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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월 29일(월)에 작성되었으나 국가비상사태와

본지의 사옥 이전이 겹치는 대혼란으로 인해 이제야 올리게 되었다.


필리버스터에 관한 내용이 해당 날짜 기준으로 작성된 점,

독자분들께 넓은 양해를 구한다.


 





한국에서 전례 없는 필리버스터로 축제 아닌 축제의 판이 120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의 8시간 시차 때문에 본 필자는 아깝게도 김광진 의원의 개회사를 놓쳤다. 은수미 의원의 발언부터 그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중. 먼 곳에서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한 개인의 심정으로서는 어쩐지 신나면서도 안타깝다. 긴 시간을 신체적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발언을 이어가는 야당 의원들이 안쓰럽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까우며, 그와 동시에 이제서야 나를 대변해 주는 정치인들을 만나게 된 것 같아 신이 난다.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잠에서 깨면 먼저 트위터부터 확인하고, 유튜브에서 필리버스터 생중계 영상을 켜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혹 프랑스의 언론에서 현재 한국 국회의 상황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 검색을 하고 있다. 이번 주에 한국 관련 소식이라고는 지난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 3주년을 하루 앞둔 그 날, 광화문광장 북측 광장에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주관한 유령집회에 대한 단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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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서울에서 열린 유령집회

사진 출처 - <RFI>


프랑스 라디오의 서울 통신원 프레데릭 오자르디아스(Frédéric Ojardias)는 기사를 통해 한국 정부가 집회에 경찰력을 과도하게 동원하여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고 전한다. 또한 이것이 2년 전 세월호 침몰 사고 때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밝힌다. <르몽드>는 2월 24일 기사를 통하여 홀로그램을 이용한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광경을 영상으로 전한다. 그런데 그게 다다. 2월 28일 일요일 프랑스 시각 낮 12시 30분 현재 다시 한 번 검색해 보아도 프랑스어로 된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한 기사는 없다. 다만 프랑스 통신사 AFP가 작성한 영어 기사가 있다. 한국에 가 있는 프랑스 통신원들이 조금 더 분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뒷북치기 기념 필자 덧붙임 : 이제 필리버스터도 끝났겠다, 그냥 맘 편히 있는 자료 모아서 써 주셔도 되겠다. 아니, 뭐 이제 지면을 할애할 이유가 많이 축소되었으니 안 써도 뭐…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파란 지붕 집으로 다시 돌아가 노년을 보내고 계시는 우리의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이 펼치고 있는 필리버스터를 두고 "어떤 나라에도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고 했다. 물론 그보다 더 유명해 진 것은 "도대체 어쩌냐는 거냐"며 십여 차례 내려친 책상이지만. 결국 그 책상이 박 대통령의 은혜로 생명력을 부여받아 마치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에서 100일을 버틴 곰 한 마리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 이 나라의 시조 단군의 어머니 웅녀가 되듯, 인격화되어 트위터에 계정(@Hammerd_desk)까지 개설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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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단다… 이제는 통각까지 완벽 구비


박 대통령의 "어떤 나라에도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는 워딩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많은 플랫폼을 통해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굳이 진위 여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박근혜가 때린 책상’에 2차 폭행을가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양심이 있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미 20분간 십여 차례 폭행을 당한 그 ‘ 책상’에 다시 손을 대는 것은 해서는 아니 될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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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다지 않는가 !


