, 그 타이밍이 늦어질 수록 선거구 획정도 늦어져 총선이 연기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새누리당이 뒷짐지고 관망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만약 여당이 지금 허둥지둥하는 중이라면 이 모든 사실을 모른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당대표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상향식 공천을 실제로 시행한다 가정하면, 지금 당장 외부활동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리스크가 적어지기도 한다. 선수를 내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오히려 국민적 관심을 받고 있는 필리버스터의 현장에서 되도 않는 헛소리나 한번씩 내뱉어주는 게 그네들 입장에선 홍보효과가 더 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래서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5. 그들의 믿는 구석

언론 앞에서 대놓고 언성을 높이고, 마이크와 카메라가 켜져 있는 상태에서 무리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모습. 입바른 소리 한다고 대놓고 내치고, 작지 않은 스캔들로 탈당했던 인물을 다시 대놓고 데리고 오는 모습. 제1야당에서 모처럼 화제를 모으는 인재영입을 하는 와중에 끝없이 상향식 공천 논쟁만 이어가는 모습. 필리버스터의 화제 속에서 그저 묵묵히 관망하고 있는 모습. 이 모습에서 연상되는 건 어떤 ‘자신감’이다. 유리한 판세에도 불리한 것 마냥 최선을 다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대비된다.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대한민국 정치판은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총선은 그 기울어짐이 더 하다. 야권 지지자들의 열기가 그렇게도 뜨거웠던 19대 총선에서조차 새누리당은 이겼다. 이겨도 하루 이틀 이겨본 게 아닌 상황에서, 여권 반대의 여론이 임계점을 넘지 못한다면 웬만해선 새누리당이 이긴다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습득된 임계점은 19대 총선의 ‘정권심판’ 여론보다는 위에 있고, 17대 총선의 ‘탄핵정국’ 여론보다는 아래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한나라당-자유선진당-친박연대로 분열됐던 18대 총선을 고려해보면, 한 덩어리로 잘 붙어있는 여당과 분열돼있는 야권에 대해 어느 쪽이 낙관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정부에 대한 여론조사도 부정이 우세했던 작년에 비하면 나쁘지 않고, 탄핵정국과 비교할 수준은 더더욱 아니다. 정당지지율 또한 결코 나쁘다고 볼 수 없는 40%를 유지한다. 이 상태에서 야권 내부 분열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새누리당이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한들 무모하다고 볼 순 없다. 

자신감의 증거로 각종 과격한 언사들이 이슈가 되더라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김무성 대표의 중간층 투표포기 전략 발언이나, 복지로 인해 국민이 나태해진다는 발언, 불법파업과 3만 불 발언 등 다양한 어록이 화제가 되지만, 그냥 쌩까는 것으로 일관한다. 청와대에서도 간접적 선거개입행위로 볼 수 있는 발언을 이어 화제가 되지만 이에 대해서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넘어간다. 위 짤방의 ‘나라 팔아먹어도’ 발언은 헛웃음만 자아낼 뿐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중들이 이미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인들만 끝끝내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

저런 발언이나 여론들은 사실상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화제다. 이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어 있지 않던가. 또한 같은 수준의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 야권에서 한 경우와 여권에서 한 경우 차별적인 해석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전통’이 이만저만 뿌리깊은 것이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냥 ‘이래도 된다’는 태도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마치 반칙 4개 먹은 변덕규가 적당한 파울성 몸싸움으로 반칙의 선을 그었듯, 그들은 ‘해도 되는’ 영역의 선을 점차 구체화 시키고 있다. 그들은 이제 저 정도 노골적이어도 된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아래와 같이 예상할 수 있다. 

- 필리버스터가 화제가 되면서 야권이 결집하더라도 어차피 지금은 분열돼있다.
- 북한 로켓발사/개성공단/사드 이슈로 인해 테러방지법은 반대여론 임계점을 넘길 수준으로 불리한 사안이 아니다.
- 필리버스터가 이어질수록 선거구 획정 또한 연기되면서 야당은 점차 수세에 몰린다. 
- 상향식 공천 여론이 나쁘지 않은 만큼 한방의 기회는 남아있다. 
- 결국 어차피 이길 것이고, 상향식 공천이 승리의 요인으로 꼽힐 것이고, 새누리당은 개혁적 이미지를 얻을 것이고, 당대표는 능력을 인정받을 것이다. 

<킹오브 파이터 97>에서 무한 파워차지 콤보 먹이는 테리 보가드마냥, 참으로 얄밉지만 다음 버전이 나오지 않는 이상 별다른 도리도 없는, 복장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겠다. 

6. 그래서 어쩌라고
 

정리하자면 이 글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20대 총선에 대한 예상보다는, ‘아마도 이런 식일 것이다’라는 그네들에 대한 예상이다. 역대급 전력이라는 라인업으로도 몇 번 못 이겨 본 야권 입장에서 딱히 역대급도 아닌 현재스코어를 갖고 낙관적인 기대를 하긴 어렵다 보니 전망치가 저 모냥인 건 일단 받아들인다고 치자. 

어차피 저런 코미디 법안이 발의된 것부터가 문제고, 그걸 또 비상사태라며 직권상정을 한 것도 문제일뿐더러, 위헌소지가 있는 선거구로 그간 선거를 해온 것도 문제다. 어디 문제가 이것뿐이겠는가. 숱한 문제의 인과들 속에서 이번 필리버스터가 마법의 반지라도 되는 듯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확실한 건 2가지다. 이번 필리버스터가 3월 10일까지 이어진다 해도 테러방지법에 대한 정부여당의 집착이 끝날 리 없다. 분명 3월 임시국회가 열릴 것이고, 열림과 동시에 표결에 들어가는 상황을 목전에 둘 것이다. 그 시기를 즈음하여 정부와 여당은 또다시 야권을 압박할 것이고, 총선을 인질처럼 활용할 것이다. 혹시라도 지금은 야권의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다가 그 때가서 비난하는 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우둔한 짓이다(지금부터 필리버스터를 비난하는 것의 우둔함은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번 필리버스터는 그 직접적 결과와 관계없이 한국 정치역사에 남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미 기록은 세워지고 있으며 후대의 정치학도들은 지금 이 시기의 자료를 찾아 학습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 여론이 어떠했는지를 찾아내려 애쓸 것이고,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바탕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대중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해야 하고, 각각의 야당이 어떻게 해야 총선을 이길 수 있는지는 쓸 수 없다.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분수에 넘치는 정치관련 칼럼을 쓰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다짐하는 바는 생겼다. 선거 중독증상을 따라 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정치를 여러 변수로 이뤄진 함수로 규정하고 그 함수식을 유도하려 들지는 않겠다. 생각해보면 우리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정치인들은 모두 중독증상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하나 같이 무모해 보이는 싸움에 뼈 아프게 쓰러지더라도 그 싸움의 끈을 놓지 않는 뚜렷한 전력을 지녔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마치 지금 이 시각에도 벌어지고 있는 필리버스터처럼 말이다. 그저 지지하는 것 만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이, 지지해야 할 것마저도 지지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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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