그래서 그냥 프랑스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있는지, 또한 그 사례는 어떠한지를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필리버스터는 프랑스어로 ‘옵스트뤽시옹 파를르망태르(Obstruction parlementaire)’라 한다. ‘Obstruction’은 ‘의사 방해’라는 뜻이고, ‘parlementaire’는 ‘국회의’라는 뜻의 형용사.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계의 여느 국가에서나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필리버스터는 다수가 밀어붙이는 안건이 통과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합법적인 방법이다. 이는 이미 고대 로마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 정치 전술로, 현대 사회에서는 미국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무제한으로 의사 발언을 이어 나가는 한국이나 미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보통 엄청난 양의 수정안을 국회로 가져와 논의하도록 하여 결국 표결을 늦추는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수정안 전투(bataille d’amendements)'라 불리며, 일반적으로 국무총리가 헌법 49조 3항을 적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조항을 적용하여 국무총리가 표결 없이 해당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면, 야당은 정부에 대한 불신임 결의로 맞서는데, 이 방법은 결국 다수당의 정치적 지지도를 잃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므로 프랑스 정계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필리버스터 사례는 2006년 9월의 프랑스 국영 에너지 생산 기업 GDF(프랑스 가스 공사)와 민영 기업 수에즈(Suez)의 합병 법안에 반대하여 수정안 13만7천 건이 접수된 것을 들 수 있겠다. 공기업을 민영화시키고, 또한 경쟁대상이었던 두 회사를 합병함으로써 프랑스의 에너지 경쟁력이 사라지고 결국 소비자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한 야당 측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 모든 업무를 의도적으로 마비시킴으로써 법안에 대한 표결을 방해한 것이다. 사회당(PS)에서 4만3천여 건을, 공산당(PC)에서 9만 3천여 건을 제출했다. 이 수치는 프랑스 국회가 한 해에 처리하는 개정안의 양의 6배에 달하는 것.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두 회사의 합병은 결국 이루어진다. 일 년이나 지나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의 적극적인 주도 하에. 단, 프랑스 정부는 앞으로 에너지 가격 정책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필리버스터 역시 ‘수정안 전투’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지난 2013년 1월, 동성간 결혼을 합법화하는 ‘모두를 위한 결혼법’이 표결에 붙여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우파 야당 측에서 5만여 건의 수정안을 준비했다. 그 수정안을 모두 검토하는 데에만 해도 최소 2주가 넘는 토론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결국 2012년 11월에 상정된 이 안은 2013년 4월 23일, 헌법재판소에서 합헌판결을 받은 이후 2013년 5월에 공포되기에 이른다. 물론 아직도 우파에서는 공공연히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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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5일, 프랑스 하원

13만7천537개에 달하는 엄청난 개정안 폭탄을 맞은

당시 하원의장 장 루이 드브레(Jean-Louis Debré)

사진 출처 - <르 피가로> 2009년 1월 13일자 기사


사실, 프랑스 사회는 지금 엉망이다. 지난주 기사에서 언급한 노동법 개정(인지 개악인지) 건으로 인하여 인터넷에서는 반대 청원이 있었고, 그에 서명한 이가 60만 명이 넘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프랑스 정부에서는 온갖 루머를 잡고 시민들을 설득시키겠다며 트위터 계정 @LoiTravail(노동법)을 만들었다. 이를 관리하는 정부 관계자는 인터넷상의 공식 조롱거리가 된 이 계정을 두고, 개설 24시간 만에 팔로워가 5천 명이 넘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는 후문. 그런가 하면 엘 콤리(El Khomri) 노동부 장관은 이 반대 청원에 직접 답글까지 남겨 주셨다. 청원서에 작성된 세부 내용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대신 청원서 내용에 오류가 많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짧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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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나는 노동법이야 !

요즘 사람들이 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날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여기에서 내가 다 이야기해 줄게 !


노동법 개혁 프로젝트를 계기로 여당인 사회당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프랑스 북부의 도시 릴(Lille) 시장이자 전 사회당(PS) 제 1서기 마르틴 오브리(Martine Aubry)와 EU의 녹색당그룹(Verts/ALE)의 전 공동의장 다니엘 콘 벤딕트(Daniel Cohn-Bendit)를 필두로 좌파 인사들이 현재 올랑드 대통령과 발스 총리가 주도하는 일련의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르몽드>의 2월 24일 지면을 빌려 현 정부의 정책은 "프랑스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현 정부에 대한 사회당 내부에서의 반대는 전례없이 극렬하다. "(올랑드 대통령과 발스 총리는) 단순히 이번 정권의 실패뿐 아니라 프랑스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번 발표문은 여당 인사 18명이 서명 및 공동집필하였다.


반면, 발스 총리의 측근으로 평가되는 장 마리 르 귀엔(Jean-Marie Le Guen) 정무차관은 <BFMTV>에 출연하여 이들의 행동을 두고 "정치적 잘못"이자 "훈계하려는 태도"로는 "현 상황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경제부 장관 미쉘 사팽( Michel Sapin)은 <LCP>에 출연, 사회당의 전 제 1서기가 자신의 당에 대항하는 모습이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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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오브리 릴 시장

사진 출처 - <유럽1> 2012년 5월 22일자 기사


필자가 그나마 한국의 사정이 노동법 개혁(인지 개악인지) 프로젝트를 목전에 둔 프랑스 사정보다 조금 낫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적어도 한국은 야당이 (거의)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는 아무리 보아도 우파적(필자 주 : 자세한 내용은 저번 기사를 참고)으로밖에 봐 줄 수 없는 노동법 개혁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이 좌파인 여당이며,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우파 야당은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 하겠다. 공화당(LR)을 위시한 우파 야당들은 "노동법 개혁안이 아직 충분치 않다"며 숟가락을 살짝 얹으려 하는 시도를 보일 뿐이다.


*필자 덧붙임 : 프랑스의 정치가 점차 좌우의 구분이 옅어지고 있다면, 한국의 여야는 소수이기에 약자임을 인정한 야당이 스스로 한계를 상정해 버린 상황으로 보인다. 필리버스터가 이어지던 내내 장시간 토론을 하던 야당 의원들에게 지지를 보내던 시민들은 잠시 ‘닭 쫓던 개’가 된 듯한 허무함을 느꼈다. 적잖은 이들이 ‘필리버스터 중단’ 속보를 믿지 못하겠다며 오보노라 자기 최면을 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치라곤 1도 모르는 필자로서는 비록 처음부터 종착지가 정해져 있는 여정이었을지언정 필리버스터를 끝까지 이어 가며 오히려 야당의 결개와 의지를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가며


딴지일보의 프랑스 특파원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는 본 필자 역시 프랑스의 상황보다는 한국에 관심이 훨씬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한국 국회의 필리버스터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지속될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역사적인 그 현장에서 야당 의원들의 발언을 경청하지도, 국회 앞에서 진행된다는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가하지도 못 하지만 지금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도 필리버스터 생중계를 마치 배경음악인 양 틀어 놓고 있으며, 수시로 관련 기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지지를 보내고자 한다.


*필자 덧붙임 : 맛나게 먹던 떡을 빼앗긴 아이마냥 허무한 마음을 숨길 바는 없지만 그래도 시간은 간다. 어쨌든 필리버스터는 끝났고, 선거가 곧 다가올 터.이번에 펼쳐진 ‘필리버스터’라는 이름의 축제로 우리는 한국 야당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확인한 듯 하다. 그리고 이번 4월 선거가 야당의 가능성을 촉진시키고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축소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모두들 평안한 한 주 되시라.




덧붙임. 2016년 2월 넷째 주 TOP25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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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는 지금> 연재 기사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힌 인터넷 기사 매일 5건, 한 주에 총 25건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기사로, 동시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 프랑스어로 된 매체의 기사들을 모두 프랑스인들만 읽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전세계 프랑스어 사용자의 대부분이 프랑스 본토에 분포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구글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기사 검색 시간은 프랑스 시간으로 매일 오전 8-9시 사이입니다.  프랑스 현지 시간에 따라서 기사를 수집하여 오류를 최대한 좁히려 하였습니다.


3. 본 연재물에서는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혹은 프랑스 매체에서 다루는 모든 기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는 않는 관계로 그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인권의 나라’라던가 ‘낭만의 나라’ 정도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민낯은 어떤지, 한국의 모습과는 어떻게 닮고, 또 다른지를 전할 수 있다면 제 목표는 충분히 전달한 것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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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vs전 대통령 사르코지

파리 테러, 현재 상황





아까이소라

트위터 : @candy4sora


편집: 딴지일보 cocoa